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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03화 (893/1,404)

#902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4)

자동 시스템에 의해 전장의 흔적이 빨리 사라지는 구역이 있었다.

그건 주로 거대한 성이 있는 구역이나 NPC들이 머무르는 마을 주변,

혹은 유적지가 변형될 때.

그리고 특수한 이벤트가 있는 장소 등에 국한되었다.

보통 이런 장소들은 NPC들이 복구를 한다는 설정이 있으니까.

어지간히 박살 나지 않는 이상은 다시 돌아왔을 때 원 상태의 모습을 거의 유지했다.

반대로 거의 대부분의 필드는 한 번 상태가 훼손이 되면 그 상태로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말하는 사냥터들.

그런 장소들은 NPC들이 돌아다니지 않으니.

인위적으로 복구가 되는 일은 확률상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당연히 지금의 이 흔적들 역시도 전혀 복구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누가 붙은 걸까요?”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멀리 있는 뱀파이어의 영역과 바닥의 전투 흔적들을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말을 꺼냈다.

“붙은 게 아니야. 습격당한 거지.”

“습격요?”

“어, 여기 이 흔적을 봐. 처음에는 일렬로 쭉 앞으로 간 흔적이 남지?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달라. 다들 급하게 발을 돌린 흔적에 이어서 무수하게 많은 화살이 찍힌 자국이 있잖아.”

재중이 형 말대로 지금은 화살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지만 바닥에는 벌집이라도 만든 듯 수많은 화살이 박혔던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역기들. 땅이 많이 파이지 않은 걸 봐서는 거의 대부분 디버프 종류야.”

“습격에 이은 발을 묶는 디버프인가요.”

나 역시 사방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그런 흔적들이었다.

아마 화살 역시도 그런 종류였을 확률이 높았고.

처음부터 죽이려던 목적이 아닌가?

이건.

그냥 시간을 끄는 정도?

왜 굳이 번거롭게……?

재중이 형도 잠시 여기저기 지형을 살펴보더니 뭔가 알아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오히려 초월 쪽 연합들에서 상대의 뒤를 친 거군.”

“네? 그 반대 아닌가요?”

여기는 원래 초월 쪽 연합들의 영역이었다.

이 사냥터에서 사냥하는 많은 유저들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유저들끼리 전투가 일어났다면.

그건 상대가 초월 연합들의 뒤를 쳤을 확률이 훨씬 농후했다.

안정적으로 사냥하고 있던 유저의 뒤를 친다.

이건 뒤치기의 정석 같은 일이라.

비단 여기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냥터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뭐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유저들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견제나 발목을 잡는 형태로만 공격이 들어간 상황이었다.

아예 죽이려는 게 아니라.

사냥터에 억지로 들어오면 차라리 죽였으면 죽였지.

이런 식으로는 공격하진 않아.

물론 경고의 의미로 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사냥터에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가 의미가 있나?

그것도 정면에서 경고가 아니라 뒤를 쳐서?

앞뒤가 맞지 않는데…….

“아냐. 뒤를 친 게 맞아. 그것도 발목을 잡으려고.”

“이해할 수가 없네요. 굳이 왜…….”

그러다가 순간 생각나는 것들이 있었다.

“역시 네임드인가요?”

“눈치 빠른데?”

두 세력이 붙은 흔적과 방향성.

거기다 그들 세력의 목적이 반대로 뒤집힌 걸 봐서는…….

“그래서 이 녀석들은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여기까지 마중 나와서 정체 모를 세력들의 뒤를 친 거야.”

그러자 재중이 형이 이전에 말한 것들이 떠올랐다.

네임드가 리젠 되는 시간에 맞춰서 잡기는 잡아야 하는데 거점 쟁탈전 때문에 레이드에 빼낼 수 있는 인원은 한정적.

그래도 레이드는 성공시켜야 하기 때문에 어중간한 인원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소수 정예를 보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보낼 인원들도 너무 정예를 보낼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에이스들이 너무 빠져서 전력이 모자라 거점을 공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어중간한 녀석들은 아예 공략이 불가능.

발록과 동급인 녀석의 레이드가 쉽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

능력도 일정 이상은 유저들을 뽑으려면.

결국 빠듯한 수준으로 맞출 수밖에 없어.

보통 때야 넘치듯 많은 예비 인원들까지 데리고 와서 레이드에 방해가 되지 않게 바리게이트까지 쳤겠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오히려 네임드를 사냥하는 인원들조차 아슬아슬한 상황.

이럴 때 만약 누군가에게 레이드를 방해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가득이나 간당간당한데.

방해까지 받게 되면.

레이드를 성공시키기는커녕 목도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다 처음에 화살과 디버프 위주의 마법들만 쓴 이유도 마찬가지.

애초에 인원이 많지도 않았어.

소수의 인원으로 커버를 하려면 결국 이 정도가 한계라는 거지.

“그럼 본대는 이 영역 어디선가 네임드를 끌고 다니면서 레이드를 하고 있겠네요.”

“아마도? 어차피 뜨는 장소는 노출되어 있으니 그 자리에서 계속 있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군요.”

왜 두 세력이 반대로 됐는지 이해가 됐다.

지금 도착한 우리는 몰랐지만.

이 사냥터 안에는 지금 쫓고 쫓기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네임드를 달고.

“역시 패황 쪽일까요?”

“어, 그 녀석들이야 굳이 자신들이 네임드를 잡지 못한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으니까.”

“방해만 해도 된다는 거네요.”

초월 쪽 연합들이 네임드를 잡지 못하는 사이 자신들이 그 네임드를 잡는 건 베스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베스트인 상황만 챙겨야 하는 건 또 아니었다.

그것도 네임드를 사냥할 목적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는 상대가 네임드를 잡지 못하게만 해도 중간은 간다.

직접적인 전투로 상대의 전력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이건 효과적일 터.

그리고 그 상황에서는 굳이 정예도 필요 없었다.

“이쪽도 정예는 아니겠네요.”

“어, 방해만 할 목적이라면 쪽수만 많아도 돼. 레이드에 집중하지 못하게만 해도 충분하니. 당장 여길 봐. 생각보다 숫자가 꽤 많지?”

재중이 형 역시도 같은 생각.

무엇보다.

지금 바닥에 찍힌 발자국들의 숫자만 보면.

나와 재중이 형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남아 있는 발자국의 숫자만으로도 적들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확실히 그렇네요.”

“자, 그럼 한번 흔적을 따라가 보자고.”

발자국들이 어수선하게 찍혀 있긴 한데.

그렇다고 추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인 것은 또 아니었다.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발자국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일단 집단적으로 찍혀 있는데다가 견제를 받으면서도 방향성 하나는 확실해 보였으니.

“저쪽으로 가죠.”

견제를 하려는 자들과 또 그걸 막으려는 자.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시간을 끄는 쪽.

한쪽은 그걸 피해서 빨리 나아가려는 쪽.

두 집단의 싸움은 보고 있는 우리들도 흥미롭게 만들었다.

둘 다 중간에 싹 죽어 주면 우리야 감사한 일이고.

그런데 아쉽게도 중간에 죽어 나간 유저는 없는지 추격하는 내내 일정한 숫자가 계속 유지되는 모양새였다.

특히 외곽에서 뒤를 잡으면서 따라다니는 녀석들의 흔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설마 한 명도 죽지 않았나?

이건 거의 일당백의 수준인데?

아무리 외곽만 돌면서 싸웠다고 하더라도.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유저들을 소몰이 하듯이 한곳에 몰아넣고도 죽지 않고 버틴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형, 아무래도 어설픈 정예를 빼온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어. 적어도 지금 시간 끌러 나온 녀석들은 꽤 실력이 있어.”

그런데 그렇게 쭉 흔적을 따라가다가 결국 변수가 나왔다.

“여기!”

“어, 나도 봤다.”

뭔가 격하게 한판 붙은 것 같은 흔적들.

그것도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은 못 보낸다는 듯 꽤나 격렬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문제도 같이 생겼다.

“형, 흔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지금까지 한 곳으로만 향하던 대규모 유저들의 흔적들이 이곳을 기점으로 해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당장 발자국 흔적만 봐도 방향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흐음. 이건 곤란한데? 이걸 다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숨겨진 한두 개의 흔적을 쭉 따라가는 능력이라면 재중이 형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사방팔방 흔적들이 흩어져 버리면 그때부터는 쪽수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문제는 지금 우리는 나와 재중이 형, 그리고 발록이 전부였다.

거기다 따로 흩어져서 따라가기에는 여기가 그렇게 쉬운 장소도 아니었고.

발록이야 뭐…….

그냥 자기 집 앞마당마냥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일단 한 번 감각을 펼쳐볼게요.”

단순한 추격으로 안 된다면……!

결국 능력을 쓸 수밖에.

감각을 집중에서 내 주변으로 쫙 퍼트렸다.

노면의 잔잔하게 들려오는 진동.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기묘한 흔들림.

그리고 누군가의 움직임에서 파생되는 대기의 울림까지.

눈을 감고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며 주변을 느끼다가 곧 한숨을 쉬고 말았다.

“유저들의 흔적을 몇 곳에서 찾긴 했는데 여기서 너무 멀어요. 그리고 서로 너무 많이 흩어져 있어요.”

어디로 유저들이 흩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방향들이 문제였다.

갈라진 경우의 수만 거의 일곱.

떨어진 유저들끼리 완전히 반대 방향인 경우도 있었고.

만약 한쪽을 따라가면 다른 쪽은 그냥 포기해야 한다.

심지어 여기서부터 계속 멀어지는 중이었다.

“흐음, 아예 맵 전체를 다 뒤질 작정인 건가?”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계획 없이 흩어지는 경우는 그것밖에는 없었다.

재중이 형도 이건 손을 들었다는 듯 어이없게 웃어버렸다.

“뭐, 할 수 없나.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따라가 볼 수밖에.”

옆에서 발록은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근히 슬쩍슬쩍 보는 걸 봐선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흠, 인간들은 재미난 짓을 하는군.”

“응?”

그러더니 발록이 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곳은……?

아까 내가 느낀 방향들 중에 하나인데.

저쪽 방향으로 향한 숫자가 그렇게 많진 않아서 추격 후보군에서 뒤로 밀었던 곳이기도 했다.

“저쪽에 뭐가 있어?”

내 물음에 발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게 싸움의 흔적이라면. 그보다 더 먼 곳에 인간들이 우글거리는군.”

그 순간 재중이 형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형, 아무래도 발록의 레이더가 훨씬 멀리 보는 것 같은데요?”

“뭐, 이 녀석은 네임드잖아. 시스템적으로 보면 전 맵도 다 살필 수 있을 걸?”

“하긴 그렇겠네요.”

이거 참.

처음부터 발록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그럼 이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뭐 발록이 처음부터 알려줄 거란 기대가 없긴 하지만.

“일단 가죠.”

방향을 확실히 알았으니 이제는 추격하는 일만 남았을 뿐.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면 늦지 않게 도착해야 했다.

그렇게 나와 재중이 형, 발록이 같이 중간에 포진한 몬스터들을 피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흐음.

은근히 몬스터들이 안 걸린단 말이야.

아무리 잘 피해간다고 해도.

여긴 사냥터다.

기본적으로 몬스터가 유저에게 달려들어야 정상이기도 하고.

그러다 슬쩍 발록을 바라보았다.

감각으로 살펴봤을 때 몬스터들이 발록 때문에 우리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일은 쉬워지겠네.

그렇게 흔적을 따라 어느 한 넓은 구릉에 도착하자마자 병장기 소리가 격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저건…….

“뱀파이어 로드!”

그런데 그 사이에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상상을 초월하는.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하……!

이놈들.

완전 미친놈들이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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