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화 대천사의 무덤 (14)
학살의 천사.
이제껏 마계에서 보던 몬스터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녀석들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인간형이었지만.
인간형과 확연히 다른 점은 바로 날개가 있다는 점.
그리고 녀석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직업이 나뉘어져 있는 거지?
근위병, 마법병, 궁위병 같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똑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일체형 갑옷을 입고 있어서 전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녀석들의 하얀 갑옷이 변형을 일으켰다.
갑옷의 일부가 녀석들의 손으로 밀려나가더니 이내 하나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근위병에게는 검과 방패.
마법병에게는 양손 스태프가.
그리고 궁위병은 양손에 커다란 활이 생성되었다.
또 다른 투사병은 역시 강력해 보이는 배틀 액스가 쥐어졌고.
각각의 이름에 맞는 무기들이 동시에 생성이 되어 손에 쥐어지자 녀석들의 감겨 있던 눈이 한꺼번에 떠졌다.
그것도 매우 불길해 보이는 진한 붉은 빛을 내며.
잘못 보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말 진한 붉은 색이었다.
특히나 몸 전체가 하얗다 보니 더욱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고.
“저것들…… 천사가 맞긴 한 거죠?”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천사가 맞겠지. 그 속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재중이 형 말대로.
녀석들의 네임이나 생김새들은 누가 봐도 천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분위기가 달랐다.
거기다 학살이라는 이름이 붙다니…….
천사에게 붙을만한 수식어는 일단 아니지.
그때 재중이 형이 흘깃 주변을 살펴보다가 다시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포위된 것 같다.”
“네, 생각보다 많아요.”
단순히 하얀 결계에서만 녀석들이 나오는지 알았는데 우리 주변의 공간에서도 뭔가의 워프가 열리면서 녀석들이 속속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이 함정이라도 되는 양.
“나갈 길은요?”
“글쎄다. 지금 보기에는 없어 보이는데?”
재중이 형도 포위되는 순간 움직이려고 했겠지만 애초에 우리가 갈 수 있을 방향 모든 곳에서 녀석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순간 이동 반지를 살펴보다가 바로 눈썹을 찡그렸다.
“워프도 안 되네요. 반지가 비활성화 상태에요.”
“듣던 중 안 반가운 소린데?”
그러면 결국 이 녀석들을 잡아야 다음이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발록, 길을 뚫을 수 있겠어?”
나름 기댈 구석이 있기 때문이지.
네임드 중에서도 레벨이 오를대로 오른 최강의 네임드.
발록이 여기 있는 이상은 우리도 꽤 해볼 만한 게임이 될 것이다.
“흠, 꽤 기분 나쁘게 생긴 녀석들이군.”
천사들이 빛이라면 발록은 어둠의 끝에 다달은 존재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들겠지.
아마도 저 천사들과 녀석의 상성 자체가 완전히 극과 극이 아닐까.
그런데 의외로 발록은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거나 하지는 않아 보였다.
생각 외인데?
“감상이 그걸로 끝이야?”
“더 뭔가가 필요하나?”
“아니, 넌 마계에서 난 녀석이고 저 녀석들은 천사잖아?”
내 말에 발록이 잠시 눈을 찡그리더니 녀석들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기분 나쁜 것을 본다는 듯.
“반반 섞였어.”
“뭐?”
“저 녀석들이 그렇게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고. 그리고 굳이 너희 식대로 구분을 하자면…….”
발록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녀석들은 마계의 존재다.”
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어이없다는 눈으로 발록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것들 천사잖아?
그런데 마계의 존재라고?
재중이 형을 쳐다보자 재중이 형이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른다니까.”
“정말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네요.”
그리고 발록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
반반이라고 했던가?
흐음.
이게 과연 어떻게 적용될지는…….
그렇게 녀석들이 계속 생성되어 밀려나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생성이 멈춰서 우리의 주변을 포위한 채 서 있기만 했다.
잘 훈련된 압도적인 위압감의 군대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숫자는 대략 일백.
녀석들의 스펙이 나와 재중이 형의 스펙을 상회한다고 치면 정말 압도적인 전력차였다.
“일단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 보죠.”
“그래. 나도 제대로 해야겠다.”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시뻘건 기운이 넘실거리는 창을 꺼내놓았다.
그동안 아껴놓은 녀석이기도 하고.
발록을 잡고 나온 아이템인데 정작 옆에 있는 발록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니 좀 웃기긴 하지만.
후.
나도 제대로 해야겠네.
어차피 보는 이도 없는 마당에 전력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를 동시에 꺼내서 양손에 쥐었다.
발록은 딱히 무기를 쓰지 않는지 두 주먹이 전부였고.
뭐 그 주먹이 어지간한 무기보다는 강할 테니.
“그럼, 간다.”
먼저 발록이 정면으로 튀어나가 학살의 천사 근위병과 부딪혔다.
화염이 넘쳐나는 강력한 펀치 한 방.
콰아앙!
단순한 일격인데 불구하고 천사 근위병의 하얀 라지 쉴드를 구겨 버리면서 방패와 함께 녀석을 통째로 날려냈다.
거기다 얼마나 강력한지 뒤에 있던 세 마리의 천사가 동시에 밀려났다.
물론 그 뒤에 받치고 있는 녀석들이 더 있어서 곧 멈췄지만.
“호오, 이것들 봐라.”
발록은 연신 팔을 휘두르면서 천사 근위병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천사 근위병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새하얀 기운이 섞인 무기들을 휘두르면서 발록을 견제해 나갔고.
발록의 성질은 암흑과 불.
그리고 천사들은 반대 성질.
그러다 보니 발록이 공격을 할 때마다 녀석들의 하얀 기운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특히 공격을 맞은 부분은 금방이라도 빛을 잃어버릴 것처럼 사그라들었고.
하지만 녀석들이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발록도 들어오는 공격들을 아주 안 맞을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화염이 하얀 기운에 잘려나가듯 끊기는 것이 보였다.
역시 상성상 안 맞는 건가.
반대로 발록의 어둠의 불길이 녀석들에게 잘 통하는 것도 있겠지만.
쪽수가 문제네.
그런데 그때.
녀석들에게서 전혀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형, 저건……!”
“어, 나도 봤다.”
“갑옷이 변하네요.”
갑자기 천사 근위병의 몸으로 검은 기운들이 뿜어져 나오더니 새하얀 갑옷이 검은 기운에 물들 듯이 번져나가 하얀 기운과 섞이기 시작했다.
하얀 우유에 검은 잉크를 섞은 느낌이랄까.
물론 완전히 섞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발현되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고는 그때부터 발록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둔해져 갔다.
정확하게는 이전처럼 발록의 힘이 녀석들의 하얀빛을 깎아 버리는 것이 줄어들었다고 해야 하나?
“설마, 어둠의 기운을 올려서 상성을 맞춘 건가요?”
“그럴지도.”
1:1의 상태에서 보면 발록의 어둠의 공격력이 천사들의 빛의 방어력을 훨신 상회했다.
그러다 보니 천사들의 피해가 극심하게 불어났다.
발록 혼자만 나서서 밀어붙이는데도 녀석들이 뒤로 쭉 밀려날 정도라.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녀석들이 발록의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연환 공격을 해댔다.
발록의 공격에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듯이.
반반이 섞였다는 게 저런 의미였나.
빛의 힘.
암흑의 힘.
그걸 동시에 쓰는 녀석들이라니.
아니.
정확하게는 방어를 할 때는 암흑의 힘으로.
그리고 공격을 할 때는 빛의 힘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걸 동시에 쓰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두 힘을 수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득이었다.
당장 저 발록만 해도 천사 근위병들에게 묶여서 힘을 못 내고 있지 않나.
“곤란하네요.”
솔직히 발록이 천사 정도는 씹어먹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저 반푼이 천사들의 능력이 꽤 까다로웠다.
그때 발록이 짜증이 난 듯 크게 발을 굴렸다.
“꺼져라!! 반쪽짜리들아!!”
【 플레어 버스터! 】
곧장 발록 주변으로 대기가 타오를 정도의 엄청난 검은 화염 기둥이 몰아치면서 발록을 포위하던 천사 근위병들을 동시에 녹여 버렸다.
상성이고 뭐고.
스킬의 힘으로 찍어 눌러버리는 압도적인 강함.
“휘유. 강력한데? 챠밍이 쓰는 최상위 화염 마법보다 몇 배는 강하겠어.”
아마도 저게 발록의 최종 광역기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위력은 낼 수가 없었다.
“적으로 상대했으면 정말 피곤했겠네요.”
“최소 몰살이지.”
저 천사 근위병들도 방어와 체력이 보통이 아닐 텐데 한 방에 녹이다니.
이미 저 자체로 재앙과 같은 스킬이었다.
“전에 잡을 때 안 나왔어요?”
“스킬북? 이건 없었지.”
“그럼 오버된 상태에서만 쓰나 보네요.”
후.
괜히 가지고 싶은데?
저 정도 스킬이라면 트리플 템페스트는 그냥 씹어 먹는다.
아님, 앱소브 아머를 미친 듯이 압축시켰을 때나 저런 위력이 나오려나?
혹은 칠성격을 최대치로 모은다거나.
그런데 저건 광역기다.
광역기가 저런 위력을 낸다는 것 자체가 사기지.
덕분에 순간적으로 천사 근위병들의 자리가 횡하게 비어 우리가 움직일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대로 튀어요?”
“흐음, 발록이 이 정도로 활약해 준다면 또 모르겠는데?”
당장 나와 재중이 형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발록 혼자서 녀석들을 충분히 밀어내고 있었다.
뭐 사실…….
우리보다 발록이 당장은 강한 게 맞으니까.
그리고 이런 경우를 생각해서 발록을 데려온 것도 맞았다.
부족한 무력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지금은 발록이 그 역할을 아주 잘해 주는 중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특히 발록은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호의적인 상황에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다 얻어내야 해.
“최대한 발록을 써 보죠.”
“큭, 녀석이 좋아하진 않을걸.”
발록을 대놓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발록의 힘은 그만큼 유용했다.
그런데 그때.
죽어 나갔던 천사 근위병들만큼 또 다른 녀석들이 하얀 결계에서 소환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중이 형도 방금의 재소환은 의외였는지 바로 눈썹을 찡그렸다.
“이거 참. 계속 소환되는 건가?”
발록 역시도 인상을 확 쓰는 것이 저걸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당장은 발록이 강하니까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숫자가 다시 채워진 천사병들이 일제히 발록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특히 천사 마법병과 궁위병의 후방지원은 아군 근위병을 고려하지도 않는 듯 강공 위주로 광역기를 때려부었고.
처음 보는 형태의 빛이 터지는 광역기들은 그 자체로 발록에게 크게 피해를 입혔다.
아무리 발록이라도 저런 식의 공격을 계속 맞는 것은 한계가 있어.
마치 레이드를 하듯 탱과 원거리 딜이 다 짜맞춰진 형태라.
거기다 이 녀석들이 빛의 몬스터들이다보니 하나같이 스스로 힐까지 해대고 있었다.
“이건 이 녀석들을 다 잡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겠네. 어차피 잡아 봐야 다시 소환되니.”
적어도 저 하얀 결계가 온전히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발록이라 하더라도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발록에게 공격이 집중되고 있다고 하지만.
만약 발록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결국 원인이 되는 걸 해결해야 해.
아니면 답도 없다.
“형, 저 하얀 결계. 어떻게든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