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5화 대천사의 무덤 (13)
생각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사실이 끝까지 걸렸기에.
그 하나가 내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내 대답은 거절이다.”
내 대답을 들은 대천사 루스의 표정은 좀 전까지만 해도 화사하게 웃고 있던 것과 달리 한순간에 눈에 뛸 정도로 확 일그러졌다.
《 유저 주호 님의 거절로 인해 긴급 마계 파멸 퀘스트가 취소됩니다. 》
“뭐?”
설마 내가 거절할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나?
하긴.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천사의 직위를 준다고 하는데 거절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대천사 루스가 확신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고.
보통의 유저들이라면 지금의 제안을 어지간하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난 아니었다.
“못 들었나? 거절이라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거절을 말하자 이번엔 대천사 루스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것도 꽤나 무서운 눈을 하고서.
그동안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있을 때와는 완전 천지 차이인데?
마치 지금까지의 모습은 위장이었다는 듯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곧 대천사 루스가 내려간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 넘기면서 내게 물었다.
완전히 눈빛 자체가 달라졌어.
이전의 녀석이 순한 맛이었다면.
지금은 누가 봐도 매운 맛이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하, 어째서 거절이지?”
그런 대천사 루스의 뜨거운 시선을 받아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글쎄. 난 공짜로 뭐 준다는 놈은 안 믿어서.”
“뭐라고?”
내 대답이 하도 어이가 없는지 대천사 루스가 되묻기까지 했다.
뭐 반은 진심이 섞인 말이지만.
저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금속의 정령이 한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
녀석이 진짜 마신급에 준하는 악마라면?
그리고 걸리는 것 또 하나.
정말 그렇게 강력한 녀석이라면.
어째서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이미 본신의 힘으로 해결을 해버릴 수 있는 퀘스트였다.
완료될 확률이 아주 높은 퀘스트에 유저를 굳이 끼어 넣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들은 녀석의 제안 속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녀석은 내가 협력하기를 바라고.
다른 내용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저 퀘스트의 핵심은 제목과 다르게.
내가 관여한다는 점이 중요 포인트가 된다.
어차피 내가 있든 없든.
완료가 되는 퀘스트라면 말이지.
그럼…….
왜 나지?
물론 내가 이 대천사의 무덤 결계로 들어온 것은 명백한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 다른 유저는 들어오지 못 했으니까.
유일한 유저인 내게 제안을 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아.
거기다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를 들고 있는 난 그 조건에 꽤 부합하는 모양이었고.
문제는.
대천사의 전력상 난 거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심부름을 시키자고 퀘스트를 하라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는 말은.
결국 무력이 아닌.
뭔가의 쓸모가 있기 때문에 굳이 저 녀석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내게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과연 무엇일까?
계속 머리를 굴려 봤는데 결국 답은 하나였다.
녀석이 정령신을 계속 언급했다는 것.
그리고 그와 관련된 르아 카르테.
이 두 가지를 연결해 보면…….
답은 하나로 이어진다.
바로 이곳을 봉인한 정령왕들과의 관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이 내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와 관련된 일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리고 그건.
내가 녀석의 퀘스트를 수락했을 경우에 뭔가의 작용을 할 수 있다는 뜻도 되었고.
아마도 꽤 높은 확률로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이게 아니라면 대천사 루스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어.
막말로 대천사 루스에게 난 너무 죽이기 쉬운 존재일 것이다.
장비나 레벨 차이를 생각해 보면 그건 더 명확했고.
그런데도 대천사 루스가 아직 차가운 눈빛을 보내올 뿐.
특별히 날 죽인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내용들이 내 입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너, 나 못 죽이지?”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 이곳의 주인인 대천사 루스는 날 못 죽인다. 맞나?”
그렇게 면전에 대놓고 확실히 물어보자 대천사 루스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거기다 방금 저 반응으로 내 생각이 더 확고해졌고.
이건 빙고군.
확실하지 않아 반쯤은 떠본 것인데 대천사 루스는 정말 날 죽이지 못하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여차하면 워프로 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가 보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천사 루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순간.
녀석의 눈이 금색이었다가 아주 잠깐 검은색으로 변한 것이 눈에 스치듯 지나갔다.
뭐지?
방금 잘못 본 건가?
정말 스치듯 잠시 보였던 거라 오히려 음영이 졌나 싶을 정도였다.
“다시 한 번 묻지.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아.”
그리고 지금의 저 말.
대천사 로스의 저 한 마디가 날 더욱 확신에 차게 만들었다.
한 번 차였는데 구질구질할 정도로 매달리는 느낌이랄까?
굳이 내게 다시 제안을 할 만큼.
녀석에게는 이 제안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는 그럼 제안인가.
대천사 루스에게 이 정도까지 절실한 무언가가 있나?
그리고 그 순간.
이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내었다.
이건 가정일 뿐이긴 한데…….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어.
만약 아니라고 해도…….
녀석의 의도를 파악하기에 나쁜 질문은 아닐 것이다.
“너, 봉인 때문이지?”
그 질문에 순간 대천사 루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너무 순식간이라 녀석은 숨기려 했지만 확실히 봤어.
그리고 다른 것들을 다 빼고 오직 봉인이라는 말만 집어넣었다.
뭔가 반응을 보여 줘야 할 텐데.
“바보는 아니군.”
결국 녀석의 대답은 내 질문을 더 확실하게 증명할 뿐이었다.
내가 봉인과 관련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걸 저 녀석이 그대로 내버려 두냐의 문제가 남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녀석은 내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르아 카르테는 한 자루뿐이니까.
그리고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르아 카르테를 내가 쥐고 있는 이상.
패는 내게 넘어와 있어.
여차하면 그냥 부러뜨린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도 될 지도?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대천사 루스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바로 감각을 퍼트렸지만 녀석은 아예 감지가 되지 않았다.
설마 완전히 사라진 건가?
거기다 마치 처음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환경이 다시 하얀 허공으로 변경되었다.
혹시나 녀석이 어디선가 나타날까 싶어서 경계를 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그렇게 제일 무서운 녀석이 바람처럼 사라지자 안도가 되었다.
이젠 여기를 나가는 방법이 문제려나?
날 불러오기만 하고 정작 녀석은 사라지는 바람에 졸지에 이곳에 갇혀 버렸다.
어떻게 나가지?
가만히 서서 사방을 둘러봤는데 어딜 봐도 그냥 하얀색만 보였다.
단순히 쳐다만 봐서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르아 카르테가 웅웅 떨면서 금속의 정령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어?
이곳에서 불러지는 거였나?
아니지.
대천사 루스가 있어서 못 나온 거였을지도.
금속의 정령이 나오자마자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쌍심지를 켠 상태로 내게 말했다.
“말을 안 듣더니! 진짜!”
“아,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
금속의 정령 덕분에 거절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이었다.
“칫, 그렇게 말해도 안 알려 줄 거야.”
“응? 뭘?”
“여길 나가야지.”
안 알려 준다고 하고 바로 알려 주는 건 뭘까.
“나갈 수 있어?”
“응, 눈을 감아.”
이걸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눈을 감았다가 뜨자 정말 놀랍게도.
이곳은 아까 내가 첫발을 내디딘 경계의 바깥 부분이었다.
재중이 형도 깜짝 놀라서 내게 달려왔고.
“살아 있냐?”
“보다시피 아직은 안 죽었죠.”
“갑자기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러자 바로 재중이 형에게 아까 전에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대천사 루스라던가…….
“대천사인가?”
“네,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대천사하고는 좀 거리가 먼 녀석 같은데.
“아마 봉인 때문에 절 끌어들인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봉인 때문이면…… 풀어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는 눈에 선하네.”
“네, 꽤 위험했죠.”
“정령들이 괜히 녀석을 봉인해 둔 게 아닐 거다.”
재중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슨 방법이든 아직 봉인이 풀어져서는 곤란해.
그때 갑자기 우리가 서 있던 제단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궁!!
뭐지?
이 흔들림은?
그것도 하얀 결계 안쪽에서 일어난 흔들림이라니…….
“형, 설마……?”
“아닐 거다. 아직 정령왕들의 봉인은 이상 없어.”
재중이 형 말대로 결계 자체는 아무런 붕괴 없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럼 이건 대체 뭘까?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발록도 눈을 치켜세우고 하얀 결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온다.”
발록의 신호처럼 나 역시 감각으로 살폈지에 뭔가가 하얀 결계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에 있던 건…….
한 놈뿐인데.
정말 대천사 루스인가?
설마 내가 봉인을 풀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풀 방법이 있나?
그러면 지금의 위치는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여길 떠야 할 것 같아요.”
“잠깐.”
내 말에 재중이 형이 하얀 결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녀석의 공격을 급하게 창을 휘둘러 쳐내었다.
카아앙!!
그런데 하얀 결계로 나온 것은 대천사 루스가 아닌 전혀 다른 개체들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전의 대천사와는 달리 얼굴이 하얀 가면에 가려져 있는 또 다른 천사들의 모습에 의아하게 바라보았고.
흐음.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해도 다른 것들은 빠져나온다는 건가?
아래에서부터 위쪽까지 백색의 일체형 갑옷을 입고 있는 천사들이라…….
그리고 그들의 시뻘건 네임은 우리를 긴장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학살의 천사 근위병.
학살의 천사 마법병.
학살의 천사 궁위병.
.
.
추정 최소 레벨은…….
솔직히 얼만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껏 아무도 손대지 못한 결계 안쪽에서 나온 녀석들이다 보니 레벨은 생각 이상이겠지.
당연히 저들 하나하나가 괴물 같은 녀석들일 건 안 봐도 뻔하겠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벌써 수십이 동시에 바깥으로 나왔다.
단순히 이 정도만 나오면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지금도 계속 그 숫자가 불어나는 중이었다.
내 거절을 이런 식으로 복수하려 하다니.
생각보다 꽤 질척거리는 놈이었네.
곧장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를 들어 올려서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후.
이제 본 게임이라 이거냐?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