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화 대천사의 무덤 (15)
천사병들을 잡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한정된 자원인데 반해.
지금껏 확인한 바에 의하면 녀석들은 끝없이 소환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중간에 소환을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소모전을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아직 여력이 남아 있을 때.
확실히 문제가 되는 걸 끊어내야 해.
“형이 좀 도와줘요.”
“어떻게?”
“아무래도 저 하얀 결계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흠, 다시 들어간다고?”
사방은 아직 천사병들이 포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방은 발록이 막아 주고 있지만.
퇴로는 없다고 봐야지.
여기서 나와 재중이 형이 천사병 몇을 상대한다고 한들.
당장 크게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될 확률이 다분했고.
결국 답은 하나다.
천사병들의 소환 매개체인 저 하얀 결계.
저걸 해결해야 해.
“네, 지금은 그 방법밖엔 없어요.”
“안에 미친놈 하나 있다며?”
대천사 루스.
녀석이 버젓이 존재하는 장소.
사실 이젠 대천사인지도 모르겠고.
아랫 녀석들이 저렇게 어둠의 힘을 막 가져다 쓰는 판국에.
녀석이 정상적인 대천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쫄따구가 쓰는 힘을 대천사가 안 쓴다고 보는 게 더 어렵지 않나?
그건 이미 천사라고 보긴 어렵지.
그리고 왜 마계에 대천사의 무덤이 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네, 그러니까. 그 미친놈을 상대하려고요.”
“흐음, 그래서 방법은 있고?”
“없으면 들어갈 생각도 안 했죠.”
그리고 재중이 형에게 내가 생각한 방법을 미리 말해 주었다.
내 설명을 모두 들은 재중이 형은 정말 미친놈을 본다는 듯 크게 웃어 버렸다.
“와,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칭찬이죠?”
“어, 그게 통하면 칭찬이지.”
“안 통하면요?”
“그냥 미친놈.”
“평가가 영 박하네요.”
곧 웃음을 멈춘 재중이 형이 날 진지하게 보면서 말했다.
“이거 안 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그 새끼 완전 또라이라면서?”
“네, 그러니까 같이 가는 거죠.”
“하아, 내가 어쩌다 몸빵을 해야 하는지.”
“할 거죠?”
“그래, 못 먹어도 고다.”
내 미친 짓에 어울려 주기로 했는지 재중이 형이 흔쾌히 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런 짓은 같이 해야 제 맛이지.
곧장 금속의 정령도 불러냈다.
“좀 도와줘야겠어.”
그런데 금속의 정령은 이미 나와 재중이 형의 대화를 들었는지 곧바로 한마디 했다.
그것도 꽤 직선적으로.
“완전 미쳤어.”
“응. 그래. 그런 소리 요즘 많이 들어.”
“하아, 난 왜 매번 이런 애들만…….”
“뭐? 안 들리는데?”
“아니, 너 진짜 미쳤다고.”
그러면서 금속의 정령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방법이 없나 봐.”
“그래서 네가 좀 도와줘야 해.”
아까 저 하얀 결계는 분명 금속의 정령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다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고.
아마 하얀 결계라는 게 정령이 만든 결계라서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정작 발록의 최상급 화염 정령은 이런 일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각 정령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좀 많이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이것만 보면 금속의 정령이 오히려 더 상위일 수도 있으려나.
“안 되는데…….”
금속의 정령이 할 수 있음에도 머뭇거리자 결국 나 역시 패를 꺼내놓았다.
“대천사의 무구. 이번에 얻으면 먹여 줄게.”
그 말에 금속의 정령이 화들짝 놀라더니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아주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날 보면서.
“정말?”
“응,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어?”
“맨날 하잖아.”
“……흠흠. 이번엔 아니고.”
완전한 대천사의 무구를 준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복사를 해서 준다고 해도 충분할 터.
진품을 줘 버리는 건 애초에 무리지.
“약속했다?”
“그래. 그러니까 들어갈 수 있어?”
“응, 정령의 결계니까.”
역시 가능하네.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잘못됐을 경우는…….”
“네, 형이 나서 주세요.”
“뭐 최소한 시간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대천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은 재중이 형이 막아 주는 걸로 하고 셋이 하얀 결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전에 발록이 힘을 좀 써줘야겠지만.
“발록, 잠시만 뒤로 빠져 봐.”
“바쁘다. 안 보이냐?”
“아는데, 하루 종일 이 녀석들하고 푸닥거리하고 있을 건 아니잖아.”
내 말에 발록의 시선이 곧 주변으로 돌아갔다.
죽여도, 죽여도 새로 나오는 쫄따구 천사들의 진형으로.
곧 인상을 쓴 발록이 꼬리를 크게 휘둘러 천사 근위병들을 모조리 쳐낸 뒤 후방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발록을 공격하던 녀석들도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멀어지자 바로 공격을 멈추는구나.
딱히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위를 풀어 줄 생각은 없는.
마치 다시 하얀 결계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듯한 녀석들의 움직임에 혀를 찼다.
“예상대로죠?”
“어, 정확하네.”
대천사 루스.
이 녀석은 분명히 내게 바라는 게 있었다.
정령의 검.
르아 카르테.
그렇다고 이걸 뺏기 위해 날 죽일 수 있냐고 하면?
만약 내가 죽는다면 르아 카르테는 증발해 버린다.
그럼 녀석의 이 수고로움도 물거품이 된다는 거겠지.
그래서 지금 녀석은 시위를 하는 거다.
저 계속 쏟아지는 천사병들을 무기로 협박을 하는 셈이기도 하고.
내가 다시 들어오기를.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를.
물론 난 녀석의 장단에 그대로 놀아나 줄 생각이 없다.
반대로 녀석의 바람을 역으로 엎어 버릴 생각이었다.
녀석은 전혀 생각하지 못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말이지.
“어차피 우리가 하얀 결계로 들어가면 방해도 안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
“그만 싸워도 된다는 말이지.”
내 말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발록이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분 나빠하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상황이 꽤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테니.
네임드인 발록이 위협받을 정도의 상황이니까.
“방법이 있나?”
“어, 있긴 한데. 잘못 됐을 경우 정말 전력을 다해서 뚫어 줘야 해.”
발록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힘을 너무 빼면 안 되지.
“난 안에 가서 대천사의 무구를 가져올 테니까. 바깥을 부탁해.”
발록이 원한 것도 사실 이거다.
대천사의 무구.
우리와 손을 잡고 있는 것도 다 목표가 같으니까.
“흠! 알았다.”
곧장 재중이 형을 바라봤다.
“그럼, 들어가죠.”
그렇게 재중이 형, 금속의 정령과 함께 정면으로 나서는데 천사병들이 오히려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아예 지나가라는 듯 길을 터 주기까지 했다.
“확실하네.”
“네, 아주 애가 타나 보네요.”
너무 노골적이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잖아.
속으로 웃으면서 터진 길을 따라 다시 하얀 결계에 들어섰다.
여길 내 발로 다시 들어가게 되다니.
《 대천사의 무덤 주인이 자격이 있는 당신을 주목합니다! 》
하얀 결계를 넘어오자마자 바로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이 나타났다.
“환영한다.”
“너도 참 성격이 뒤끝 작렬이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부하들 시켜서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 놓고는 뭐가 그렇게 좋다는 듯 싱글벙글하다니.
아마 지금껏 만나본 NPC 중에 이 녀석의 성격이 제일 지랄 맞을 것이다.
왜 대천사라는 놈이 마계에 처박혔는지도 알 것 같기도 하고.
“너희 인간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목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텐데?”
“뭐 아니라고는 안 할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
그리고 나 역시 목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할 생각이다.
어차피 시간을 끌어봐야.
이 녀석 면상만 오래 봐야 하니까.
깔끔하게 본론부터.
“네가 원하는 건 역시 이거겠지? 정령의 검.”
그러면서 르아 카르테를 꺼내서 들어올렸다.
그 순간.
녀석이 눈빛이 확연하게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두고 있는 맹수마냥.
어이구.
눈앞에서 흔들어 주면 정말 침이라도 흘리겠는데?
너무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찍었는지 녀석도 본능적으로 나왔다.
“흠, 그렇다면?”
“뭐…… 내가 가진 것들 중에는 이게 제일 좋은 거라서 말이야. 막말로 넌 다른 사람이 네 심장과 같은 물건을 달라고 하는데 그냥 줄 수 있어?”
지금은 르아 카르테에 눈이 돌아가 있어도 이 녀석은 결코 멍청한 게 아니다.
당연히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고는 곧장 녀석도 딜을 해왔다.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다 들어줄 수 있는 건가?”
“그렇다. 마계를 네게 달라고 하면 줄 수도 있고. 금은보화를 원한다면 그것도 좋다.”
아주 광오하게 두 팔을 벌리며 뭐든지 다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녀석을 보고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좋아.
나쁘지 않아.
슬쩍 재중이 형을 바라보자 재중이 형 역시도 눈짓으로 말했다.
<심연> 녀석이 몸이 확실히 달아 있네.
<윈> 어? 귓말이 되네요?
<심연> 아, 안 되는 거였냐?
<윈> 네, 전에 밖으로는 안 되던데.
<심연> 안에서만은 되는가 보지. 어쨌든 녀석이 예상대로 나와 주잖아?
<윈> 그러네요. 잘하면 먹힐 것 같아요.
<심연> 그래, 어차피 녀석이 저걸 다 들어줄 거라 생각하진 않아. 대부분 나중에 가능한 거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반드시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도 있지.
솔직히 대천사 루스가 말로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더라도 그게 가능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억지로 퀘스트로 묶인다면 또 모를까.
그런데 그런 퀘스트도 NPC들 기분에 따라 엎어지는 경우도 허다하고.
당연히 지금 확실히 받아 낼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마계나 금은보화는 됐고.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는데 말이야.”
“그게 뭐냐?”
“너도 생각을 해봐. 난 이 르아 카르테가 없으면 사냥도 못 한다고. 그럼 최소한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받았으면 한단 말이야. 이왕이면 비슷한 등급의 무기였으면 좋겠는데?”
일단 딜을 걸었다.
이제 녀석이 어떻게 나오는가가 문제인데…….
만약 대천사 루스가 이 딜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거부를 할 것이다.
반면에.
들어줄 만한 것이라 판단한다면?
“흐음, 내가 생각이 짧았군. 인간들은 그런 게 필요했었지. 그럼 좋다. 정령의 검에 준하는 천계 최고의 무기를 내어 주도록 하지. 어떤가?”
녀석이 의외로 한 번에 딜을 해오자 손을 불끈 쥐었다.
말하면 뭐해?
당연히 고지.
그렇다고 바로 넘어가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믿지?”
내 말에 대천사 루스가 잠시 사라지더니 얼마 지니자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새하얀 무기를 쥐고서.
천사의 날개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길게 뻗은 순백의 검신은 그 모습 자체로도 하나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흔들리기만 해도 사방으로 빛이 일렁거리는 검신이란…….
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저건 너무 완벽한 느낌이 들었다.
저게 진짜 대천사의 검인가?
일단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이 동네가 너무 사기가 많아서 말이지.
녀석이 작정하고 속이려면 속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우리에게는 최고의 무기 감별사가 존재했다.
금속의 정령.
이 녀석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가짜 무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때? 확실해?”
내 물음에 금속의 정령이 이미 넋이 나가서 침을 흘렸다.
“맛있겠다아…….”
“확실하네.”
진품을 가릴 최고의 조언자가 확인해 주는 순간.
녀석과의 거래를 위해 르아 카르테를 올려놓았다.
“좋아. 그럼, 거래를 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