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0화 지저 세계 (6)
이전에 교황을 잡으면서 오른 레벨이 다섯 개.
원래 교황의 탈을 쓴 마왕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경험치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떠올려 보면 그때도 운이 엄청나게 좋은 것이었다.
사실 마왕급인 아스티아가 아니었다면 마왕은커녕 마왕 부하 하나 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공격하기 전 이미 교황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 놨으니까 망정이지.
아스티아가 다 만들어 놓은 요리에 숟가락만 가볍게 올린 셈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마왕을 상대하기에는 지금의 레벨과 장비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마왕을 상대하기에도 힘들 텐데, 완전히 힘을 쓸 수 있다면?
만약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아마 신성 제국에 마왕이라는 녀석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봐서는 관련된 컨텐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만간 다른 마왕 역시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떨어진 마계로 갈 수 있는 아이템.
그다음에 내가 생각했던 사실을 확인하는 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꽤 먼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마왕과의 조우.
아이디가 새빨갛다 못해 시커멓게 보이는 스컬 드래곤을 타고 다니면서 사방으로 폭뢰를 뿌리는 마왕을 보자 이런 생각은 더 강하게 변했다.
지금 상태로는 안 돼.
아스티아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처럼 언제 사라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단은 내 힘을 키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마왕의 영혼 파편은 정말 최고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녀석들이 마왕만큼은 아니지만 빠른 시간 내에 레벨을 올리기에는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마계 미노타우르스로 변한 상태에선 이 녀석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니.
원하는 부위에 최적의 대미지를 넣을 수 있을 터.
첫 타를 인식 못 한다면 이쪽에서 은신을 한 상태로 다가가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
하지만 상태창을 살펴보고는 바로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그리고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내 옆에 아스티아가 다가와 말했다.
“별로지?”
“흐음, 확실히 좀 그렇네요.”
마계 미노타우르스만 놓고 보면 충분히 강해.
하지만 이 변신 상태는 생각보다 그렇게 유용하지는 않아 보였다.
“마왕이 유희를 즐기려고 만든 거니까.”
“똑같이 변한다고 그 녀석만큼 강해지는 건 아닌가 보네요.”
이건 예전의 데스나이트 때 생각한 거지만.
완전한 네임드인 데스나이트와 똑같은 수준으로 변하지는 않았었다.
충분히 열화된 상태로 변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
아마 원본의 마계 미노타우르스보다는 꽤 약화된 상태일 것이다.
1:1로 붙는다면 스펙상 이쪽이 밀리는 그림이 나올지도.
물론 이 변신을 한 채로 다른 하위의 몬스터들을 잡는다면 꽤 선전하겠지만.
이를 테면 다시 신성 제국으로 돌아간다던가.
다행이 무기는 미노타우르스가 들고 있던 무기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걸로 스위칭이 되었다.
이것도 안 되면 어쩌나 했네.
거의 대부분을 장검만 써왔기에 지금 와서 다른 계열의 무기를 쓰기에는 역시 좀 어색한 면이 있었다.
아쉽다는 느낌으로 잠시 마계 미노타우르스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스티아가 손으로 내 허리를 툭툭 쳤다.
마치 뭔가를 신호하듯.
“지금은 한가하게 사냥하고 있을 때는 아니라서.”
아스티아의 내려앉은 눈빛을 보는 순간.
나 역시 빠르게 감각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일단 지상은 아니야.
바닥으로 전해오는 파동들에 내가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거대한 뭔가가 다가오고 있진 않았다.
그럼 역시 공중……이려나?
아무래도 공중은 탐지하려는 공간이 넓어서 조금 시간이 걸렸는데 그것보다 빠르게 뭔가 특이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건.
한 번 들어봤던 파장이기에 이번에는 더욱 빠르게 눈치를 챘다.
“……마왕.”
“응, 마왕이야.”
좀 전에 사라졌던 그 마왕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모양인데…….
곧장 고개를 돌려 아스티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싸울 건가요?”
아스티아가 불안전한 마왕을 두들겨 패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그렇다고 완전한 마왕과 그렇게 싸울 수 있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다.
아스티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후퇴. 지금 싸우면 네가 죽어.”
“저 말인가요.”
“응, 지금은 무기가 없어서 말이야.”
마치 무기가 있으면 이긴다는 뜻으로 들리기는 하네.
으음.
어쩌면 당연한 건가.
당장 나 역시 무기를 두고 주먹으로 싸우라고 하면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없을 테니까.
앞서 맨손으로 교황을 두들겨 팬 아스티아가 대단하다고 봐야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적에게 숨는 방법이라면 다양하다.
일단 아직 적대 상태가 아니니 접속을 해제해도 되는 일이고.
그럼 아스티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우려와 다르게 아스티아는 그다지 걱정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잠시 내게 붙어 봐.”
바로 아스티아에게 붙자 아스티아의 입에서 뭔가의 주문 소리가 들려오면서 주변으로 마법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흐음.
이건…… 결계 같은 거려나?
딱 나와 아스티아만이 바깥과 격리된 듯한 공간이 형성되고 얼마 뒤, 다시 구름 사이로 예의 그 스컬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에, 쟤가 아직도 살아 있네.”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갑자기 내려치는 폭뢰로 주변이 환하게 터져나갔다.
【 아케인 썬더! 】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르르 몰려다니던 마계 미노타우르스들을 싹 녹여 버린 마왕은 유유히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강하네.
그때 거의 필살기라 생각되었던 광역 스킬을 이렇게 빠르게 다시 사용한 걸로 봐서는 아마 필살기 수준에도 못 미친 모양이었다.
물론 아스티아의 결계 안에 있어서 그런지 전처럼 막는다고 개고생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떨어진 낙뢰들이 결계에 닿을 때는 눈 녹듯이 사라졌으니.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난 뒤에 아스티아에게 물었다.
“누군지 아는 것 같네요.”
그러자 아스티아가 날 보면서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흐음, 넌 진짜 운이 좋은 것 같아.”
무슨 말이지?
운이 좋다니?
마계로 넘어오자마자 마왕을 만난 게 운이 좋다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여기서 도와주고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네.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스티아가 마치 수수께끼 내듯 하나씩 말해 주는데 그걸 하나로 연결하자 그럴듯한 그림이 나왔다.
확률상 이게 맞으려나?
“안다는 게 마치 저 마왕과 친하다는 말로 들리네요.”
“응, 친해. 저 스컬 드래곤, 내가 줬거든.”
“……네?”
조금은 황당한 표정으로 아스티아를 바라봤다.
스킬 드래곤을 줬다고?
마치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한 마리 줬다는 것 같은 편안한 말투에 살짝 진이 빠져 버렸다.
대체 집 앞에서 저런 녀석들을 키우기라도 했나?
잠시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펴보던 아스티아가 내게 말했다.
“다른 계열의 적들이 계속 넘어오는 걸 봐서는 여긴 마왕의 권역 끝쯤 될 거야. 그래도 이렇게 자주 나오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이상하네……?”
“문제가 있는 건가요?”
“응. 마왕이 직접 이렇게 권역 끝까지 나오는 경우는 잘 없어. 보통 이 정도는 아래에 있는 마족들이 알아서 처리하니까.”
확실히 듣고 보니 이상했다.
아스티아의 말대로라면 저 마왕이라는 놈은 여기까지 나올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계속 날아온다라…….
이건 뭔가 지휘 계통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거나.
마계라니까 다른 곳에서 전쟁이 난 경우도 있을 것 같으니.
아냐, 이건 너무 앞서나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아스티아가 내게 말했다.
“딱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면서 아스티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보았다.
응?
마치 보란 듯이 자신에게 손가락을 표시하자 하고 있던 생각들이 모두 멈췄다.
만약 아스티아를 예로 든 거면.
저건…….
확실히 한 가지밖에 없겠네.
“휘하에 부하가 없다?”
“헤에, 역시 머리가 좋아.”
“음, 그럼 혹시 아스티아처럼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한다던지……?”
“나? 혼자가 아닌데?”
그러면서 아스티아가 이번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있잖아.”
“하하…….”
일단 명색이 내가 부하쯤은 되는 건가?
그리고 그런 아스티아의 말들에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아스티아가 뭔가를 줄 정도로 친하고,
마왕인데 강한 편.
가장 핵심은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마족이나 부하들이 없다라…….
원래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굳이 마왕이 돌아다녀야 하는 거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뜻이다.
강한 마왕도 어쩔 수 없는.
“꽤 상황이 재밌네요.”
어쩌면 이곳에서 레벨업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고.
거기다 당장 우리가 처한 이 떠돌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아스티아가 아까 권역이라는 말을 썼었다.
그렇다는 말은 마왕 역시도 자신의 영지와 비슷한 개념의 영토가 있다는 뜻일 테고.
만약 마왕의 세력과 관련된 어떤 연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지금 직접 마왕이 나와서 처리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어설프게 마계를 돌아다니느니.
이쪽이 훨씬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아스티아가 꼭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없었다면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아스티아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혹시 그 마왕과 아직도 연락할 수 있을까요?”
“다리를 놓아 달라는 거지? 그냥 연락 정도가 아니라.”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아스티아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곧장 아스티아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아마 저쪽이 원하는 바를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전에 무조건 확인해야 할 게 있지.
지금 생각하는 이것들이 정말 견적이 나오는가부터.
그사이 아스티아가 먼저 앞에 나섰다.
아까 딱 스컬 드래곤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혹시 모르니까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네, 그러죠.”
지금 마계 미노타우르스로 변신해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몬스터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니.
괜히 나섰다가 어이없이 죽는 건 사양이었다.
“그럼 간다.”
곧장 아스티아가 달리는 방향으로 같이 달리자 주변의 풍경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흐음.
주변이 전부 돌산인가?
개중에 조금 수풀이라고 할 만한 곳이 가끔 보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돌들의 무덤 같은 삭막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투를 하기에는 나쁘진 않겠지만.
뭔가가 살아남는데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니지.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파괴된 듯한 마을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인가요?”
“마족이라고 살 곳이 없는 건 아니거든?”
별것 아니라는 아스티아의 말에 잠시 고민하면서 전체의 규모를 떠올렸다.
중앙 지역을 향해 가고 있다면 반대편에도 비슷한 규모의 대지가 있을 테고…….
어쩌면 생각보다 꽤 클지도.
그런데 이런 넓은 지역을 혼자서 커버하고 있다는 건가?
“왜?”
“새삼 스컬 드래곤이 얼마나 빠르게 돌아다니는지 놀라는 중이에요.”
이 정도 거리라면 그런 이동수단이 있으니 가능하겠지.
그렇게 달리다 보니 주변보다 높게 솟아 있는 고풍스런 고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장벽에 새까만 마법진을 잔뜩 두르고 있는.
꽤 격렬한 몇 번의 전투가 있었는지 주변에는 몬스터들의 시체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사방을 둘러친 저 많은 시체들 사이에 오롯이 혼자 서 있는 성의 모습이란.
누가 봐도 성을 방어하면서 주변에 시체를 잔뜩 찍어 낸 그런 상황으로 보였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