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미로 던전 (4)
용혈을 흡수해?
드래곤 슬레이어에 이런 기능도 있었나?
유일 아이템에 이상한 기능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대뜸 튀어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드래곤 슬레이어를 처음 발견한 장소도 용혈이었지.
혹시 그 자리에서 용혈을 계속 흡수하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신으로 계속 용혈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주 힘차게.
그러자 미로 바닥으로 무섭게 넘쳐흐르던 용혈이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설마…….
이걸 다 빨아들이려는?
이런 변화는 나뿐만 아니라 미로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유저들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어어?!”
“용암이 줄어든다?”
“점점 낮아지잖아?!”
“뭐야? 주호가 함정을 해제한 건가?”
“오! 역시 주호!”
“최고다!”
“나도 저 새끼가 해낼 줄 알았어!”
“너 아까 미친놈이라면서?”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미친놈이 우릴 살렸네.”
“오오, 이제 건너갈 수 있는 거야?”
“살았다, 진짜.”
“뒤에 용암 조심하고. 계속 무너져.”
“조금만 더 있었으면 우리 다 죽었을 거야.”
“꺅! 주호 오빠 사랑해요!”
“난 넘어가면 뽀뽀해 줄 거야!”
“누구 마음대로?!”
“주호 오빠 건들지 마!”
이런.
반응이 좀 과한데?
제발 그러지 않길 바라며, 계속 용혈을 바라보자 어느 순간부터 곳곳에선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쯤 하면 된 건가?
그리고 그 순간.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환한 빛이 나오면서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드래곤 슬레이어가 암흑혈에 오염된 용혈을 한계까지 흡수했습니다. 진화 대기 시간까지 7일이 남았습니다. 》
진화?
이건 생각 밖의 일.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저 용혈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게 아니었나?
그리고 의외의 용어도 나왔다.
암흑혈에 오염된 용혈?
그냥 용혈이 아니야?
아니, 예전의 용혈보다 체력을 훨씬 빨리 갉아먹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나쁘진 않겠지.
진화라는 말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좋아진다는 것을 뜻하니까.
일주일이라는 대기 시간.
르아 카르테를 완성시켰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될 만한 시간이었다.
이쪽은 시간이 해결해 주려나?
그때 추가로 메시지가 더 울렸다.
《 암흑혈에 오염된 용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
《 원정대 포인트 5000p 획득! 》
설마, 모든 비밀에 대해서 점수를 책정해 둔 건가?
비록 아이템은 얻진 못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정보 습득을 했다고 여겨지는 모양이다.
장벽 너머의 비밀을 알아낸 다라…….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내게 나쁘지 않아.
유일 아이템을 죄다 들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넓었다.
시간만 많다면 이 무덤을 싹 돌아다니면서 점수를 얻고 싶지만…….
다만 지금은 그 시간이 부족했다.
분명히 전신과 해원도 다른 방향에서 미로를 파고 들어가고 있을 테니.
그리고 한 번 공략이 된 미로는 포인트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최초이거나 먼저 발견하는 쪽이 유리해.
일단 다른 쪽 미로의 포인트는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용혈을 흡수당한 미로가 휑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 건너가자!”
“용암이 없으니 반대로 움직여도 쉽잖아?!”
“징검다리도 이제 필요 없어!”
처음엔 엉거주춤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던 유저들도 어느새 적응을 했는지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미로 바닥을 건너왔다.
경직된 채 꼼짝도 못 하던 이전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좌우가 반대로 바뀌어도.
앞뒤가 뒤집힌다고 해도.
전혀 죽을 염려가 없으니 유저들의 심리가 빠르게 안정되어 금방 이 함정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 더 빠르게 적응한 황룡이 먼저 미로를 건너와 나를 보고는 내 등을 팡팡 치면서 크게 웃었다.
이 사람도 이렇게 웃을 수 있었나?
“살면서 미친놈을 많이 보긴 했는데, 당신은 그중 최고군요.”
으음, 이거 칭찬 맞지?
맞는 것 같긴 한데…….
바로 뒤에 같이 건너온 엔느도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이 왜 1위를 지키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네요. 이건 머리로 알아도 배짱이 없으면 절대 못 해요. 전후좌우가 바뀌는 함정에서 가속 스킬까지 써서 날아가다니…….”
“그냥 될 것 같으니까 하는 거죠.”
“하, 불멸 님은 어디서 이런 괴물을 찾아내셨담.”
정확하게는 PC방에서 알바하다 만난 사이입니다.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슬쩍 드래곤 슬레이어를 인벤으로 집어넣었다.
엔느는 눈치가 좋아서.
그리고 그때.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드워프 지하 무덤의 미로 중 한 곳을 공략하셨습니다! 》
《 원정대 포인트 1000p 획득! 》
포인트가 생각보다 높아.
예상대로 여길 지나올 수 있는 능력만 보는 장소였나.
주변을 둘러봤을 때 용혈을 제거할 수 있는 기관은 딱히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이 가정이 맞을 것 같았다.
이렇게 지금까지 얻은 포인트 총합은 11500P.
다른 유저들이 뭔가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은 내 쪽의 포인트가 압도적으로 높지 않을까.
이전처럼 포인트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몰아주기도 불가능했다.
최초 발견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방법이라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한 업적을 세워야 하니까.
이쪽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시 후.
미로를 건너온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둘러싸고는 칭찬을 해 대자 오히려 내가 경직되는 느낌을 받았다.
으…….
이건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돼.
그런 내 모습을 엔느와 황룡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면서 지켜봤고.
<주호> 좀 살려 주시죠?
<엔느> 어머? 의외로 숙맥이시네요.
<주호> 이건 제게 익숙지 않은 일이라…….
그러자 엔느가 황룡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 사람들을 주변에서 떨어지자 그녀는 내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한테 하나 빚졌어요?”
“하하, 달아 두시죠.”
이제 장난도 치는 걸 보면 엔느도 꽤 편해진 모양이네.
저 황룡 역시 경계심이 느껴졌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그냥 편하게 옆에 서 있을 정도라.
그런데 갑자기 엔느가 내게 묘한 말을 했다.
“당신 진짜. 사람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어요.”
“저 너무 좋아하지 말…….”
“캬악! 아니라니까!”
그런 우리 둘을 보더니 황룡이 말했다.
“사랑싸움은 나가서 하고.”
그 말에 엔느가 완전히 폭발해 버렸고.
“아이씨! 아니라니까아아아!!”
이쪽도 참…….
그런 둘을 남겨 놓고 챠밍에게 연락을 넣었다.
재중이 형 쪽은 걱정이 안 되지만 이쪽이 문제야.
<주호> 어떻게 됐어?
<챠밍> 아! 오빠! 방금 클리어했어요! 색이 다른 바닥에 서야 물이 멈춰요. 처음엔 몰라서 헤맸는데 지금은 유저분들이 다 잘 따라 줘서.
<주호> 정말 다행이네.
휴, 저쪽은 어떻게든 넘어간 모양.
<챠밍> 아, 그리고 전사 오빠가 말해 줬는데 게시판에 벌써 미로 영상들이 올라온대요.
<주호> 그래?
<챠밍> …오빠 꺼도.
<주호> 응?
<챠밍> 오빠가 미로 돌파하는 영상이 지금 게시판에서 1등을 하고 있어요. 심지어 두 개나요. 단창 날아오는 미로랑 용암 미로.
이런……!
나와 같이 다니는 유저들이 영상을 녹화해서 올린 건가.
그동안 유저들과 함께 움직일 일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쪽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바로 이 사실을 황룡과 엔느에게 전했더니 둘이 뭔가를 의논하고는 황룡이 유저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지금 공략 영상이 게시판에 나돈다는데. 누가 올렸지?”
그러자 다들 꿀 먹은 병아리처럼 황룡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하아.
이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거네.
황룡 역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유저들에게 일갈했다.
“다들 머리가 없어? 공략 영상이 퍼지면 다른 유저들이 그대로 따라 할 거라고 생각 못 해? 경쟁자들에게 이득을 줄 생각이냐고!”
엔느 역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잘도 올리셨네. 이런 식이라면 우린 당신들하고 같이 못 가. 알아들어?”
유저들이 할 말이 없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안 올린 사람이 다수지만 올린 몇 명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미로 공략은 공략 방법만 알아내면 난이도가 대폭 내려가 버린다.
엔느가 바로 게시판을 뒤지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다른 미로 영상도 제법 올라왔어요. 깨지 못한 곳도 많기는 한데. 깬 곳의 영상도 있고요.”
“그냥 서로 다 보고 베끼겠군요.”
“네, 커닝 페이퍼나 마찬가지죠. 누구나 게시판에 영상을 올릴 수 있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황룡의 길드원들도 빠르게 다른 미로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결국 다 커닝하는 거군.
그리고 엔느가 몇 가지를 더 확인 시켜 주었다.
“현재 알려진 미로만 해도 그 종류가 삼십여 가지는 돼요. 그리고 처음 출발하는 공동도 길드에서 맞춰 본 결과 대략 열 곳이 넘는다고 하고요.”
“생각보다 공동이 많았네요.”
이러니 우리 팀을 만날 수가 없지.
“그리고 도중에 만난 적도 있다고 해요.”
“단순히 미로의 방향이 문제가 아니군요.”
“네, 이쪽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거죠. 서로 뭉칠 수 있으니.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정말 미로에서 헤맬 수 있어요. 못 빠져나가고. 거기다 물약은 계속 쓰는데 정작 물약을 채울 곳이 없어서 죽는 사람도 허다해요. 그러다 보니 서로 미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것 같아요.”
살기 위해 각자 정보를 내어 주고 정보를 얻는 식인가.
아마 이런 식이면 미로를 돌파하는 속도가 점점 가속화될 것이다.
아직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야.
“시간이 없네요. 빨리 가죠.”
다시 생겨난 세 개의 미로 입구.
그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르아 카르테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중앙.”
내가 그냥 결정했지만 황룡과 엔느는 아무 반대 없이 내 의견을 따랐다.
유저들도 마찬가지.
그렇게 중앙의 입구를 열고 들어가는데 앞에서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폭발하는 소리까지.
카앙!
컁!
콰앙!
이건…….
전투 소리?
아까 엔느가 다른 유저들과 미로에서 만날 수도 있다고 하던데 아마 먼저 들어온 유저들이 있는 것 같았다.
“진형을 지켜!”
“서로 떨어지지 마!”
“다 죽여!”
“한 놈도 남겨 놓지 마!”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는 꽤 다른 유저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니야?
당연히 미로에 배치된 몬스터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유저들고 유저들의 싸움.
처음과 같은 넓은 공동 같은 장소인가?
빠르게 공동 안을 둘러보자 숫자가 압도적일 정도로 다수의 유저들이 소수의 유저들을 벽에 몰아놓고 포위해 죽이려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다른 유저들끼리 싸우든 말든 별로 신경도 안 쓰겠지만.
포위당한 유저 중 누군가를 발견하는 순간.
바로 르아 카르테와 발루딘을 꺼내 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 오러 블레이드! 】
개떼처럼 포위해 공격하던 이들을 정면에서 지키며 홀로 버티는 유저.
갑옷이 부서질 정도로 겨우 막아 내던 이쁜소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물이 섞인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주호 오빠아!!”
지금 감히 누굴 건드려?
이 새끼들 다 죽었어!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