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미로 던전 (3)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그 말과 함께 꺼내 들었던 르아 카르테를 한 번 내려다봤다.
너.
이게 확실한 길이 맞아?
그런 내 시선에 르아 카르테가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잠시 부르르 떨었다.
이전보다 반응이 조금 더 강해진 것을 봐선 맞다는 건가?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네.
엔느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으음, 지금 상황을 즐기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데요?”
“네?”
“아, 입가가 올라가는 게 보여서요.”
내가 그랬나?
엔느는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저만 바라보면 곤란해요. 혹시 저 좋….”
“아이, 씨! 아니라니까요!”
엔느가 눈을 매섭게 뜨며 무기를 꺼내 들자 곧장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항복!”
“또 그러면 저 불구덩이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겁니다!”
“그건 좀 무섭네요.”
나와 엔느, 황룡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
우리가 선 통로 앞쪽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용암 지대가 쭉 이어져 있었다.
용암 위에는 멀찍이 떨어진 징검다리가 몇 개만 존재할 뿐.
그나마 시야라도 확실히 보여서 다행인 건가?
화끈한 용암 불빛 덕에 통로 전체 시야를 살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평소라면 그냥 징검다리를 밟고 달려 넘어가면 그만이다.
누구나 건너갈 수 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통로에 불과할 테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엔느도 그걸 아는지 내게 물었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을.
“단순히 밟고 넘어가란 소리는 아니죠?”
“아마도. 몸은 좀 움직일 수 있겠어요?”
내 물음에 엔느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좌우와 앞뒤로 몇 번 움직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식하면서 아주 느리게 움직이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비슷한 게임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그래요?”
“생각 외로 우린 정말 많은 게임을 접해요. 주력 게임은 한두 가지지만.”
역시 경험은 풍부하다는 건가?
“해본 적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네, 그때는 낭떠러지였지만… 떨어지면 죽는 게임이었어요. 그것도 고층 빌딩에서.”
“하하…….”
이 여자.
대체 무슨 게임을 하고 다닌 거야?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
“있어요. 주호 님도 나중에 해보세요. 고층 빌딩 넘어 다니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이니까. 발악하는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빌딩 아래를 집어던질 때 얼마나 짜릿한지…….”
“정중히 사양하죠….”
전에도 생각했지만.
평범함과 거리가 제법 먼 것 같다.
“용암 정도면 적어도 무서워서 떨어지진 않잖아요.”
“흐음, 과연 그럴까요.”
그러면서 품에서 하르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용암에 하르 조각을 집어던지자 하르 조각이 단 1초도 안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템이 녹는다라…….”
파괴가 불가능한 물질도 녹이는 것을 봐서는 유저가 들어가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엔느가 곧장 한 쪽 손을 용암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고는 용암에 새까맣게 탄 손을 다시 들어 올렸고.
“하…….”
겁이 없는 건지.
실험 정신이 투철한 건지 모르겠네.
어차피 죽지만 않으면 손이야 회복시킬 수 있으면 괜찮긴 하지만.
엔느가 바로 회복 주문을 걸어 손을 원상태로 복구시켰다.
그리고 뭔가를 알아냈는지 엔느가 나를 보면서 방긋 웃어 보였다.
“여기 용혈이에요.”
용혈?
내 표정을 보았는지 엔느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드래곤 레어와 드워프 지하 왕국에만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스토리 상 드워프가 인간들을 학살해 드래곤에게 쫓겨난 거거든요. 그런 드래곤을 잡기 위한 무기를 만들려고 드워프가 여기 자리 잡은 거고. 그러니까 용혈이 여기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겠죠?”
학살?
인간을?
드워프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건 드워프 왕이 한 말과는 완전히 반대인데.
“그게 무슨?”
“어머? 모르셨어요? 으음, 확실히 드워프 왕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얘기일 거예요. 드워프 왕도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하니까. 주변 퀘스트 조금만 파고들면 알 수 있을 텐데.”
“제가 퀘스트를 잘 안 하는 편이라…….”
정말 내게 필요한 퀘스트 외에는 거의 손도 되지 않았다.
굳이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편도 아니고.
그런 날 보는 엔느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너무 로스트 스카이에 관심이 없는 것 아니에요?”
“나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나만큼 열심히 하는 유저도 드물 것 같은데?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로스트 스카이에 투자하는데?
이건 우리 팀도 다 마찬가지고.
거기다 접속 제한 시간을 전부 쓰지 않으면 랭킹을 유지할 수 없으니.
누군가 옆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이상.
“랭킹이야 그렇죠. 대체 어떻게 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벨도 제일 높고. 이벤트도 거의 독식하는 걸 보면 확실히 열심히 하시는 건 맞아요. 으음, 사냥도 좋긴 한데. 아니다, 이쪽을 포기하니까 그렇게 레벨이 높으려나? 그래도 관점을 좀 바꿔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관점이라면?”
“NPC들. 이전과 다르게 굉장히 사람다워졌죠?”
“뭐, 좀 그런 편이죠.”
특히, 제국을 넘어온 이후 수동적인 대답만 하던 NPC들이 거의 다 능동적인 답변이나 대답을 해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개별적으로 판단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마리아 가르시아 같은 경우 시스템이 정해준 이벤트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야 특수 NPC라 그러려니 했는데.
“로스트 스카이 회사인 ZUN에서 인공지능 전문 회사 몇 곳을 인수합병 했거든요. 뉴스에서도 나왔는데. 잘 안 보시나 봐요?”
“TV를 거의 끄고 살죠.”
내가 머쓱하게 웃자 엔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해도 랭킹 1위라니… 억울해.”
“억울하실 것까지야.”
“암튼, 이전과 다르게 정보를 얻는 방법이 다양해졌어요. 우리가 어떻게 암흑혈에 대한 것도 알고 있는지 궁금하셨죠?”
“솔직히. 좀 놀라긴 했습니다만.”
아니, 사실은 많이 놀랐다.
우리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들을 해원도 알고, 엔느도 알고.
또 누가 알고 있을지.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랭킹 1위를 하고 있는 게 더 놀라울 따름이네요. 프로 팀들 다 정보 팀 굴리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가요.”
“세컨 팀에 그 밑으로도 협력해주는 인원이 엄청 많아요. 앞으로도 앞서나가려면 그쪽 길마 님이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아요. 이건 불멸 님이 아무리 최강의 프로게이머라고 한들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으니까.”
그런 엔느를 본 황룡이 손으로 엔느를 제지했다.
“그쯤 하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랬죠. 한 번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그런 엔느를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지원을 받는다라….
확실히 재중이 형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
각종 지원을 받으면서 프로 팀이 빠르게 크고 있다고.
아마 그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이건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선 미로에서 벽이 점점 밀려옴에 따라 유저들이 하나둘 입구를 통해 이번 미로를 향해 밀려들었다.
“우왁! 뭐야!”
“어? 어?”
“몸이 왜 이래?”
“으악!”
당연하게도 넘어온 유저들 대부분 엎어지거나 쓰러지는 모습이었고.
균형을 맞춰 제대로 서 있는 유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데?
그냥 제자리에서 움직이진 않고 있던 황룡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도움이 안 되겠군.”
이미 황룡은 저들을 전력 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
전투 상황이 일어나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과는 전혀 다른 미로가 우리를 맞이했다.
유저들이 전부 넘어오자 지금까지 유저들이 건너왔던 입구에서 거대한 벽이 내려와 바로 퇴로를 차단시켰다.
돌아가는 건 이제 불가능.
어차피 돌아가 봐야 벽에 눌려 죽을 뿐이니 갈 수도 없지만.
“어어, 밀지 말라고.”
“이거 정말 용암이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걸 어떻게 지나가?”
아직도 유저들은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미르 길드 유저들은 좀 나은 편.
상위 길드하고 아닌 길드와의 격차가 꽤 심한데?
내 시선을 받은 황룡이 말했다.
“어중이떠중이는 받지도 않아.”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요.”
프로 팀이 아니면서도 어느 정도 퀼리티를 유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 후방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땅이 꺼진다!”
“용암이!”
“젠장, 또 쫓겨나는 거야?”
“힐!! 빨리!!”
“헉! 벌써 죽었어…!”
뒤쪽에서 구경만 하던 유저들이 서 있던 곳이 용암지대로 변하면서 유저 몇몇이 빠지더니 순식간에 죽음의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드래곤 레어에서 봤던 용혈보다 이쪽이 훨씬 문제인데?
체력이 빠지는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 보였다.
이건 빠지면 바로 죽는다고 봐야 할 정도로.
거기다 뒤쪽에서부터 바닥이 무너져 용암으로 바뀌는 면적이 점점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적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건가?
그런 그때, 유저들이 우르르 몸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야! 미쳤어? 왜 용암에 몸을 던져!”
“아니야! 몸이!”
“젠장! 앞으로 달렸단 말이다!”
“아악! 누가 좀 살려줘!”
무의식적으로 용암 때문에 앞으로 달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은 의지와는 다르게 뒤로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점점 무너지는 바닥.
그리고 다가오는 용암.
그 상황을 지켜본 황룡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다. 바로 넘어가야 해. 엔느.”
“잠시만요. 생각하고 있어요.”
엔느는 이런 쪽으로 경험이 있다고 했지.
얼마 뒤, 엔느가 임시방편으로 해결책이 내놓았다.
“계속 말을 해요. 그럼 의식적으로 반대로 갈 수 있어요.”
그러자 미르 길드원 중 한 명이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큼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곧장 징검다리에 발을 올렸다.
“후! 난 할 수 있다. 뒤로 간다! 난 뒤로 간다!”
저건.
정말 나쁘지 않은데?
계속 뒤로 간다고 의식적으로 말하면서 몸을 앞으로 전진하는 것.
그렇게 징검다리를 안전하게 건너자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잘한다!”
“저렇게만 하면 넘어갈 수 있구나.”
“나도!”
심지어 점프를 하는 모습까지 보고는 유저들이 앞 다투어 징검다리에 발을 올려놓았다.
“주호 님 안 가요?”
“아, 가야죠.”
뭔가 이상한데?
이렇게 쉽게?
다른 곳에 비해서 난이도가 낮아도 너무 낮은 느낌.
엔느가 가르쳐준 방법이 해결책이라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그런데 그때 갑자기 디딤돌의 색깔들이 바뀌면서 유저들의 균형이 확 깨어져 버렸다.
“아! 왜 뒤로!”
“젠장! 뭐야!”
“안 돼! 빠진다!”
엔느가 그걸 보더니 바로 한숨을 쉬었다.
“디딤돌 색깔에 따라 방향이 반전되나 봐요!”
앞뒤로 바뀌었던 현상에서 지금은 다시 원상태로 복구가 되었는지 먼저 출발했던 유저들이 뒤로 쓰러져 버렸다.
당연히 용암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먼저 출발했던 미르 길드원은 겨우 제자리에서 멈춰서 살아 있었다.
하…….
역시 쉽게는 안 되는 건가.
던전 기믹 한 번 참…….
엔느가 잠시 지켜보더니 내게 말했다.
“검은색은 좌우, 앞뒤 전환. 빨간색은 좌우, 파란색은 앞뒤만 전환돼요. 노란색은 정상으로 돌아와요.”
“언제 색이 바뀌는지는 모르죠?”
“네, 다 따로 바뀌는 것을 봐서는요.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것을 봐서는 아마 이걸로 미로의 특성은 끝난 것 같아요.
난이도가 대폭 올라가자 유저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어차피 이걸 해내지 못하면 여길 지나가지 못해.
그때 디딤돌을 보다가 뭔가가 생각났다.
분명히 노란색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던가?
“제가 가죠.”
“할 수 있겠어요?”
“못 하면 죽는 거죠.”
죽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곧장 엔느가 알려준 방법대로 일단 검은색 돌을 밟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뒤엔 빨간색.
여기서는 좌우만 바뀌니까 앞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여기까진 쉬워.
밟는 순간 특성이 바뀌니까 그것만 잘 의식한다면!
그 뒤에 밟은 파란색으로 앞뒤만 바뀌자 곧장 옆으로 뛰면서 다른 디딤돌을 밟았다.
그렇게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면서 눈으로는 계속 한 가지 디딤돌만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노란색 디딤돌이 나오는 순간.
됐어!
바로 발을 뻗어 노란색 디딤돌을 밟자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 헤이스트! 】
【 대쉬! 】
그리고 그대로 디딤돌을 박차고 점프를 하자 몸이 앞으로 쭈욱 날아갔다.
“어어?!”
“저거 대쉬 아냐?!”
“주호, 저 미친놈!”
“세상에, 이 상황에서 이동 스킬을 써?”
“돌았어, 완전.”
그리고 다음에는 아예 바닥에 있는 디딤돌 자체를 밟지 않고 바닥에 뭔가를 꺼내 집어던졌다.
【 비검! 】
바로 브랜디슈 블레이드.
비검으로 검을 띄운 뒤 그걸 밟고는 다시 재차 몸을 날렸다.
그리고 몸이 떨어질 때쯤 다시 다른 브랜디슈 블레이드를 꺼내 들어 바닥에 던지고 띄운 뒤 밟고 뛰었다.
당연히 밟고 난 브랜디슈는 불러들여 회수를 했고.
“와! 주호 저 새끼 진짜!”
“대박!”
“쭉쭉 점프하는 거 봐!”
“미쳤어.”
디딤돌이 문제라면.
그냥 안 밟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일일이 감각을 집중해서 매번 방향을 바꾼다고 고생하느니 이쪽이 내겐 훨씬 편했다.
그렇게 용암의 미로를 통째로 통과해 반대편의 안전지대에 무사히 착지했다.
그러자 마자 엔느에게 바로 연락이 왔다.
<엔느> 당신 진짜. 미쳤어요?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주호> 뭐 제겐 꽤 익숙한 일이라.
<엔느> 정말… 이런 식이라면 정보 팀 따위는 당신에게 필요하지도 않겠네요.
<주호> 일단, 기관 같은 것이 있나 좀 찾아볼게요.
나야 이 방법으로 넘어왔지만 다른 유저들은 무리.
그러면 분명히 뭔가가 있어야 할 텐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인벤토리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보자 곧장 인벤에서 꺼내 들었다.
우웅!!
르아 카르테처럼 울려?
여기서 반응할 게 뭐가 있지?
설마…….
저 용혈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드래곤 슬레이어를 용혈 위로 가져다 댔다.
설마 녹거나 그러진 않겠지?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러운 시스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 드래곤 슬레이어가 드워프 지하 무덤의 용혈을 흡수합니다! 》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