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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549화 (542/1,404)

#549화 다시 한 번 깽판 (7)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재중이 형이 곧 화상 너머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4년 전 대회 때 보고 처음인가?”

“네, 그때가 마지막이죠. 후, 정말 이기고 싶었는데…….”

“넌 매번 나만 보면 어떻게 이길 생각만 하냐?”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특히 당신은.”

“나 매달리는 여자는 싫은데…….”

재중이 형의 그 말에 화상 반대편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누가 매달렸는데요?!”

“아이고, 귀청이야. 여기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쳇, 됐거든요.”

“이거 참, 옛날엔 되게 귀여웠는데 말이지.”

재중이 형의 마지막 말에 그 프로 여인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거 꽤 당황한 것 같은데?

“흥, 요즘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세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고. 이게 다 매력이야. 매력.”

“매력은 개뿔.”

재중이 형 특유의 능글능글한 어투에도 저 프로 여인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받아쳤다.

어떻게 보면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이가 나빠 보이기도 했다.

둘이 상당히 잘 아는 사이인 것 같기는 한데…….

애매하네.

프로 여인의 아이디는 엔느.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차분한 금발, 딱 맞춘 것 같은 금안이 인상적이네.

금발을 하면 오히려 화려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엔느는 화려하기보다 단정함에서 오는 지적인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냥 칼 같은 느낌이 들어 다가가기 힘든 그런 외모였는데 재중이 형과 유치하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 또 그런 느낌이 많이 희석되는 것 같았다.

재중이 형이 전에 말하기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 전략만 짠다고 해서 솔직히 완전히 음침한 그런 성격을 예상했는데 완전 틀렸다.

그런 엔느를 향해 재중이 형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너 팀에서 짤렸지?”

“노옵!! 아니거든요!”

재중이 형의 말에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바로 반응이 왔다.

그것도 발톱을 잔뜩 세운 그런 느낌으로.

“크큭, 반응이 너무 좋아서 그만두질 못하잖아.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이……!”

“아, 미안. 미안.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농담 좀 했어. 어때? 좀 편해졌어?”

“흥! 아니거든요.”

으음, 이건 그냥 재중이 형하고 안 맞는 거 아닌가?

재중이 형이 엔느라는 저 여인을 거의 들었다 놨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정말 짤렸으면 여기 자리 많으니까…….”

“캬악! 진짜!”

그러면서 또 놀리는 걸 보면 평소에서 저러고 놀았던 것 같기도 하다.

재중이 형이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게 웃는 것을 보면.

“되게 친하네요?”

내가 재중이 형을 보면서 그런 말을 하자 바로 화상 반대편에서 고함이 날아왔다.

“아니거든요!! 내가 왜! 저 사람하고 친해요!”

너무 반응이 좋으니까.

나도 왠지 놀리고 싶어진다…….

좀 전까지 숨겨져 있던 비밀의 유저라는 느낌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기분이네.

“그럼, 사모?”

“캬악! 아니라니까! 여기 사람들은 다 왜 이런 거야!”

내 말에 재중이 형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 이제 그만해. 계속하면 운다고.”

그러면서 엔느를 바라보는데 정말 눈가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와서 챙겨주는 척하지 마시죠? 하나도 안 고맙네요.”

“아아, 알았어. 그래. 그럼 언제 넘어온 거야?”

“얼마 안 됐어요.”

“그래? 생각 외네. 다른 애들 넘어올 때 같이 온 것 같았는데.”

재중이 형의 말을 들은 엔느가 갑자기 귀가 축 쳐지더니 모기 기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스카우트가 없었어요.”

“아, 그런 거였나?”

재중이 형도 이번에는 놀리지 않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줬다.

아마…….

RTP가 낮은 것 때문이려나?

그게 아니라면 게임 플레이 방식 때문에?

뭐, 어찌 되었든 로스트 스카이인 RTP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는 게임이었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그런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나니까 모를 수 없지.

재중이 형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 스탯이 낮고 반응이 낮은 초반에야 유저들끼리 별 차이가 없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RTP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 로스트 스카이도 엄연히 대전이 주를 이루니까.”

“칫, 저도 알아요. 그래서 안 된걸.”

아쉽지만 타고난 RTP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물론, 재중이 형처럼 역주행을 하는 특이한 케이스가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면 기업에서 안 쓸 리도 없고.

“가뜩이나 낮은 RTP가 계속 떨어지니 다들 거부하더라고요. 어차피 프로에 남아 있어 봐야 비전도 없고. 계약도 이미 끝나가는 중이라 혼자 넘어왔어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재중이 형도 거기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재중이 형을 본 엔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증명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재능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다는 걸요.”

“재능이라…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네?”

“너, 내가 한참 현역일 때 일 년에 몇 번 졌는지 알고 있어?”

“…모르죠.”

“5패야. 딱 다섯 번.”

그 말에는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러 대회에 참가하고 프로 정규 시즌을 합치면 수백 번은 넘게 대전을 할 건데…….

거기서 딱 다섯 번이라고?

이건 승률이 거의 97~8프로가 넘는다는 말이 된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 형, 진짜 대단하기는 했구나.

프로 사이에서 전설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재중이 형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그 다섯 번의 패배 중 두 번이 너한테 졌어.”

“…에?”

이건 정말 의왼데?

진짜 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당했다고?

이 말을 듣고 나니 재중이 형이 경계를 하는 이유를 바로 알 것 같았다.

“네가 매번 예선에서 떨어져 나가니까 아무도 신경 안 썼겠지만 나는 좀 썼다고? 그 잘난 우승자 후보들보다 더.”

“그치만… 결국 깨진 거잖아요. 전 떨어졌고.”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난 널 높이 사고 있다. RTP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톡톡 튀는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손만 빠른 병신들보다는 네가 훨씬 힘들었어. 내 기준엔.”

그 말에 깜짝 놀란 엔느가 잠시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재중이 형이 엔느를 들었다 놨다 하네.

“칭찬은 고맙지만, 난 당신들을 꼭 이겨야 하거든요.”

“아아, 미르 길드 소속이었지?”

그 말에 엔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대우가 나쁘진 않아요. 선택지가 없기도 했고.”

저건 프로에서 성적이 나지 않는 사람에게 큰돈을 투자할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려나?

그래도 프로는 프로니까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은 받기야 하겠지만.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 제힘으로 녀석들을 꺾고 싶었어요.”

“흐음, 증명이라 이건가?”

“네. 여기서, 라면. 제 재능이 썩진 않을 테니까요.”

재중이 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은 대로 해봐. 대신 봐주는 건 없다?”

“네, 당신도 꺾어야 할 사람 중에 하나니까요.”

“정말 기대되네. 그건.”

엔느의 말에 재중이 형이 더없이 반갑게 웃어 보였다.

재밌겠다는 표정을 가득하고서.

“아, 그리고 이 녀석 한 번 먼저 꺾어 봐. 현 랭킹 1위잖아. 재밌는 싸움이 될걸?”

“안 그래도 한 번쯤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끙.

둘의 싸움에 내가 갑자기 끼어든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굳이 절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않아요?”

“내가 명색이 전설인데 먼저 깨지면 우습잖아. 원래 보스는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라고. 그게 더 재미도 있고.”

“네네, 그러시겠죠.”

재중이 형이 나를 언급하자 자연스럽게 엔느와 내가 마주 보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엔느가 말했다.

“이전 영상 많이 찾아봤어요. 당신이 나온 영상을 특히.”

집요함이 가득 느껴지는 표정.

그러면서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나를 쳐다보는데 등에 소름이 확 돋았다.

재중이 형이 내게 밀어 넣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RTP 500 넘죠?”

“뭐라고 말해드리면 될까요?”

“초창기 영상부터 봤는데 도저히 일반인은 할 수 없는 컨트롤이 나왔어요.”

“그걸 다 찾아보셨어요?”

정말 재중이 형 말대로 몇 날 며칠 방 안에 틀어박혀 이길 전략을 짜는 건가?

“네, 최신 영상까지 전부.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사람들이 몰랐겠다 싶은 내용까지 보이더라구요.”

“그게 무슨?”

“초보자 마을, 선박과 비공정, 터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그 말에 우리 모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네임드. 네임드의 움직임이 중간, 중간 너무 이상했었어요. 도저히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몇 가지 구간도 있고. 아마도 누군가 강제로 개입을 한 것 같은데…… 그때 이득을 본 곳은 항상 한 곳으로 한정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엔느가 나와 재중이 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대체 이 여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공개된 영상으로는 다 알 수는 없을 텐데.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도 있고 중요한 곳에서는 영상도 남기지 않았다.

사실 비슷한 생각을 한 유저들이 없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증거를 찾지 못해 떨어져 나갔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진 마세요. 저도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어요. 뭐, 그 심증이 확실하다는 걸 제외하면.”

그 말에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다가 내게 작게 말을 했다.

“봤지? 완전 스토커라니까.”

“캬악! 스토커 아니야!!”

“크큭, 아, 들렸나?”

역시 형한테는 안 되는구나.

엔느가 기껏 잡아두었던 무게도 한 번에 털려나가 버렸다.

“너무 스토킹하지 말라고. 너 상대해야 할 애들이 앞으로 태산일 건데, 벌써부터 힘을 빼는 건 아니지?”

재중이 형의 말에 엔느가 눈썹을 치켜들고 말했다.

“지금은 당신들이 제 적이거든요. 미르 길드가 쿠론 요새를 먹으려면!”

“아, 그건 포기 못 하지. 그냥 이번엔 졌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거다.”

“흥, 이번에도 네임드를 움직이려고요? 고르곤을 움직여서 쿠론 요새를 친 것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네임드가 우리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이 고생 안 하지. 너도 알 텐데?”

“그래도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요.”

“맞다고도 안 했지.”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다음엔 이번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엔느가 화상을 끄고 사라졌다.

바로 화상을 끄고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엔느의 발언에 혀를 찼다.

마치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 예상한 것처럼.

아마 쿠론 요새에서 고르곤을 공략하려는 몇 가지 움직임은 미리 준비해놓은 거겠지.

우리가 고르곤을 옮겨올 것이라 예상했을 테니.

“꽤 재밌는 사람이네요.”

“그치?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니까.”

“확실히 그건 대단하네요. 증거도 거의 없을 텐데.”

그러다가 의문이 생겨서 물었다.

“그냥 아예 포섭하지 그랬어요? 보니까 형이 말하면 넘어올 것 같기도 한데.”

그 말에는 재중이 형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에겐 우린 별로지. 자기가 가진 걸 전부 내보일 수 없을 테니까. 딱 미르 길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흐음, 복잡하네요.”

“그래, 나중에. 지금은 아니야.”

재중이 형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후, 요새 이벤트는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버가 되어가는 네임드들을 상대하기엔 너무 환경이 좋지 않았으니까.

단순히 요새를 먹는 것만으로 네임드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유저들이 알고부터는 그런 시도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떼버렸다.

우리도 한동안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네임드들이 오버가 되길 기다리며.

그리고 드디어 이벤트 마지막 날.

우리가 일으켰던 깽판의 끝을 볼 때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 팀에게 말했다.

“자, 그럼 모두 오버된 네임드들을 수확하러 갑시다.”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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