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다시 한 번 깽판 (6)
고르곤이 쿠론 요새 내부에서 깽판을 치는 와중에도 미르 길드 유저들은 침착하게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품에 가지고 있던 하르 조각을 이곳저곳에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하르 조각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요새 공터 바닥 전체가 점점 은은한 빛으로 뒤덮였으며, 제대로 보이지 않던 고르곤의 윤곽이 하르 조각 때문에 서서히 보였다.
“대체 고르곤 크기가 얼마큼 큰 거야?”
“우와! 고르곤이 저렇게 컸다고?”
“뭘, 멍 때리고 있어! 고르곤 그쪽으로 가잖아!”
“뒤지기 싫으면 옆으로 빠져!”
“고르곤하고 정면에서 붙지 마! 빨리 움직이라고!”
아예 안 보이는 것과 윤곽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다.
미르 길드 쪽 유저를 포함한 연합 유저 모두가 확실한 움직임을 취하면서 피해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참 어수선했던 분위기 역시 점점 안정화되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어.
적어도 완전히 라인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은 막았으니까.
가격은 둘째로 치고 이런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다 그 하얀색 후드를 쓰고 있던 유저가 다시 뭔가를 미르 길드장에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곧 미르 길드장이 주변에 뭔가를 계속 지시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유저들의 배치가 완전히 변경되어 갔다.
저건… 탱커를 빼?
보통 레이드는 탱커를 무조건 포함시키는 게 정석이다.
어글이 사방팔방 튀면 그만큼 레이드를 하는데 부담으로 다가오니까.
다만 이번 경우엔 수를 달리한 것으로 보였다.
하르 조각을 통해 고르곤의 윤곽과 이동 경로 확인은 가능했지만, 정작 고르곤의 공격은 대처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탱커를 싹 뺀 건가?
어설프게 탱커를 투입해 계속 죽어 나가느니 아예 빼버린 모양.
그 사이 사방에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유저들이 고르곤을 감싸면서 점점 포위망을 형성해 갔다.
저러면 어글이 이리저리 튀어서 난감하겠지만, 요새 내부에 유저가 많다 보니 어떻게든 쪽수로 해결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절대 접근하지 마! 철저히 녀석을 갉아먹는다!”
“원거리는 어글 붙으면 최대한 원을 그리면서 돌아!”
미르 길드장이 레이드 오더를 지속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길드원들도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다 이내 자리를 잡아갔고.
의문을 가지고 반대하는 유저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길드장을 믿고 간다는 그런 느낌.
이건 미르 길드나 불새 길드나 거의 유사한데?
미르 길드장과 그 옆에 있던 하얀 후드를 쓴 유저를 바라본 챠밍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정말 대단해요.”
“그렇네. 이런 식으로 하르 조각을 쓸 줄이야. 거기다 탱커를 빼버리다니.”
급할 때 나오는 임기응변인가?
아니면 미리 준비를 하고 왔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순간 그걸 바로 실행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재중이 형이 주의하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프로들은 다 이런 식인가?
이 정도로 준비를 했다면 우리만 고르곤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설마 고르곤이 잡힐까요?”
챠밍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그건 힘들지.”
고르곤은 보이지 않는 것만이 무기는 아니었다.
단순히 고르곤이 움직이는 이동 경로나 윤곽을 보는 것으로 끝날 것 같으면 내가 그 고생을 안 했지.
“이제 지켜봐. 무슨 일이 일어나나.”
내 예상은 얼마 뒤 현실로 일어났다.
일단, 연속 점프 공격.
고르곤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오르는 순간,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파동 때문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근처 땅들이 죄다 흔들리더니 하르 조각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충격을 느낀 원거리 유저들 역시 혼동을 일으켰고.
보이지 않아도 고르곤이 점프를 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크윽, 땅이 울려!”
“젠장! 고르곤이 뛰었어!”
“전부 다 피해! 움직이라고!”
“어디로?”
“몰라! 일단 무조건 움직여!”
“아니야! 위치 사수해! 진형을 무너뜨리지 마!”
단순하게 고르곤이 땅바닥에 있을 때야 저 방법이 통하겠지만, 고르곤이 뛰어오르는 순간 그런 꼼수는 먹히지 않게 되었다.
어디서 뛰는지는 알겠지만.
고르곤이 어느 장소에 떨어져 내릴지는 고르곤 본인만 아는 사실.
이걸 맞추려면 거의 복권을 긁는 느낌으로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
순간 내 시선이 영상에서 쿠론 요새로 향했다.
거기엔 쿠론 요새의 공중에 고르곤의 육중한 신체가 붕 떠오른 모습이 보였다.
챠밍 역시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입을 막았고.
저 커다란 몸이 성벽 위까지 점프하는 모습이란…….
그 자체로 장관이지.
얼마 뒤.
쿠우우웅!
예상과 전혀 다른 장소에 떨어진 고르곤이 대지에 충격을 주면서 아주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었고, 그 크레이터 중심에 있던 유저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녹아 죽음의 빛으로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방어가 약한 원거리 유저들이 이런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그리고 크레이터 주변은 강력한 충격파와 함께 땅이 출렁거리더니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나 유저들을 사방으로 튕겨내 버렸다.
“으악!”
“아악!”
“젠장, 이걸 어떻게 봐!”
피한다고 피했지만, 낙하지점 자체를 모르고 있던 유저가 대다수였고 그런 유저들의 체력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다 충격에 죄다 경직이 일어나 몸을 가누지 못해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저걸 당하지 않으려면 타이밍을 잘 맞춰서 피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거기다 고르곤은 여러 번 점프한다.
연속 세 번의 점프로 원거리 유저가 있던 진영을 초토화시키자 좀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그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미르 길드장은 나름 침착하게 유지하면서 다시 오더를 내렸는데 정작 그걸 제대로 실행할 유저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미르 길드장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감당이 안 되는 피해가 한 번에 일어나자 어이가 없었던 모양.
원거리 유저들로 레이드를 하는 방법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심지어 고르곤은 이것도 가능하지.
“뭐, 뭐야?”
“어?! 어디 갔어?”
“점프한 것도 아닌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바닥에 깔린 하르만 믿고 있던 유저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
저건 안 봐도 뻔했다.
이미 고르곤이 블링크를 사용해 위치를 변경해 버렸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근접 유저들이 잔뜩 몰려 있던 장소에 고르곤이 나타났다.
당연히 유저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순간 그중에 누군가가 바닥을 보더니 얼굴색이 확 죽어버렸다.
“…발! 망했다.”
하르 가루가 뭔가에 크게 짓눌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소름 돋는 장면이었다.
바로 고르곤의 뿔에서 뇌전이 생성되더니 사방으로 퍼지는 번개를 잔뜩 뿜어내어 근처에 멍하게 있던 유저들을 한 방에 녹여 버렸다.
“으악! 살려줘!”
“젠장! 이걸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하르를 너무 믿고 있어서 생긴 허점이 여기서 제대로 드러났다.
역시.
단순히 이동 경로와 윤곽을 볼 수 있다고 쉽게 잡을 수 있는 네임드가 아니야.
물론, 이것으로만 끝나면 어쩌면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고르곤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새 내에서 유저들은 계속 부활하니까.
죽는 피해를 감수하고 대미지를 쌓으면 결국 어떻게든 잡기는 잡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게 절대 불가능했다.
유저들을 죽일 때마다 고르곤 역시 차근차근 경험치를 얻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레벨업을 하면 그동안 받았던 피해를 모조리 복구해 버린다.
여기에 무한정 시간을 끌 수도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고르곤이 아까 반쯤 무너졌던 성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쿨이 돌아온 기가 라이트닝을 다시 한 번 날렸다.
콰지지지직!
쿠앙아앙!
전에는 어떻게 버텼지만, 추가로 기가 라이트닝을 맞은 성벽이 이번에는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악! 성벽이 무너진다!”
“다들 피해!”
“안 돼! 아직 무너지면!”
“몬스터들이 넘어온다! 탱커들 몸으로 막아!”
“미쳤나! 저걸 어떻게 막으라고!”
성벽이 무너져 내려 성벽이 주던 이점이 싹 사라지자 쿠론 요새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결국 억지로 눌러놨던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감염 스킬에 걸린 유저들을 죽여가면서 버티던 방법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감염 스킬이 일파만파 주변으로 퍼져나가 유저들을 싹 녹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던 챠밍이 혹시나 고르곤이 잡힐까 봐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네요.”
“응, 네임드 두 마리를 동시에 막을만한 능력은 없었던 거야.”
저 하얀 로브를 입은 유저가 놀랄만한 방법을 생각해 거의 잡을 뻔한 상황이 연출되긴 했다.
다만, 밖에서는 흑장로가 날뛰고, 안에서는 고르곤이 날뛰니.
거기다 지금의 상황들과 그걸 실행에 옮기는 유저가 문제다.
만약, 최정예로 모아두었다면 상황은 또 달랐을지도.
미르 길드장은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옆에 있던 유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미안하군.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해줬는데 말이야. 좀 더 정예로 꾸렸어야 했어.”
그 말에 하얀 로브를 입고 있던 유저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그 말이 옳다는 양.
전혀 어떠한 대답도 변명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게 미르 길드장이 무너져 가는 쿠론 요새를 바라보다가 결국 몸을 빼내었다.
“쿠론 요새는 포기한다. 최대한 챙겨서 전부 빠져나가도록.”
미르 길드장이 그렇게 선언을 하자 억지로 막고 있던 연합 유저들도 폭풍처럼 살길을 찾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승리한 고르곤의 거대한 외침과 함께.
* * * * *
-쿠론 요새도 무너졌음.
-와, 진짜 요새는 누가 잡았다 하면 바로 무너지네.
-쉽게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겠지.
-근데 대체 쿠론 요새에 고르곤이 왜 나타난 거야?
-모르지. 바이탄 요새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더라.
-덕분에 바이탄 요새는 또 지켰네. 진짜 재수도 좋아.
-에이, 주호 네가 이번에도 잡았을걸? 고르곤이 도망간 거 아닌가 싶은데.
-그것도 말이 되네.
레티어스 요새에 이어 쿠론 요새가 박살 나고 이야기는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었다.
진실은 쏙 빠진 채.
사람들이 아무래도 축복받은 페가수스의 능력을 모르니…….
다시 바이탄 요새로 돌아가자 재중이 형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고생했다.”
“전하고 똑같아요. 네임드가 알아서 다 하더라고요. 잘못하다가 물 먹을 뻔했지만. 형이 말한 사람… 솔직히 굉장하던데요?”
“크큭, 그렇지?”
“네, 절대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우리 팀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때 내게 화상이 하나 걸려왔다.
누구지?
어지간하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오는 화상은 잘 받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 사람은.
쿠론 요새의 그 하얀 로브?
아이디는 그때 봤기에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형, 이거…….”
“아, 받아봐. 재밌겠네.”
재중이 형이 씨익 웃으면서 말하자 잠시 숨을 고르고는 화상을 연결했다.
그러자 영상에 하얀 로브를 깊게 눌러쓴 그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날 보자마자 곧장 의외의 말을 꺼내 들었다.
“쿠론 요새 당신 작품이죠?”
이건 알 수가 없는데… 뭔가 눈치챈 건가?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멈춰 있자 곧 그 사람이 하얀 후드를 한 손으로 잡고 뒤로 벗겨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찰랑거리는 금발 헤어가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어?
남자가 아니었어?
깜짝 놀라 옆에 있던 재중이 형을 바라보자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었다.
“난 남자라고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