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마력 봉인 (5)
언제라도 드래곤에게 뛰어들 수 있도록 다른 유저들보다 훨씬 드래곤에 가깝게 서 있었던 내게는 이 공격에 반응할 시간이 남들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칫.
이미 뒤돌아 뛰기에는 너무 늦었어.
내 최대 민첩으로도 이 상황을 벗어나긴 힘들어 보였다.
겨우 생각나는 것은 백스탭 정도.
하지만 스킬로 빠져나가는 시간보다 전방위적인 저 스킬이 덮쳐오는 시간이 더 빠를 것 같았다.
그 순간 피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뒤 드래곤 슬레이어와 르아 카르테를 십자로 교차해서 정면을 막았다.
어차피 못 피한다면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여볼 수밖에.
저 스킬의 위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드래곤 플레이트와 화룡화가 저 스킬을 버텨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쪽은 절대 죽으면 안 된다.
단순히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죽었을 경우 잃어버릴 수 있는 가치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조금은 더 몸을 사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지만.
어차피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이 했을 테니…….
지금은 오직 저 스킬을 막는 것에만 몰두했다.
혹시나 싶어 화룡화로 변한 상태에서 쓸 수 있는 스킬도 겹쳐서 시전했다.
【 스케일 미러! 】
어지간한 스킬은 다 반사해주는 스킬.
하지만 저렇게 광범위하게 터지는 특수 스킬은 반사가 되는지 의문이었고.
보통 이런 사방으로 퍼지는 광역기는 막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특히 네임드가 쓰는 스킬은.
거기다 오버된 드래곤이 정말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쓴 스킬이 절대 약할 리가 없지.
실상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막아본 적이 없어서 지금의 방법을 그렇게 신용하지는 못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대미지를 줄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드래곤에게서 터져 나온 붉은 빛과 폭발이 드래곤 슬레이어와 르아 카르테를 덮치는 순간.
1차로 스케일 미러의 투명한 비늘이 빛과 폭발을 막아섰다.
설마 튕겨 낼 수 있나?
그렇게 기대를 하고 봤지만 역시 스케일 미러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바로 스케일 미러가 공중에서 부서져 산산조각 나서 빛과 폭발에 묻혀버렸다.
그 뒤 교차로 막았던 두 검들이 크게 튕겨 나가며 양팔이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이 팔 전체를 타고 전달되었다.
큭.
버틸 수 있는 파워가 모자라.
내 쪽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살려서 모자란 힘을 커버하는 스타일이지 이런 식의 몸으로 버티는 자세는 익숙하지 못했다.
단순히 스탠딩 자세에서 버티는 일은 오히려 근력이 더 높은 전사 형이 더 잘할 것이다.
2차로 저지를 했던 두 검들까지 모두 튕겨 나가자 온몸으로 폭발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속도로 체력이 떨어지자 덜컥 숨이 막혀왔다.
드래곤 플레이트와 화룡화의 신체로도 이렇게 깎인다고?
방어력만으로는 현 최고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이 최종 스킬은 막아내기가 버거워 보였다.
체력이 떨어지는 동시에 체력 물약이 소모되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긴 했지만 단순히 물약만으로는 무리였다.
그나마 스킬, 무기, 방어구, 신체가 모두 최상이라 이 정도를 버틴 거지 아니었으면 이미 저 붉은 빛과 폭발에 묻혀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체력이 떨어지다가 거의 바닥에 가까운 수치까지 체력이 떨어져 내렸다.
젠장.
이제 더 못 버티나?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놓고 레이드에 임했는데 지금 같이 무식한 스킬은 범위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목에서 황금색의 환한 빛이 퍼져 나왔다.
응?
이건?
《 황금의 아물렛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모든 공격을 1회 무효화시킵니다. 》
그리고 내 몸을 덮쳐오던 붉은 빛과 폭발과 경계를 이루면서 밀어내더니 거짓말처럼 폭발을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소멸시켜버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려나?
그러자 떨어지던 체력도 물약의 효과로 계속 차올랐다.
목에 걸어두고 그동안 발동이 되지 않아 완전히 잊어두고 있었는데…….
체력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순간.
황금의 아물렛이 효과를 발휘했다.
아마 내가 정말 위급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발동되는 식이어서 그동안은 한 번도 발동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큭.
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나를 덮치던 폭발이 걷히자 시야에 폭발을 일으킨 주범이 보였다.
비늘이 다 날아가고 체격이 작아져 앙상한 신체만 남아있는 드래곤의 모습.
자폭인 줄 알았는데 자기가 죽을 때까지 터트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도 남은 마력을 모두 터트린다던가 그런 종류인 것 같기는 한데…….
어차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저 드래곤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문제였지.
잠시 뒤를 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큰 덩치의 비공정들.
그런 비공정들 대부분이 빛과 폭발에 휩쓸려 반파되어 박살 나 있었다.
비공정은 빠르게 이동을 못하는 데다가 갈고리로 드래곤과 연결되어 있다 보니 움직이지 못해 폭발 범위 안에서 죄다 터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스킬에 우리 연합 사람들이 죄다 쓸려나가 버렸다.
그것도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거기다 연합 사람들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아이템이 잔뜩 널려 있는 것을 보고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건 무슨 미친 스킬이지.
워낙 강력해서 범위가 좁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일대를 전부 쓸어버릴 정도로 범위가 넓었다.
혹시나 싶어 우리 팀도 찾아봤지만 역시 없었고.
하…….
미치겠네.
정말 나 혼자 살아남은 거야?
그때 귓속말 창이 갑자기 폭주를 했다.
<챠밍> 오빠! 진짜 살았어요?!
<이쁜소녀> 와! 오빠는 살았다아!
<나르샤> 하아, 네가 죽으면 어쩌나 했어.
<막내별> 살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불멸> 하, 진짜. 십년감수 했네. 무슨 스킬이 미쳐가지고.
<방패전사> 내가 막아줬어야 했는데… 이번엔 어떻게 막아줄 틈도 없더라니까?
<주호> 아, 괜찮아요. 어떻게 살긴 했어요.
다들 부활하자마자 내 생사부터 확인한 모양이었다.
우리 팀 중 절대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리고 어지간하면 전사 형이 막아줬겠지만 워낙 순식간에 퍼져버려서 그럴 틈조차도 없었다.
<불멸> 드래곤은? 아직 죽은 걸로 안 뜨던데?
<주호> 생각보다 질기네요. 저놈. 아직 살아있어요.
<불멸> 조금만 기다려. 금방 날아간다.
<주호> 아마… 혼자도 될 것 같아요. 천천히 오세요.
다시 고개를 돌려서 드래곤을 바라보는데 드래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나를 보고는 역시 당황한 것 같이 움츠러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거 참.
내가 살아남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한 모양인데.
당연히 죽을지 알았던 유저가 멀쩡하게 살아서 서 있으니 드래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그렇게 뒷걸음질 치던 드래곤이 갑자기 앙상한 날개를 펼치더니 위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갯짓을 했다.
오버되어 있던 그 맹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도망가기 위해 발악하는 몬스터가 있을 뿐.
“그렇게는 안 되지.”
도망가려고 떠오른 드래곤의 날개를 향해 조준한 뒤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일직선으로 빠르게 쏘아냈다.
그렇게 날아간 드래곤 슬레이어가 드래곤의 앙상한 날개 죽지를 뚫고 박히자 드래곤이 힘을 잃고 곧장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쿵!
키에엑!
설마 아까처럼 그런 스킬을 다시 쓰지는 않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던져봤는데 다행히 또 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정도 스킬을 또 쓰면 그게 진짜 사기지.
물론 어느 정도 긴장을 한 채 드래곤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연기를 하는 몬스터도 가끔 있는데 드래곤이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다행히 내가 접근함에도 이미 대부분의 힘을 잃었는지 드래곤이 일어나지 못한 채 경직되어 있었다.
그렇게 드래곤의 머리 앞에 서서 르아 카르테를 들어 올렸다.
“정말 길었네. 이젠 진짜 좀 죽어라.”
그리고는 르아 카르테를 드래곤의 이마에 강하게 박아 넣었다.
파각!
마치 뭔가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이마에 르아 카르테가 깊숙하게 들어갔다.
그러자 드래곤이 한 번 부르르 떨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눈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져버렸다.
《 용의 대지의 화염 드래곤 - 아퀼라스의 체력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
《 축하합니다! 아퀼라스가 사망했습니다. 》
《 크루아 대륙 모든 NPC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집니다. 》
《 크루아 대륙 명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
《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
.
.
이번에는 제국에서 보상을 주지 않나?
최초 킬 시에만 주는 것일 수도 있고.
돌발 퀘스트나 방어전 퀘스트 정도가 아니면 지금의 내겐 크게 의미는 없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디 보자.
사람들이 오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고.
드래곤과 전투 중에 만들어둔 거점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라 멀리 어딘가에서 임시 부활을 했을 것이다.
일단 오버된 드래곤에게서 나온 아이템들을 빠르게 수거해 인벤 속에 막 집어넣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일일이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혹시나 다른 유저들이 오기 전에 이곳을 혼자서 정리해야 했다.
우리 팀과 연합 사람들이 드래곤에게 죽었기 때문에 드랍된 템들은 다른 유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전부 주워갈 수 있으니까.
물론 우리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면 그러지는 않겠지만 사람 욕심은 그렇게 이성을 따져가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서.
재빠르게 움직여 일단 우리 팀의 흔적부터 찾아냈다.
특히 전사 형의 방어구.
수룡갑 중 한 부위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잽싸게 인벤 속에 넣었다.
전사 형의 방어구 뿐만 아니라 나르샤 누나의 활이라던지 소녀의 배틀 액스 등 절대 떨어지면 안 되는 것들부터 싹 챙긴 뒤 다시 사방에 널려있는 용의 비늘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 밖에도 다른 유저들의 아이템들도 최대한 주워댔고.
특히 비공정.
이것들도 소유가 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내가 가졌다.
비공정 소유 최대 한도가 있기 때문에 다 넣어두진 못하고 대부분은 반파된 채로 서 있었다.
하아…….
이거 난감하네.
혼자서는 더 주울 수도 없고.
제일 비싸 보이는 것들로만 주워놓기는 했는데 이 이상은 무리였다.
할 수 없이 이쯤에서 손을 놓았다.
더 이상 주웠다가는 내가 움직일 수 없으니.
이 정도면 동맹에 대한 예의는 최대한 차린 것 같고.
그때 전투 소리를 듣고 날아온 다른 유저들이 먼저 여기로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BJ들?
아님 그냥 유저?
어느 쪽이든 지금은 달갑지 않은데…….
그런 유저들이 꽤 많이 접근을 하더니 메테오로 땅이 뒤집히고 드래곤이 쓴 최종 광역기에 쓸려버린 땅을 보고는 기겁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드래곤하고 싸운 거야?”
“맞다니까? 여기야! 여기!”
“완전 땅이 뒤집혔잖아?”
“어떻게 싸우면 이렇게 되는 거지?”
“아! 저기 아이템 잔뜩 떨어져 있다!”
“어? 비공정도 다 부서져 있어! 대박!”
“일단 주울까?”
“그런데 막 주워도 되나? 아직 전투하고 있는 것 아냐?”
“아무도 없잖아. 다 죽었나 보지. 그럼 할 말 없잖아!”
그렇게 웅성거리며 접근하는 유저들을 보면서 한숨부터 쉬었다.
이것들 내가 안 보이나?
워낙 전투 장소가 넓다 보니 아직 날 발견 못 한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이렇게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할 수 없이 접근하는 유저들에게 걸어갔다.
곧 나를 발견한 유저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주호?”
“주호? 어디?”
“저기 걸어오네. 설마… 그럼 드래곤 잡은 거야?”
“어어, 이러면 이야기가 이상해지는데…….”
임자 없이 널려 있는 아이템이라면 막 주워가도 아무도 할 말이 없다.
본 사람이 없는 상황에는 더 그렇고.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내가 여기 있기만 해도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그런 당황해하는 유저들을 향해 외쳤다.
“혹시 아이템 주우실 생각은 안 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드래곤하고 전투 중에 죽은 사람들 아이템이라서요.”
“아,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녹화 중이니까 건들면 정말 나중에 찾아갑니다.”
내 공격적인 경고성 말에 몰래 아이템을 건들려고 했던 유저들이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뭔가 쑥덕이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 좋네.
얌전히 돌아갈 줄 알았더니…….
<주호> 형, 좀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불멸> 무슨 일 있어?
<주호> 오랜만에 피를 좀 볼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그렇게 자기들끼리 작당을 하던 중 나를 바라보는 유저들의 눈빛이 어느새 전혀 다른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역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그리고 녀석들 모두 무기를 꺼내 드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이미 욕심에 눈이 돌아갔네.
별수 없나.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역시 드래곤 슬레이어와 르아 카르테를 꺼내 들었다.
“그래, 와라. 오늘 한 번 피를 보자.”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