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
#358화 미치광이 리치 (1)
우드득.
회색 로브로 가려진 왜소한 몸이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음?
뼈가 있었던가?
회색 로브를 보고 고스트와 비슷한 현태라고 짐작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완벽히 틀린 판단이었다.
어느새 로브 밖으로 뼈로 된 손과 지팡이, 그리고 두 눈이 시커멓게 비어 있는 해골의 모습으로 변했다.
시뻘건 안광은 덤이었고.
처음 등장해 도망만 다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키키키킥.”
마치, 장난이었다며 놀리는 듯한 쇠 긁는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몬스터가 함정을 팠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게임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당황한 듯했다.
게다가 좀 전에 벌어진 상황은 흑마법사를 공격한 유저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세팅 되어 있는 것 같고.
블링크로 날아온 데스 나이트의 공격을 피한 뒤, 커스 아처들의 화살을 쳐내는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버틸 수 있는 함정.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분명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 있는 패턴이었다.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방심하다 맞은 한 방 덕분에 아끼던 스킬들이 빠진 것도 있지만, 무너진 전열을 갖추기 위해 내 옆으로 하나둘 복귀하기 시작했다.
맡고 있던 몬스터들이 흑마법사의 옆으로 돌아갔기에.
“하, 저놈 이름도 바뀌는데?”
옆으로 다가온 재중이 형 말대로 평범한 흑마법사였던 몬스터 네임이 갑자기 다른 것으로 변해 버렸다.
미치광이 리치.
그걸 본 모든 사람이 놀란 듯 웅성거렸다.
우리 길드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다 알고 있었다.
예전, 광산 던전을 끝까지 내려갔을 때 나왔던 네임드 몬스터의 네임이라는 것을.
지금 이곳에 있으면 절대 안 되는 그런 네임드이기도 하고.
“하, 역시 리치였나? 왜 저놈이 여기서 나오냐, 후.”
네임드의 이름을 보자마자 재중이 형의 표정이 조금 굳어버렸다.
최종병기 형도 답답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너, 뽑기 운은 진짜 죽이네.”
현역 여대생이 최종병기 형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는 뾰로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좋은 뜻이에요? 나쁜 뜻이에요?”
“저거 잡으면 좋은 뜻. 못 잡으면 나쁜 뜻.”
“뭐래.”
“엿 됐거나 횡재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미치광이 리치를 찾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 최고지만, 여기서 저놈을 잡지 못하면 최악이다.
데스 나이트 두 마리만 해도 버거운데 던전 최종 네임드라…….
“형, 이거 아무래도…….”
“아아, 그동안 우리가 너무 심했나.”
재중이 형이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했던 네임드의 배치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직접적인 간섭은 힘들어도, 몬스터 배치나 설정 등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참 짓궂은 사람들이야. 이런 식으로 쉽게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다니…….”
보스 룸도 아닌 곳에서 보스가 튀어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손을 썼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뭐, 네임드 보스가 멋대로 돌아다닌다는 설정이 있으니 따지긴 어렵지, 거기다 원래 이런 설정일 수도 있고.”
재중이 형이 말은 쉽게 했지만, 스피어를 꽉 쥔 채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시선 역시 리치에게 가 있고.
그때, 미치광이 리치에게서 쇠를 가는 걸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키킥, 내 던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
말도 할 수 있는 건가?
하긴 오크 족장도 말을 했으니 딱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미치광이 리치의 해골이 일그러지더니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 감히, 내 실험실을 넘보다니 용서할 수 없다! 』
에? 환영한다며!!
“저거 좀 이상하죠?”
“괜히 미치광이가 아니니까.”
우리가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미치광이 리치가 해골 지팡이를 땅바닥에 강하게 찍어 내렸다.
그러자 바닥에 붉고 검은 마법진이 바닥으로 크게 퍼지기 시작했다.
“일단 피해!”
재중이 형의 신호에 모든 사람이 바닥으로 퍼져 나오는 마법진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어떤 공격도 날아오지 않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마법이지?
공동 바닥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진 마법진이 바닥에 스며들 듯 사라지는 순간 바닥에서 수십 마리의 해골과 구울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소환 마법?
가뜩이나 우리 쪽 숫자가 부족한데 추가 몬스터라니.
“하아, 우리가 실수한 것 같은데?”
재중이 형도 이번엔 꽤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데스 나이트 두 마리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탱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둘은 있어야 했다.
그것도 미치광이 리치를 프리 롤로 둔다는 가정으로 두 팀이 있어야 한다.
대기 중인 커스 아처도 까다롭고, 거기다 해골이나 구울이 추가되면 답이 안 나온다.
적어도 네 팀.
최소 네 팀은 있어야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었다.
다들 재중이 형의 입만 바라봤다.
“휴, 정말 어쩔 수 없나…….”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재중이 형이 품에서 데스나이트 변신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벌써 변신 주문서를?
“형? 위기의 상황에 쓰라면서요?”
위기 상황을 뒤집기 위해 쓰라고 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하지만 재중이 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주었다.
“미리 하나라도 줄여놔야 게임이 돼. 이대로는 전멸뿐이야. 그리고…….”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위험 상황이지.”
재중이 형의 말에 침을 삼켰다.
확실히.
변신을 하지 않으면 힘들 정도로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아니, 나쁘다.
그것도 매우.
“수호, 최종병기는 데스 나이트에게 아까처럼 붙어줘. 할 수 있겠어?”
수호 형과 최종병기 형이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죽어도 저건 붙들고 있을게.”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듯 비장한 각오를 내비치는 프로 형들.
“좋아, 사탕 양은 수호만 보세요. 다른 것은 절대 신경 쓰지 말고, 알았죠?”
“네! 해볼게요!”
하르 지팡이를 끌어안고 다소곳하게 서 있던 사탕 누나 역시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사탕 님 몰이해 본 적 있어요?”
재중이 형이 고개를 돌려 사탕 누나 옆에 자리한 사탕 형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러자 사탕 형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잘한 놈들 전부 달고 움직일 수 있겠어요?”
“으음, 해보겠습니다.”
“네임드에 자잘한 놈들까지 붙으면 절대 못 이깁니다. 잘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소녀.”
“네?! 네.”
“사탕 님, 보조. 광역기로 최대한 녹여. 너라면 충분할 거다.”
“맡겨주세요!”
“그리고 나르샤, 발키리 누님, 여대생은 커스 아처 맡아주고.”
그 말에 발키리 아주머니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나르샤 누나는 덤덤한 표정이지만 긴장감은 숨기지 못했다.
조그만 실수가 곧 전멸로 이어질 테니까.
현역 여대생도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셋이서요?”
“응, 셋이서.”
“와, 고난이도잖아요.”
발키리 아주머니가 강하게 하르 창을 들더니 앞으로 나섰다.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죽을 판인데.”
“어글 먹고 피해 다니시는 편이 가장 좋을 겁니다. 나르샤가 더 잘 해줘야 해.”
“알겠어. 최대한 버텨볼게.”
“마지막으로 전사. 챠밍.”
“네, 말씀하시죠.”
“네.”
“미치광이 리치.”
이미 각오를 한 듯 둘 다 대답이 빠르게 나왔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알겠어요.”
이건 뭐 한 명, 한 명. 위험하지 않은 오더가 없었다.
전부 자기 몫 이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주호. 넌 나와 함께 데스 나이트부터 처리하.”
말을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마법진에서 소환되어 풀려난 해골병과 구울 수십 마리가 동시에 우리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죠!”
사탕 형이 제일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뜻밖의 스킬을 썼다.
【 하울링! 】
주변에 함성이 울리면서 몰려들었던 대부분의 해골병과 구울들이 사탕 형을 바라봤다.
거기다 바로 무기를 교체해 활을 꺼내 들었다.
그 상태로 달리면서 어글 스킬에 잡히지 않은 해골병과 구울들을 연속으로 풀링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그 모습에 사탕 누나가 자기 남친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면 말했다.
“저랑 사냥할 때 몰이 자주 해요.”
그럼 충분하지.
몰이고 사냥이고 둘이서 다 해야 했을 테니까.
사탕 형이 소환된 모든 몹을 달고 그대로 벽 쪽으로 달려나갔다.
확실하게 몹이 모이자 이쁜소녀도 그 뒤를 이어서 따라갔다.
저렇게 모아준다면 이쁜소녀도 제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저쪽은 일단 해결인가.
사탕 형의 멀티 능력으로 상황이 조금이나마 좋아졌다.
그리고 나르샤 누나가 사방으로 활을 쏴 커스 아처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으로 끝나면 이야긴 쉽다.
하지만 공격하는 동시에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야 한다.
일 대 다수의 전투.
혼자 감당하기엔 아무리 나르샤 누나가 잘하더라도 부담이 되었다.
그때 현역 여대생이 활을 꺼내더니 나르샤 누나처럼 커스 어차들에게 활을 쏘았다.
그것도 매우 정확하게.
아마 예전 대회 때는 활을 썼던가?
나르샤 누나와 현역 여대생이 위험을 나누어 가졌고, 발키리 아주머니는 화살을 쳐내면서 그 둘을 방어해 주었다.
다행히 어디 한 곳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는 상황이 좋았다.
다른 곳은?
시야를 돌리자 프로 형들이 아까 했던 것처럼 데스 나이트 한 기에 붙어서 사투를 벌였다.
전과 다른 것은 수호 형과 최종병기 형이 어지간해서는 밀리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 적응한 모습.
대단한 사람들이다.
딱 한 번 붙어보고 패턴을 익힌 것 같았으니까.
문제는 전사 형.
“갑니다.”
【 징벌의 사슬! 】
사슬로 미치광이 리치를 묶자 리치가 전사 형을 바라보면서 해골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검은 구 마법을 쉴 새 없이 날려댔다.
저건 준비 시간도 없는 건가?
한 발, 한 발이 다른 마법사들의 풀 차징 마법 수준이었고 전혀 멈춤이 없었다.
이에 전사 형은 검은 구 마법을 데스 나이트 쉴드로 막으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전사 형의 피부가 검게 변했다가 풀렸다가를 반복했다.
저주 방어?
데스 나이트 풀셋은 저주 방어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인지 상대의 저주 공격에 자연스럽게 저항하는 것 같았다.
혹시 저주 방어를 뚫고 저주가 걸리면 챠밍이 바로 저주 해제로 풀어주는 것을 반복했다.
프리로 남은 데스 나이트 하나가 전사 형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재중이 형이 재빨리 달려들어 창으로 한 대 치고는 바로 어글을 빼 왔다.
“그래, 이쪽으로.”
그대로 벽 쪽으로 뛰어 전사 형과 멀리 있는 곳까지 데스 나이트를 빼돌렸다.
“다른 애들 쓰러지기 전에. 이놈 최대한 빨리 잡아야 해.”
재중이 형이 데스 나이트 변신 주문서를 찢어버리자 거대한 스피어를 든 데스 나이트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심장을 돌렸다.
【 데스 나이트 변신! 】
스킬이 시전되자 시야가 붉게 변하면서 전의 그 데스 나이트 상태가 되었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
먼저 변신한 재중이 형은 똑같이 창을 들고 있던 데스 나이트와 창격을 주고받으면서 평수를 유지했다.
아무래도 변신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높아진 스탯에 아직 적응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확실히 해야겠지.
몸을 숙여 최대한 힘을 응축시킨 뒤 몸을 점프했다.
워낙 스탯이 높다 보니 순식간에 공동의 천장까지 몸이 떠올랐다.
여기까지는 원하는 대로.
몸이 떠 있는 동안 자세를 비틀어 몸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
머리가 아래로 오고 두 발이 오히려 위쪽으로 가게끔.
그리고 그 상태로 천장에 아예 두 발을 딛고는 몸을 다시 움츠렸다.
원래의 몸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묘기.
이 데스 나이트 스탯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해 해봤더니 역시 된다.
가장 높은 천장에 박쥐처럼 거꾸로 붙어 있는 지금.
천장 벽을 차고 점프해서 하강하는 힘과 데스 나이트의 무게로 찍어 누르면 과연 어떻게 될까?
후.
가보자.
폭발적인 다리 힘으로 천장 벽을 박차고 떨어져 내리면서 두 개의 데스 나이트 블레이드를 수직으로 겨누었다.
바로 지상에 있는 데스 나이트의 머리 위로.
“으얍!”
【 돌격! 】
심지어 가속 스킬까지 덧붙여서 최고의 속도가 나오게 만들었다.
쒜에엑!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
내 생각보다 몇 배는 빨리 바닥에 도달하는 느낌에 오싹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게 몸에 최대 가속이 붙은 상태로 재중이 형과 일전을 벌인다고 정신이 없는 데스 나이트의 정수리에 두 개의 데스나이트 블레이드를 동시에 꽂아 넣었다.
【 강격! 】
쿠앙!
마치 포격이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주변 공기가 폭발적으로 터져나갔다.
단 한 발.
데스 나이트로 변신했음에도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충격량이 어마어마했다.
그런 충격파에 몸이 튕겨 나가며 바닥에 거침없이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크윽.
적은?
어떻게 됐지?
폭발에 내 몸이 튕겨 나오면서 순간 데스 나이트를 놓쳤는데 고개를 돌려 바로 확인부터 했다.
그곳엔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진 데스나이트의 머리에 창을 찍어 누르고 서 있는 재중이 형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먹혔군.
그리고 날 보면서 환하게 미소 지었다.
데스 나이트 상태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나이스다. 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