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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97화 (197/1,404)
  • # 197

    #197화 유명세 (3)

    유혜선 팀장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말할 것이 있어 보이는 눈치다.

    역시, 무언가 아는 것이 있겠지.

    이쪽 바닥을 유혜선 팀장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니까.

    일단 여기서 대화를 끝내야겠다.

    기다리고 있는 사내에게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가 일행이 있어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아! 그렇군요.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데이트를 방해한 꼴이 되었군요. 그럼, 제 명함입니다. 한 번 꼭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마음에 드실만한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는 일이니만큼. 그럼.”

    여유.

    당당함.

    자신감.

    절제되었지만, 오랜 시간 몸에 밴 듯한 행동.

    가볍게 손을 움직여 명함 포켓을 꺼내는 동작부터 그것을 열고 명함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동작까지 보통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장소와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그가 행동하는 것에 집중하니 그런 것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표정이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와 가볍지만 강하고 짙은 눈빛.

    한순간에 이루어진 행동이었지만, 그 일련의 행동을 가만 살핀다면 누군가에게 본인을 낮추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부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쪽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느껴지니까.

    뭐, 첫인상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다만, 타이밍이 안 좋을 뿐.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질척거리는 것도 없고 깔끔하네.

    전에 PV의 그 과장이라는 사람은 피시방까지 찾아와서 엄청 귀찮게 했었는데 그에 비하면 정말 순순히 물러난 셈이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린가?

    사내가 돌아가고 다시 유혜선 팀장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응?

    “어디 안 좋아요?”

    “아뇨, 괜찮아요.”

    “얼굴이……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아! 아뇨. 그냥 그…….”

    “그?”

    “애인이라고 하고 가시…….”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문제지?

    “곤란한 상황에서 오해였긴 했지만, 순순히 물러가니 더 좋은 것 아닌가요?”

    그 말에 유혜선 팀장의 표정이 알아볼 수 없게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정말 묘한 표정이네.

    너무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어 읽을 수 없다.

    뭔가 잘못 말했나?

    표정 관리를 한참 하던 유혜선 팀장이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말을 꺼냈다.

    “하아, 진짜…… 뭐, 됐어요. 저도 뭐, 그렇게 생각한 것 아니었네요.”

    그 말과 함께 유혜선 팀장이 옆에 있던 와인을 원샷…….

    정말 실수했나 보네.

    잘못한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어쩌라고 하더라?

    재중이 형이 말을 해줬는데…….

    막상 닥치니 생각이 안 난다.

    어렵네.

    진짜.

    ***

    “우리 DS나 PV는 아실 거고, 이번에 이쪽 사업으로 세 개 대기업이 더 끼어들었어요.”

    “세 개나요?”

    “네, 동시에 뛰어들었어요.”

    “기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따라잡히는 건가요? 한 번에 세 곳이나 뛰어들 정도로 만만한 사업은 아닐 텐데요.”

    이쪽으로 문외한이기는 해도 기술 축적이나 노하우, 특허 등이 있어 갑자기 끼어드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안다.

    당장 DS만 하더라도 PV에 기술력이 뒤져서 매번 고전하지 않았나.

    내 덕분에 그 격차를 거의 따라잡았다고는 해도 규모 면에서는 아직도 차이가 난다고 들었다.

    기술력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까.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해왔을 거예요. 돈이 되는 사업이니까요. 사실, 승호 씨가 아니었다면 4세대 VRS 시장이 PV의 독점이 됐을 수 있어요. 우리가 부랴부랴 준비해서 출시하기에는 기술이 너무 밀렸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런칭하는 나머지 세 곳도 사실 우리와 기술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거예요. 해외 VRS 회사들하고 기술 제휴를 상당히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뭐, 그래 봐야 어차피 우리와 동시에 런칭을 못해서 밀려났죠.”

    “으음, 이거 제가 DS를 완전히 먹여 살린 것 아닌가요?”

    선두 그룹에 올려줘…….

    후발 그룹하고 격차도 벌려줘…….

    이 정도면 정말 죽어가던 회사를 살려낸 것이나 다름없다.

    “네, 그래서 회장님이 승호 씨가 해달라는 부탁은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주실 거예요. 전에 아라 양 때문에 앞을 막아서도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 봤죠? 보통 그러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거기다 충분히 금전적으로 보상이 되도록 준비를 하고 있고요.”

    전에 말한 광고라든지 후원이라든지 다 연장선인 모양이다.

    “으음, 가령 예를 들면 당장 스포츠카가 한 대 필요하다 그러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리즈 별로 한 대씩 전부 가져다줄 걸요?”

    “하하…… 농담인가요?”

    “아뇨, 그 정도로 해줄 수가 있는 상황이죠. 지금은요.”

    “……앞으로 더 세게 불러도 되겠네요.”

    “네,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면 제가 정리해서 처리해 드릴게요.”

    이거 농담이 아니네.

    “뭐, 천천히 생각할게요.”

    내가 질린다는 제스처로 웃어 보이자, 유혜선 팀장도 방긋 따라 웃었다.

    뭐든 다 해줄 수 있다는 그런 표정이라.

    생각보다 통을 키워야 할…….

    “그럼, 아까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뻔하겠네요.”

    “네, 누군지 알아요. 현재 재계 서열 2위 T 그룹 회장 직계에요. 엘리트 교육 쭉 밟고 왔고, 해외에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일을 배운다고 하던데 어느새 본부장이네요.”

    “하, 어쩐지 너무 젊다 했어요.”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저 나이에 그런 직책까지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초특급 낙하산 중에서도 최고급이겠지.

    “타고난 금수저네요.”

    “으음, 저 정도면 다이아몬드 수저쯤?”

    유혜선 팀장의 농담에 그저 웃어버렸다.

    다이아몬드라…….

    그러니 그런 여유가 나왔겠지.

    “그럼, 저쪽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볼까요?”

    그 말에 유혜선 팀장의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약간은 떨리는 그런 목소리로.

    “……마음대로 하세요.”

    “어? 안 말리는 건가요?”

    “저희가 을이라서요. 하신다고 해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요.”

    이런 너무 놀렸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저 그렇게 앞뒤 없는 놈은 아니에요. 지금처럼 대우가 나쁘지 않다면야, 그리고…….”

    어쩌면 아직도 VRS를 못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은 그냥 넘겼다.

    유혜선 팀장에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해서 내 가치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뭐, 전 그쪽이 마음에 들거든요. 편하기도 하고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당분간은.”

    아라 문제도 있고, 당장 내가 손 떼는 것은 아쉽지.

    내 말에 유혜선 팀장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변하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런 반응이라니…….

    다른 쪽에 가진 않는 다는 말이 그렇게 기쁜가?

    “저기요?”

    “네?!”

    엄청나게 당황한 목소리로 고개를 드는 데 정말 발갛, 아니 빨갛다.

    아까 한잔 거하게 마시더니 올라오는 모양이네.

    “이제 일어나죠. 더 있다가는 곤란하겠네요. 바쁜데 데리고 나와서 너무 데리고 있었어요.”

    “네, 아! 맞다.”

    또 뭐가 있었나?

    잊어먹은 것을 방금 떠올린 듯 유혜선 팀장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PV에서 반격이 있을 거예요. 게임 안에서요.”

    “네?”

    그게 무슨 소리지?

    ***

    유혜선 팀장과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어느새 어둑한 밤거리로 변해 있었다.

    어차피 점검이라 하루 종일 할 일도 없었는데 잘됐네.

    이유는 대충 감이 잡힌다.

    우리가 네임드 두 마리를 싸움 붙여놓아 그것으로 엄청 바빠진 모양이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우리가 나오자마자 바로 점검을 시작했을까.

    딱히, 그것에 대해 패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동안 산적한 문제가 꽤 많이 있었다.

    “으음, 아까 말하는 건 다 들어준다고 했던가요?”

    “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요.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그냥 타고 다닐 차가 한 대 필요해서요. 아까 말한 시리즈별로 다 보내고 그러진 말고요.”

    “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따로 원하는 회사나 차종이 있으세요?”

    유혜선 팀장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으음, 그냥 혼자 타기 좋은 용도였으면 좋겠네요. 아, 가끔 뒤에 누굴 태울 수도 있을 테니 뒷좌석은 있었으면 하네요.”

    “네, 그럼 쿠페 형식으로 알아봐 드릴게요. 차 지붕 열리는 거 좋아하세요?”

    “지붕요?”

    “네, 오픈카요, 컨버터블이라든지.”

    “아, 그건 뭐, 굳이 안 그러셔도 될 것 같아요.”

    “차 문이 위로 열리는 건 어때요?”

    “……뭐, 그건 알아서 해주세요. 딱히 취향이 있고 그런 건 아니라서.”

    유혜선 팀장이 그 밖에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어느 정도 차종이 좁혀졌는지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아마, 국내에 들여오려면 좀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최대한 빨리해준다니까.”

    “대체 뭘 말씀하셨길래.”

    “그건 서프라이즈로 남겨둘게요?”

    “하하, 네. 그럼 기대해보죠.”

    “세금이나 보험, 유류비 전부 이쪽에서 처리해 드릴게요. 그냥 타고만 다니시면 돼요.”

    “편하네요.”

    “승호 씨는 게임만 잘하시면 돼요. 다른 건 신경 안 쓰도록 해드릴게요.”

    그러면서 유혜선 팀장이 날 보면 방긋 웃었다.

    네온사인에 비친 보랏빛 헤어가 빛에 반사되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매번 고맙습니다.”

    “헤, 그럼 담에도 맛난 것 좀 사 줘요.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 해서요.”

    “하하, 네. 그럼 다음에 뵙죠.”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해서 내린 뒤 유혜선 팀장이 떠나는 것을 보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외곽 현관문에서 누군가가 오도 가도 못 하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응?

    누구지?

    설마 진짜 찾아온 건가?

    요즘 운영자들에게 생고생을 시키다 보니 그 생각부터 바로 들었다.

    우리 집 주소를 알 만한 사람은 운영자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실루엣을 보니까 다행히 아는 사람이다.

    고개만 기웃거리는 여자아이.

    “연지야, 너 여기서 뭐 하냐?”

    내 말에 현관 대문 앞에서 화들짝 놀랐는지 어깨가 확 올라간 연지가 후드를 내리고 날 바라봤다.

    “에헤헤, 오셨어요?”

    “너 대체 여기서 뭐 해?”

    이 시간에 얘가 여기 왜 있지?

    아직 날이 풀렸다고 해도 저녁엔 춥다.

    문자나 전화를 할 것이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아, 옆집이 친구 집이에요.”

    “옆집?”

    “네, 옆집.”

    ……전에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에 없어서 잘 모르겠다.

    뭐, 사람이 많이 사는 아파트니까 친구가 있을 수 있겠지.

    우연치고는 있을법한.

    그러고 보니 옆집에 누가 살더라?

    이것도 기억에 없다.

    내 상황도 참 애매하고 어이없구나.

    당장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니.

    “으음, 저 들어가도 돼요? 차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아, 미안. 들어가자.”

    기다린 사람을 세워두는 것이 예의는 아니지.

    아직 저녁은 쌀쌀하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의 혼자 사는 남자의 딱 그런 풍경이 나왔다.

    “……오빠, 청소 잘 안 하는구나?”

    “아, 요즘 좀 힘들어서.”

    정말 나오면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니까 좀 문제다.

    유혜선 팀장 말대로 식단 조절을 하면 괜찮아지겠지.

    연지가 내 말에 그냥 대뜸 돌아다니면서 청소를 시작했다.

    “어? 그냥 놔둬. 괜찮아.”

    “제가 안 괜찮거든요.”

    그러면서 여기저기 쓱쓱 치우기 시작하는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잘하네.”

    “귀한 딸은 아니죠. 아빠가 어지르고 다니는 거 치워 봐요. 금방 늘어요.”

    뼈가 있는 말이네.

    차 한 잔 대접하려고 했는데…… 이거 오히려 내가 대접받는 기분이다.

    “저녁은?”

    난 먹고 왔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시간이 애매하니까.

    “으음, 좀 빼야 해서 괜찮아요. 차 한잔하면 되니까.”

    “……뺄 데가 어딨다고.”

    지금도 여고생 수준에선 관리가 잘 된 것 같은데?

    “‘누구들’하고 같이 있었더니 피곤하네요.”

    그런 말을 하더니 곧장 연지가 한숨을 쉬었다.

    …….

    누구들?

    “아, 그리고 오빠 사인 좀.”

    그 말을 하면서 대뜸 하얀 용지들을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왜 이렇게 많아?”

    “우리 반 친구들 거요.”

    “……반 친구?”

    “네, 오빠랑 아는 사이라고 하니까 이렇게 되네요.”

    “아, 그럼 옆집에 온 것도?”

    “겸사겸사.”

    그러면서 힘들다는 듯 소파에 고개를 푹 누르고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어이, 어이…….

    교복 입은 여고생이 함부로 남의 집 안에 와서 드러눕다니.

    그렇게 드러눕더니 내게 고개를 내밀었다.

    재밌다는 표정을 가득 짓고서.

    “오빠 학교에서 완전 인기 많은 거 알아요?”

    “……뭐,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짱 많음.”

    ‘짱 많음’이라니, 이런 말투는 적응이 안 된다.

    “완전 연예인 저리가라에요.”

    “그렇다고 하더라…….”

    “그래서 저 부탁 하나 해도 돼요?”

    “응? 부탁?”

    “저, 로스트 스카이 좀 가르쳐주면 안 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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