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예일 컴백1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얼마 뒤, 윌슨에게서 전화가 왔다.
"프랑스 여행은 어땠나? 엘리는 잘 있고?"
"생각보다 잘하고 있네요. 빛의 마리아는요?"
"빛의 마리아 V는 잘 건조 중에 있어. 반년에서 일 년은 말려야 되지만 그쪽에서 알아서 관리하겠지. 그러라고 있는 전문가들이니."
"다행이네요. 어쩐 일로 전화 주셨어요?"
"일 얘기지. 빌바오의 원을 풀어줬으니 이제 우리도 투자한 만큼의 수익을 올려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아."
"팔기도 했고 대여도 해서 돈은 벌고 있지만 개인 컬렉터에게 판매하는 것만큼의 수익은 나오지 않으니까. 지금 빛의 마리아를 사겠다고 나선 곳이 한둘이 아니야."
"그래요? 누구예요?"
"먼저 다움에서 크게 배팅을 했지. 조건은 있지만."
"얼마길래요?"
"4백만 달러."
"그렇게나 올랐어요?"
"코헨이 예일 미술 협회 전시회 때 밝혔던 작품가가 그냥 시장가가 되어 버렸지. 내가 살짝 양념을 치기도 했고."
"놀라워서 말이 안 나오네요. 그렇게 뻥튀기가 가능한 거였어요?"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시장가야. 없으면 내려가는 거고."
"또 다른 곳은요?"
"코헨은 4백만을 불렀지만 결국에는 5백만 불에서 거래될 듯해. 루브르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거긴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아. 아마 빌바오 수준에서 거래될 가능성이 높아. 물론 여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되는 고객이야. 자그마치 루브르인데. 작품을 안겨주는 게 무조건 남는 장사야."
"다움의 조건은 뭐예요?"
"조건은 두 가지야. 하나는 자네가 그릴 빛의 마리아 시리즈 중에서 자신들이 제일 먼저 작품을 선택할 권리를 갖는 게 하나고."
"다른 조건은 좀 특이한데, 무조건 200만 불은 이 거래와 상관없이 자네에게 주는 조건이야. 즉 내 수수료는 없다는 거지."
"아, 오해하지 말게. 이는 정당한 거래였고 내가 받아들인 조건이니까. 전에 받은 그림 값이라고 하던데, 내가 모르는 사연 같더군."
태호는 서현의 초상화를 그려준 일을 설명해 줬다.
"2백만 달러도 헐값이었군. 쯧쯧. 뭐, 그쪽이 자네 그림을 첫 구매한 고객이기도 하니 싸게 넘길 수도 있지만... 그래 그렇게 정리하지. 그 집안 아니면 누가 사겠나?"
윌슨은 찐한 아쉬움을 보이며 그림에 대해 궁금해했다.
"찍어 놓은 사진도 없어요. 걔에게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알았네. 내 더 이상 안 물어보지."
다른 뉴욕의 미술계 얘기를 하던 윌슨의 대화의 주제는 빛의 마리아로 돌아왔다.
"총 몇 작품이나 그릴 생각인가?"
"다섯 작품이오."
"세 작품 아닌가? 다움이 하나 가져가고, 코헨이 하나, 루브르에도 하나 줘야 되고."
"학교에도 하나 기증이나 장기 임대해야 될 것 같아요."
윌슨은 혀를 찼다.
"완전히 칼만 안 들었지 강도들이군. 무슨 조건을 걸었는데?"
"그림만 넘기면 명예박사 학위라도 만들어줄 기세던데요? 전체 등록금 감면 포함해서요. 아트 수업도 두 개 면제해 준다고..."
"태호, 네가 그 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해 주는 것만으로도 학교는 자네에게 고마워해야 돼. 그럼에도 그림을 공짜로 가져가겠다고 하다니! 이 먹물들, 사기엔 도가 텄어."
윌슨의 목소리에서 선명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럼 네 작품 아닌가? 다른 하나는?"
"이렇게 많이 그리는데 제가 소유한 작품도 하나 있어야 될 거 같아서요. 좀 특별하게 제작해 보려고요."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절대로 공개하지 말고 그대로 갤러리로 가지고 오게. 쉽게 생각해도 이천만 달러 짜리 그림들이야."
"자네는 지금 손으로 돈을 그리고 있다고. 도둑이라도 들면 큰일 나고. 그림이야 다시 그리면 되지만 자네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큰일이니 보안에 더 주의하게. 아니지. 내 조만간 작업실에 찾아가 점검을 해야겠어."
*
한 달 후 찾아온 윌슨은 수천 달러를 들여 문부터 창문까지 모든 곳을 손봤다.
집 주인은 좋아서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
뉴욕으로 돌아온 태호는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학교 근처로 돌아왔다. 작업실에는 결국 침대까지 들였다. 엘리의 체취가 많이 남아있어 태호를 감성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지만 곧 이겨냈다. 태호는 기숙사는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작업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주말을 이용해 파리로 번개도 다녀왔다. 두어 번 갔다 온 후 엘리는 파리로 날아오는 태호를 말렸다. 그림 작업으로 바쁘다는 걸 알고 난 후였는데, 엘리도 여러 스케줄로 바빠져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
개학 이후 처음으로 방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들 집에 자기 차가 없는 녀석들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제일 가까운 데에 사는 데이비드가 총대를 메고 집에서 링컨 타운카를 몰고 왔다. 이 집안은 어지간히 링컨을 좋아했다.
태호가 작업실에만 있으니 데이비드가 기사 노릇을 했다. 순간 앞 좌석에 누가 앉았을까 궁금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난 태호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일단 기숙사 방돌이 기준 꽤 먼 길 (그래봤자 10km안)을 와준 녀석들을 환영했다.
“먼 길 와줘서 고마워. 나 없이 외로워서 매일 밤을 눈물 없이 보내고 있지?”
한동안 기숙사에도 안 돌아가고 그림을 그릴 시기였다.
“아닐걸? 데이비드가 방에 여자를 데려오기 시작했는데?” 파블로가 말했다.
“야!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여자를 데려와?” 데이비드가 소리쳤다.
“너 무슨 오리발을 그렇게 내밀어? 둘 신음 소리가 기숙사 복도에 다 울려 퍼졌는데?” 조지오가 팩폭을 날렸다.
“으악! 빌어먹을 방음!”
데이비드가 절망하거나 말거나 조지오는 신경도 안 쓴 채 말을 이었다.
“엘리는?”
“프랑스에.”
“아직 사귀어?”
“얼마 전 파리 갔다 왔다.”
“그래? 생각보다 오래가네. 떨어져 있는데.” 역시나 조지오는 자기 할 말만 했다.
“너 없으니까 그래도 보고 싶더라.” 역시나 인간처럼 말하는 건 유스케밖에 없었다.
“우린 너 같은 기사가 필요해. 데이비드 정말 운전 못해. 올 때 몇 번이나 사고 날 뻔했어”
아, 이놈도 배신이다.
세토스는 마치 자기가 올 곳이 아닌데 왔다는 듯이 계속해서, “얼른 보고 나가자!”를 외쳤다. 나가서 술 먹자는 얘기였다. 나이가 안되는건 생각도 안했다.
태호는 일단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 밥을 먹여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우리 너네 집에서 자고 갈 건데?” 데이비드가 얘기했다.
“엘리 파리 돌아갔다며? 잘 공간 남을 거 아니야.” 파블로가 첨언했다.
그렇다. 오늘이 토요일인 줄도 모르고 태호가 그림을 그린 것이다. 수업은 최대한 줄였기에 학교도 대충 가고 작업실에만 살다시피 한 통에 요일 개념도 희박해졌다.
“어쩐지 오늘 길거리에 학생 아닌 사람들이 많더라니.” 태호가 중얼거렸다.
놀러 온 다섯 명은 술이 떡이 되도록 먹은 후, 작업실에 다 토해 놓고 온갖 민폐를 다 끼치고 돌아갔다. 그것도 일요일 오후에나 말이다.
*
다섯 작품을 동시에 작업을 하긴 했지만 건조 시간을 고려해 작업을 하였기에 그렇게 제작 시간이 지체되지는 않았다.
1.3m x 1.6m 사이즈는 될 법한 큰 캔버스 5개에 작업을 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작업을 진행했다. 태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에 투자했다.
그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토요일에는 작업실에서 자고 갔지만 일요일도 체력이 허락하면 작업했고 아니면 쉬었다.
아침마다 30분씩 조깅을 해서 체력을 관리하고 있지만, 하루 8시간 이상을 그림에 투자했기에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강행군이었다. 태호의 숙련된 솜씨에 이런 강행군이 합쳐져 그림이 제작되는 속도는 태호의 예상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태호의 이번 빛의 마리아 시리즈는 전작들과 달랐다. 금색과 흰색의 물감을 많이 썼고 명암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끔 구도를 조금씩 변경했다. 즉 원작보다 어두운 부분이 더 많았고 그렇기에 밝은 부분이 훨씬 더 강조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신의 얼굴 뒤에 위치한 광배 같은 밝은 빛무리다. 앞쪽 시리즈가 광배 없이 전체적으로 밝았다면, 이번 작품들은 머리 뒤에 황금색의 빛무리를 두어 구도 내에 단 하나의 광원을 두었다.
그 빛은 찬란히 빛나며 여신을 감싸고 어둠을 몰아내는 듯한 효과를 보이게 만들었다. 좀 더 고급스러웠다. 성당에 걸어놓으면 모든 사람이 성호를 긋고 지나갈 것 같이 보였다.
여전히 자애롭지만 한편으로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눈동자와 구원을 약속하는 듯한 입모양은 원작과 똑같았지만 말이다.
태호가 제작한 작품의 백미는 바로 태호가 가지고 싶어서 제작한다고 밝힌 작품이다.
노란 물감 대신 금박(Gold Leaf, 22K)과 금으로 만든 물감을 사용했다. 금박은 10 cm x 10 cm에 2천 원 정도로 비싸지는 않지만 작품 제작 과정에서 손실되는 부분이 상당하기에 많은 양의 금박이 필요했고, 금 물감은 금박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
무엇보다 금박을 입히는 방법이나 금 물감을 만들어 쓰는 것은 손이 많이 갔다. 그래도 태호는 모마 (Moma, 뉴욕 미술관)에서 본 클림트 그림에서 느꼈던 감동을 빛의 마리아에서도 구현하고 싶었다. 정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태호는 빛의 마리아 다섯 작품을 1월 1일 첫 동이 떠오를 무렵에서야 완성했다. 자그마치 총 4개월간의 강행군 끝에 완성한 작품들이다.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본 후 태호는 침대에서 이틀을 기절하듯이 내리 잤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도 정말 대충 봤다. 겨울방학이지만 한국에 돌아가지도 않았다. 엘리가 프랑스에 있다는 것을 안 서현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작업 중이라 못 돌아간다는 말만 하고 다음부턴 받지도 않았다.
서현이 엘리에 대해 알 정도면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지만 태호는 작업에 정신이 팔려 신경을 못썼다. 엘리는 작품을 마무리할 때까지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지난 11월 중순부터 연락도 거의 없었다.
태호는 완성한 다섯 작품을 작업실에서 멍하니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앞선 빛의 마리아는 빌바오에서 늘 봐왔기 때문에 작품을 떠나보낸다는 생각이 적었는데, 지금 완성한 이 작품들은 하나 둘 팔려나가 세계의 미술관이나 개인의 서재 등에 걸릴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한자리에서 볼 기회가 없을 테니 말이다.
다섯 작품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부러 다르게 그렸다. 금색과 흰색 물감의 사용량에 따라 어떤 작품은 조금 더 경건하고, 어떤 작품은 조금 더 화려했다.
가장 노란색 물감을 많이 사용한 작품은 분명히 먼저 선택되거나 제일 비싼 가격에 팔릴 것 같았다. 돈과 황금을 좋아하는 개인이 구매한다면 말이다.
*
윌슨에게 작품의 완성을 알리자, 다음날 커다란 현금 수송용 차량과 경찰 SWAT 팀 (경찰특공대)을 연상시키는 사설 보안업체 직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윌슨의 입에서 '마이 프레셔스'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림이 안전하게 썬 갤러리에 옮겨지자, 태호가 금박을 입힌 작품은 따로 보관하고, 윌슨은 바로 다움에 전화를 걸어 작품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친절하게 도록까지 만들어 DHL로 보냈다. 만들어진 도록은 썬 갤러리의 모든 고객에게 전달되었다. 판매할 작품이 남아있지 않음에도 마케팅을 위해 뿌린 것이다.
이틀 후 썬 갤러리의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렸다. 갤러리 근처 도로는 주차를 하려는 차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불법 주차를 단속하기 위한 경찰차들도 평소보다 2-3배 많았다.
윌슨과 제시카는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하루 종일 손님을 받거나 전화를 받다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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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일주일 후, 김 유미 관장이 개인 비행기 편으로 뉴욕에 왔다. 서현도 같이 왔는데, 태호를 만나지는 못했다. 한 학기를 불살라 그림을 그렸기에 피로가 누적되어 뻗어버렸다.
서현은 태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속으로만 삭혔다. 아무리 가깝다지만 코네티컷에서 여기까지 차로 2시간이고, 자신도 말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차로 금방이니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엄마에게 내비쳤지만 김 관장은 모른 척했다. 서현은 태호의 주소도 모른다.
예일이라는 것만 알지만 그것만으로 찾기란 불가능했다. 전화번호는 있지만 이미 안 받은 지 오래다. 서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김 관장의 가슴도 아팠다. 그래도 딸의 연애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제일 화려했던 빛의 마리아가 비행기에 실려 한국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