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뉴욕 생활3
태호는 호텔 컨시어지를 통해 예약한 꽤 괜찮은 프랑스 레스토랑에 애나까지 데리고 갔다. 다행히 호텔 근처였다. 두 사람에 방해가 될까 자리를 비우려는 애나를 잡아두고 셋이 식사를 했다.
“엘리 때문에 수고하는 거 아니까 같이 식사하고 가요. 궁금한 것도 있고요."
태호는 엘리의 파리 생활에 대해 물어보고 힘든 점은 없는지 어려운 점은 없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나서야 아까 엘리의 얼굴이 왜 어두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텃새와 워킹이 문제였다. 갑자기 굴러온 돌인 엘리가 자신들과 동급으로 대우받는 것도 아니꼬운데 워킹까지도 못해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엘리도 그 X자 모양의 워킹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상당히 까다로웠고 은근히 몸치인 엘리가 단숨에 익히기 어려웠기도 했다.
몇 번 실수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될 거 같아 엘리는 일자 워킹을 했는데 또 다른 왕따의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태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허우적대는 워킹이 정상이었다고?”
“푸흡.”
애나는 마시던 물을 코로 뿜었고, 엘리는 큭큭 하고 웃다가 결국 빵하고 터졌다.
“내 말이 맞잖아! 세상에 누가 그렇게 하고 걸어 다녀? 술 취했어? 발이 X자로 꼬인 거야? 그러면 옷이 더 이뻐? 자연스러움을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 옷을 입으면 그렇게 길거리에서 허우적거리고 다녀야 되나? 누가 만든 법이야?”
한참을 웃다가 마지막에는 컥컥대던 엘리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태호의 말에 동의했다.
“아, 정말 네 말을 여기 모델들이 들어야 되는데."
“내가 여기 프랑스 방송국 가서 싹 퍼붓고 갈까?"
“참아. 괜한 논란만 불러일으킬 뿐이야."
“필요한 논란은 불러일으켜야지. 그 같잖은 녀석들을 물고 뜯고 씹어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되지 않겠어?"
“와. 네가 원래 이렇게 다혈질이었어?
“필요할 때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뭘 더 못하겠어.”
태호는 러블리 모드로 얼굴 표정을 바꾸고 사랑을 듬뿍 담아 엘리를 쳐다봤다.
이 닭살 돋는 커플 앞에서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먹던 애나는 속에서 쓴 커피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이 고문을 받는 것 같은 시간들이 후딱 지나가길 기다렸다.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엘리는 애나에게 살짝 눈치를 줬고, 애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태호가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었다.
둘은 호텔 근처의 아케이드를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을 멈춰서게 한 건 엘리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좀 드문 곳이였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태호의 팔을 가슴에 꼭 밀착한 엘리가 애틋하게 말했다.
"오늘은... 나와 같이 있어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엘리가 결심이 선 듯 말했다.
"하지만 엘리, 내일..."
"패션쇼던 뭐던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여기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해."
그리고 엘리는 태호에게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사랑해. 죽을 만큼."
"..."
이후 둘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흥분해서 방으로 직행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봤다면 둘이 왜 저러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눈엔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았다.
호텔 방에 들어온 둘은 서로의 옷을 정신없이 벗긴 후 상대의 몸을 탐닉했다.
그날 밤 둘은 일 년 동안 누적되어 있던 욕망을 다 풀어버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둘은 붙어 있었다.
*
파리에서 3박 4일을 보낸 태호는 밤 비행기로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첫날 샤넬 무대에 선 엘리는 둘째 날은 발렌티노, 셋째 날은 디오르 무대까지 섰다. 경력하나 없는 초짜가 서기에는 너무나 큰 브랜드였기에 태호는 엘리의 에이전트가 가진 파워의 대단함과 더불어 뭔가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이 뭔가 너무나도 잘 풀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게 많지 않았던 태호는 엘리를 모든 것이 잘 풀리기를 바라며 뉴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태호가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떠난 밤.
런던에서는 한 고등학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찾았다, 이 도둑놈.”
뉴욕과 런던에서 톱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크리스티 와드는 우연히 Faceless 기사를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덤으로 평생 본 적이 없는 다큐멘터리까지 봤다.
데뷔 초기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을 꼬드겨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아니 사진작가인 줄 알고 있었던 화가.
어린 자신에게 그 야한 포즈를 하게 만들고 사진을 찍어댔으며, 나중에는 자신을 떡 주무르듯 하며 키스신과 페티시 사진을 찍은 변태이자 소아 성애자.
손가락은 어디다 뒀는지 자신이 보낸 이멜은 답장도 하지 않는 게을러터진 인간.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을 훔쳐 간 도둑놈.
온갖 수식어가 많았지만 나중에 남은 단어는 도둑놈이었기에 크리스티에게 태호는 도둑놈으로 불렸다.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도둑놈이 뉴욕에 있다는 걸 안 순간 크리스티는 에이전트에 전화를 걸었다.
“제인. 런던에서 있는 공연 다 취소하고 뉴욕 쇼만 잡아줘.”
“갑자기 왜? 쇼는 당장 이번 주부터 시작이고 10월 초까지는 네 스케줄이 다 잡혀있어서 안돼.”
“정말 안돼?"
“정말 안돼!"
“그럼 다음 시즌부터는 뉴욕 패션쇼 위주로만 잡아줘."
“그렇게 서두르지 않기로 했잖아. 두 곳 다 골고루 하려던 게 네 계획 아니었어?”
“그랬지.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어."
“그러니까 왜 바뀌었냐고."
“그 도둑놈을 찾았거든."
“어떻게 찾았는데?"
"텔레비전 보고."
“끊어서 얘기하지 말고 그냥 끝까지 얘기하면 안 돼? 왜 이렇게 말이 단답형이야."
“까칠하기는. 지금 BBC를 틀면 다큐멘터리를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동양인 화가. Faceless를 재탄생시켰다는 그 놈이 도둑놈이야."
“정말? 기다려봐. 보고 연락 줄게."
10분 후에 전화벨이 울리자 크리스티가 받았다.
“그 엘리가 전에 미국에 있었구나. 예일대 학생인 줄도 몰랐네."
“엘리? 엘리가 누구야?"
"네 도둑놈 여자친구."
크리스티는 여자친구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뭐 하는 여자야?"
“지금 파리에서 가장 핫한 여자. 외모면 외모, 지성이면 지성, 하나도 빠지지 않는 미스 프랑스 출신의 모델. 올해 SS 시즌 파리의 톱 티어 무대를 다 차지한 신예. 지금 파리 패션가에서 저 여자를 무대에 세우려고 난리도 아니라고 들었다.”
“뭬야?"
“너 같은 미 성숙 고등학생이 아닌 글래머 미인에 이번 SS 무대만 지나면 방송과 영화계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블루칩. 둘이 저렇게 같이 있으니까 정말 끝내주게 멋져 보인다. 저렇게 둘이 같이 붙어 다니는 거 보면 동거도 했겠지? 얼마나 뜨거운 밤을 같이 보냈을까? 와. 저 남자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봐라. 오우. 내가 옆에 있고 싶네. 아우 달달해.”
“악!!!!!!!!!!!!!”
“아우 깜짝이야. 야밤에 왜 소리치고 지랄이야!”
“뭐라고 하는 거야, 난 심각해 죽겠는데!!!!"
“내 말은 남자에게 한눈팔지 말고 조신히 경력을 쌓다 보면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저 여자는 넘사벽이야. 맘 고생하지 말고 일찌감치 접어."
“제인. 저 남자보다 괜찮은 남자를 내가 어떻게 찾아? Faceless 재탄생 시킨 천재화가가 굴러다니는 돌덩어리야? 툭 차면 나와? 그럼 하나 소개시켜봐봐. 그럼 나도 접을 테니까."
“그 YBA라고 유명한 애들 있잖아."
"그게 뭔데?"
"Young British Artist (YBA). 젊은 영국 아티스트. 지금 영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예술인들."
"몇 살인데?"
"지금은 다들 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아닐까?"
“그 노땅들을 내가 어떻게 만나냐고. 그리고 외모가 비교가 돼?"
“넌 어차피 몇 년 있어야 만날 수 있으니까 좀 더 자중하는 게 어떻겠니."
“나 에이전트 바꾼다. 끝이야!"
“잠깐. 네 지랄맞은 성격 맞추는 에이전트는 런던 바닥에 나밖에 없다."
“그럼 성격 감추고 뉴욕에 있는 에이전트 구하면 되지."
“너 몰랐구나. 뉴욕에도 네 소문 다 퍼졌어. 나니까 네 옆에 있는 거야."
“뭐라는 거야! 사람 약만 올리고!!!"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내년부터 알아볼 테니, 사고 치지 말고 조신히 있어. 알았지?"
“그리고 나 SS 시즌 끝나면 뉴욕으로 건너가서 한동안 있다가 올 거야."
“너 학교 안 다니냐? 시즌 끝나면 학업에 매진할 생각을 해야지. 요새 나이 어린 모델 혹사한다고 말도 많은데, 공부도 안 하겠다고? 니가 제정신이니? 아니다. 너 원래 제정신 아니었지. 아무튼 넌 학교 가야 돼!"
“이건 학교 따위와 비교도 안되는 인륜지대사야."
"고삐리가 무슨 인륜지대사를 찾아.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는 고삐리를 예일대 천재가 잘도 좋다고 하겠다."
"옆에 저렇게 이쁜 여자가 가드를 치고 있는데.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해봐."
"저 엘리라는 여자 정보가 인터넷에 떴네. 여자 프랑스 소르본 대학 출신이네. 수재라고."
"저 정도되는 두뇌에 외모니까 태호라는 천재 화가 옆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네가 떡 하고 나타나면 태호라는 사람이 그냥 너 좋다고 물고 빨고 하겠어? 뭔가 매력 포인트가 있어야 될 거 아니야!"
"딱 봐도 학교 가방끈 긴 여자 좋아하는 스타일이구만. 제발 정신 차리고 학업도 신경 써."
크리스티는 팩트로 두드려맞다가 결국은 울어버리고 말았다.
“보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나, 도둑놈 보고 싶다고. 자그마치 2년이나 보고 싶었단 말이야. 겨우 어디에 있는지 알았는데 왜 보지 말라는 거야? 나, 보고 싶다고."
크리스티가 하도 서럽게 울어서 제인 도 결국은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내일부터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모델이 지금 울면 눈만 퉁퉁 부울 거 아닌 거? 그러면 욕은 자신이 다 먹고 말이다.
“결론은 뉴욕에 가야겠다는 말이잖아.”
“훌쩍. 응.”
“너 대학 갈 거지? 너 적어도 저 남자 잡으려면 대학은 가야 된다. 그러면서 옆에서 지켜보다가 골키퍼 없을 때 덮쳐야 그래도 희망이 있어.”
“훌쩍. 대학?”
“너 생각 안 해 봤냐?”
“훌쩍. 안 해봤어.”
“내가 볼 때 제일 가능성이 큰 건 네가 뉴욕의 패션 관련 학교를 갔다가 우연히 예일대를 방문하거나 아님 태호가 우연히 네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하던가. 뭔가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있어서 너랑 연결이 되어야 돼.”
“뭐가 그리 어려워?”
“그럼 쉬운 게 어딨어? 넌 지금 골키퍼 있는 골대에 공 차겠다는 애야. 노오오력을 해야지.”
“나 대학 보내려고 그러는 거지?"
“이거 아니어도 너 대학은 가야 돼. 적어도 입학은 해야 돼. 알았지? 안 그럼 넌 끝이다."
“공부는 할 테니, 뉴욕은 가게 해줘.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연락처라도 받아서 올 거야."
“일단 SS 시즌 끝나고 나서야. 나도 같이 가야 되고. 먼저 미술관에 연락해서 저 작가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해야 돼. 그냥 갔다가 헛걸음할 수도 있잖아."
“알았어. 고마워 제인."
“그래, 이 웬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