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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컴백2 (87/181)

87. 예일 컴백2

태호의 그림이 7백만 불에 팔렸다는 소식은 바로 뉴욕을 강타했다. 실제 지불한 값은 빛의 마리아 5백만 불에 전에 서현을 그려준 대가로 받은 2백만 불이지만, 소식은 그렇게 퍼졌다. 윌슨은 태호의 그림을 보고 기어이 4백만불에서 5백만불로 가격을 올렸다.

썬 갤러리에 있던 네 작품 중 한 작품이 사라졌다. 한 작품은 태호가 보유할 그림이라 공개도 안했다.

모두가 제일 구매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작품이 없어졌다. 그제서야 가격을 가지고 흥정을 하던 개인과 미술관은 발에 불이 떨어진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팔린 작품이 제일 탐내던 작품이기에 제일 비싸야 되지만 그 작품은 이미 팔려버렸고, 한 작품은 예일대에 기증할 거란 얘기가 돌자 그림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태호와 전화를 하는 윌슨이 한 말이다.

"제 그림 팔면서 가격이 미쳤다고 하니까 너무 이상한데요?"

"이 거래로 돈을 버는 내가 봐도 미친 짓이야."

"훗. 깎아주시게요?"

"내가 왜? 돈이 남아서 주체를 못 하겠다는데 좀 가져가 줘야지."

"어떻게 그 가격이 가능했던 건가요?"

"전에 얘기했던 데로 내가 더 이상 돈으로 살 수 있는 빛의 마리아는 없을 거라고 했거든."

"새로 그려 달라고 제안이 오면요?"

"아니, 그 이름을 못 쓴다는 거지. 달라질 건 없어. 크기에 변화를 주고 스타일에 변화를 주면 돼. 황금의 마리아, 진실의 마리아, 찬란한 마리아, 등등.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이지."

윌슨은 이름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네랑 나는 가격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라 세금을 걱정해야 돼."

"걱정하면 달라져요?"

"자네, 차 바꿀 텐가? 아니, 부동산 어떤가? 그래, 작업실. 지금 쓰는 작업실은 임시잖아. 제대로 된 작업실이 필요해. 법인 설립하고 자네를 대표로 올려야지. 세금 문제야 내가 봐줄 테니 먼저 건물부터 보자고."

결과적으로 법인은 설립이 되었고 태호가 받을 돈도 어느 정도 법인으로 흘러 들어가 세금은 줄일 수 있었다.

단 건물을 사지는 못했는데 첫째는 건물을 알아볼 시간이 없어서였고, 둘째는 건물을 사도 지금 쓸 일이 없었다.

물론 뉴욕의 부동산은 늘 오르기에 구매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전문 업체에 모든 걸 맡겨버렸다.

*

엘리에게서 연락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11월부터였고, 정확히는 SS 시즌이 끝나고 방송일과 영화 쪽 일을 시작할 거라는 연락을 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연락마저 거의 끊겼다.

태호는 빛의 마리아를 완성하기 위해 강행군을 하던 터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엘리도 '바쁠 테니 당분간 연락을 줄이자'라고 하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SS 시즌의 강행군을 생각해 보자면, 그 이후의 방송일과 영화 쪽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화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태호가 그림을 완성한 후 연락을 해도 응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락을 한 게 애나였다.

“태호 씨. 엘리 일로 전화하셨나요?”

“엘리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직접 물어보시는 게 나을듯해요. 내가 얘기하기에 좋은 주제도 아니고요. 나에게 전화를 한 거 보니 앨리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렇죠?”

애나에게 들은 내용대로라면, 엘리에게 그간 벌어진 일은 짧은 기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일이었다.

SS 시즌이 끝난 이후 방송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엘리에게 영화 시나리오까지 들어온 건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었다.

다만 이 시나리오가 문제였는데 너무나도 노골적인 베드신과 각종 성적 묘사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계속된 에이전트 대표이자 매니지먼트 대표의 설득에도 엘리가 완강히 거부하자 계약서를 들이밀며 영화 촬영을 종용했고, 나중에는 ‘그 동양인과는 잘도 붙어먹더니 왜 프랑스 영화는 못 찍는 거냐’는 폭언까지 해 엘리가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갔다.

그 후 계약 파기를 선언, 지금은 법정 싸움 중이라는 것이다. 전에 왠지 모든 게 쉽게 풀려 오히려 꺼림직하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혹시 이럴 목적으로 신인인 엘리를 그렇게 톱 티어 패션쇼에 데뷔시킨 건가요?”

“흔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에요. 여기도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놈들이 많은 동네라.”

“법정 싸움이라는데 엘리가 감당할 수 있나요?”

“잘은 모르지만 엘리 아버지가 고위직 공무원이래요. 싸울만하니 시작했겠죠.”

“그나마 다행이네요. 애나 씨는 괜찮나요?”

왠지 애나도 이 일의 희생양이 되었을 거란 생각에 태호가 물어봤다.

“엘리가 계약 파기를 선언하고 나서, 관리 부실이란 명목으로 같이 잘렸죠."

“아... 미안해요.”

“아니에요. 이 바닥 더러운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요. 오히려 용기 있게 엘리가 박차고 나간 게 드문 일이에요. 보통은 타협하거든요.”

“고마워요 애나 씨. 나중에 파리 갈일 생기면 술이나 한잔하죠.”

전화를 끊고 난 후 여러가지 다양한 감정이 칵테일 마냥 섞여서 미칠 것만 같았다.

엘리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어디가서 말도 못하겠고 답답한 마음에 점심부터 캠퍼스에 조깅을 시작했다. 술이 필요하지만 대낮이라 너무 일렀다.

*

지난 추수감사절.

얼마 전 추수감사절 때 데이비드는 다른 미국 학생들처럼 롱아일랜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의 여러 사용인들과 마련한 추수감사절 만찬을 온 가족이 모여 즐기는 날이다.

모처럼 대학병원 레지던트를 하는 형 로이까지 시간을 내 오래간만에 저택은 활기에 넘쳤다. 한참을 가족 근황을 얘기하던 데이비드네 가족은 이야기가 학교로 주제가 넘어갔다.

“이번에 태호를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걘 뭐 하니?” 엘리스가 물어봤다.

“빛의 마리아 제작한다고 바쁘데요. 거의 작업실에서 살더라고요."

“그럼 너 방 혼자 쓰겠네?”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생각한 데이비드는 말을 잘라먹고 본래 주제로 전환을 시도했다.

"그래도 잠은 방에서 자요."

"못 믿겠는데?"

"그 정도로 바쁘다는 얘기에요. 작업실에서 동시에 다섯 작품을 제작하고 있더라고요."

“아, 그때가 네가 차 가져가서 앞뒤로 다 찍어 먹고 들어왔을 때구나?”

마틴이 아들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다.

“여보. 그건 왜 나에게 먼저 얘기 안 했어요?”

“차 좀 찍어 먹은 게 뭐 대수라고."

엘리스는 마틴을 째려봤지만 마틴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이 제작하고 있는 그림들은 아직 미완성이긴 했지만 제가 봤을 때는 엄청난 대작이 될 것 같아요. 빛의 마리아V와는 느낌이 좀 달라서요.”

“무슨 말이야? 어떻게 느낌이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거지?” 로이는 예전에 한번 본 기억이 있는 Faceless를 기억하며 물어봤다..

“태호 설명으로는 빛의 마리아 V는 씨오 (Theo)의 의도에 따라 그린 그림이라면, 지금 자기가 그리는 그림이 씨오의 본래 의도에 더 가까울 거라고 하더라고.”

“씨오가 누군데?”

“아, Faceless 원작자. 그림 뒤에 있는 이름이라던데?”

“그 그림, 작자 미상 아니었어?”

“그건 잘 모르겠다. 걔가 씨오가 원작자라고 그러던데. 아명 같은 건가? 가명이나.”

“태호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로이가 호기심에 더 물어봤다.

“난 걔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걘 정말 자로 그린 듯이 직선과 곡선을 그려. 만약 날 그린다면, 몇 번의 라인만으로 내 얼굴의 특징이 다 드러나. 묘사 능력이 정말 탁월해."

"그리고 색을 정말 잘 써. 색의 강약으로 입체감 아니면 존재감을 표현하는데, 사람을 그리면 성격이 확 나오고 사물을 그리면 이 물건을 쓰면 어떤 느낌이 나겠다 생각이 들 정도야."

"무슨 말인지 알지? 딱 보면 사람이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물건이면 쓰임새를 알 수 있어. 그림인데 무슨 착시 효과가 난 것처럼. "

"제일 중요한 건 걔가 그린 그림은 무조건 갖고 싶어져. 그냥 보면 볼수록 저 그림이 그냥 내 거 같아. 아니, 내 거여야만 해. 딴 사람한테 주기 싫고 나만 볼 수 있도록 이렇게 감춰놓고 보고 싶다고 해야 되나? 소유욕이 끓어올라. 정말 마성의 그림이야."

"그래서 걜 아는 기숙사 애들이나 수업같이 듣는 애들은 걔 그림 한 장을 얻어보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야. 학교에 '걘 무조건 5년 10년 후에 뜬다' 이런 소문이 돌았거든. 지금은? 이미 떴어. 지금도 대단한데 다음 작품 발표하면 아마 더 난리가 날 거야.”

“잘생겼어?” 동생인 제마가 물어본다.

“걔 잘생겼어. 동양인들 기준에서의 잘생김이 어떤 건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냥 보편적인 기준에서 봐도 잘생겼어. 얼굴의 좌우 대칭이나 눈코입의 위치 크기 피부 톤 등등 말이지."

"사실 피부색만 놓고 보면 오히려 걔가 백인 같아. 기숙사에 유스케라고 일본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태호 보고 정말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꽃미남처럼 생겼다고 하더라. 일본 가면 방송 나와서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해도 엄청난 돈을 벌수 있을 거라면서."

"그렇게 잘생겼으면 한국에서 배우나 모델 하지 뭐 하러 공부하러 미국까지 왔데? 그것도 미술 이외에 들어야 되는 전공과목이 산더미고 학점 경쟁 때문에 졸업하기도 어려운데? 그냥 뉴욕대 적당한 캠퍼스 가서 쉬엄쉬엄 공부하면 되지." 제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모델이나 가수 제의도 많았는데, 자기는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 또 공부 쪽으로는 자기는 웬만한 전공 과목 수업은 한국에서 다 공부했던 거래. 실제로 얘기해 봐도 똑똑한 친구고."

"굳이 예일까지 왜 왔어?" 로이가 물었다.

“영국보다는 미국이 성공하는데 나은 환경이고 예일대란 간판도 필요하다더라.”

“여자친구 있어?” 제마가 물었다.

“학교에서 제일 핫한 퀸카랑 사귀었는데, 지금도 사귀는지는 모르겠다. 엘리가 프랑스로 떠났거든.”

“지금 없으면 됐어. 과거야 과거일 뿐이지.”

“아마 다음 학기에 정상적으로 학교 생활하면 걔랑 사귀려고 여자들이 줄을 설 거다.”

“그 여자친구랑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며? 옆에 여자들이 줄을 서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계속 사귀는 중이면 다른 여자와 못 사귈 테고, 그 여자랑 깨졌어도 맘 정리하는데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그리고 그렇게 쉽게 마음 정리하고 여자 바꾸는 남자라면 나도 별 관심 없어.”

데이비드는 자신 여동생을 위아래로 쭉 스캔한 후 말했다.

“니가 걔한테 관심 있는 게 왜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만... 너 정도로 될지 모르겠다. 엘리는 미스 프랑스 출신이자 파리 일류 대학 다녀. 어떻게 생겼냐면··· 엄마. 혹시 영화 라붐 알아요? 거기 여주인공으로 소피 마르소 나오잖아.”

“라붐? 그래 알지.” 대답은 마틴이 했다.

“엘리가 그런 느낌이 나.”

“어쩌라고? 지금 없다며.” 제마가 퉁명스레 말했다.

할 말을 잃은 데이비드.

"다음 봄 방학 때는 집으로 데리고 오렴.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엘리스는 여전히 태호에게 관심이 많았다.

*

작업실을 정리하고 학교로 돌아온 태호는 수업을 등록을 하고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작업실에서 나온 짐 때문에 방이 가득 찼다.

엘리와 있을 때 신혼 생활하듯 하나씩 둘씩 사다 놨더니 짐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월세형 창고를 하나 대여한 뒤 안 쓰는 짐들을 다 옮겨 놓은 다음에야 기숙사 방에 여유가 생겼다.

2학년 2학기 수업으로는 전공과목 이외에 여전히 불어와 이탈리아어를 했고 작문 (writing) 수업과 철학과 경제학 수업을 들었다. 불어와 이탈리아어는 쉬웠고, 경제학 수업은 암기과목이었다. 다만 철학과는 까다로웠으며 작문은 당연히 패스만 겨우 할 정도였다.

철학과가 까다로웠던 이유도 시험이 죄다 작문이었기 때문이다. 캠퍼스를 다닐 때 엘리가 없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지만 점점 익숙해져갔다.

엘리는 연락을 한지 한달 지나도록 아직 답장은 없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까지 연락이 없는 건 아마 전화번호가 바뀌었거나 전화기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메일도 역시나 답은 없었다. 이래서 롱디 (Long Distance, 장거리 연애)는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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