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celess2
태호는 그림을 완성하자 주위 지인들을 불렀다.
드립 커피 잔을 마련해 작업실에 가져다 놨다.
세계 3대 커피라는 자메이카산 블루마운틴, 하와이산 엑스트라 팬시, 예멘산 모카 마타리 원두를 조금씩 구해 놓았다. 상당히 비싼 커피였고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이 그림들을 자신과 즐길 지인들이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았기에 적정량을 구입했다.
김 교수와 강 교수가 얼마 뒤 방문했다.
찬란한 노란빛 명화로 가득한 작업실에서 마시는 향 깊은 원두커피의 맛은 쉽게 맛볼 수 없는 인생의 단맛이었다.
"네가 언젠가는 이런 그림을 그릴 거로 생각했었지. 미국에 가서 시작할 줄 알았어. 여기서 시작한 게 의외야."
강 교수는 뿌듯한 얼굴로 그림을 보며 말했다.
"Faceless에도 이제 얼굴이 생기는 건가? 얼굴선이 동양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아. 나중에 미국에 가서는 아마 서양인의 얼굴을 넣으면 정말 Faceless의 원래 모습이라고 해도 믿겠어." 김 교수가 말했다.
"자자. 우리 사진이라도 찍어두자고. 크게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서 보내줘." 강 교수의 말에 세 사람은 그림을 가운데에 두고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태호는 나중에 이를 출력한 후 액자로 만들어 보냈다.
*
윌슨에게도 사진을 보냈다.
다음날 작품에 대한 찬사가 적힌 이메일 답장을 받았다. 미국에 올 때 들고 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김 관장을 초대했다.
초대한 이유는 자신의 그림을 처음 사준 컬렉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비서를 작업실 바깥에 둔 관장은 태호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서현의 초상화는 치워 둔 작업실에는 두 개의 Faceless와 태호가 틈틈이 그려둔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지인들을 초대하며 커피를 내리는데 익숙해진 태호는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내왔다.
"고마워요."
김 관장은 대답하면서도 눈은 그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김 관장은 작업실 중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 맛있네요. 멋진 작품들에 둘러싸여 마시는 맛있는 커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에요."
"별말씀을요. 커피가 입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그동안 잘 계셨죠?"
"잘 있었어요. 미술관 일로 조금 바빴지만. 그 정도야 늘 있는 일이죠. 태호 군은 어찌 지냈나요?"
"저도 괜찮았어요. 대학 준비한다고 바빴고 이 그림들 그린다고 바빴죠."
"이 작품들을 제작한 계기가 있을까요? 전작이 불교적 색채를 진하게 가지고 있어 그쪽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김 관장은 살짝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태호에게 물었다.
"그 탱화도 어떤 끌림이 있어서 제작한 거고, 저 Faceless도 마찬가지예요."
김 관장은 태호의 얘기에 바짝 호기심의 안테나를 세웠다.
"어떤 계기로 그렸나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축소 본이 아닌 실물 크기의 Faceless를 처음 접했어요."
태호는 Faceless를 그리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김 관장은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얘기를 듣는 사람처럼 집중해서 경청했다.
"단순히 복제만 한 그림을 그리고 나서 보니, 저만의 방법으로 Faceless를 그려보고 싶어졌어요. 그러다가 얼굴까지 그렸죠. 저는 저 얼굴을 가진 그림에는 이름도 붙였어요. 빛의 마리아 (Maria Luminis, 마리아 루미니스)에요. 어울리죠?"
마리아 루미니스는 태호가 더듬더듬 라틴어 사전을 찾아 지은 이름이었다.
김 관장은 이 이름이 왠지 무성의한 Faceless 보다 훨씬 더 그림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좋은 이름이에요. 이렇게 보니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네요."
두 사람은 그림에 대한 얘기만 30분 넘게 했지만, 매매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태호는 매매에 관심이 없다는 듯 행동했고 김 관장은 작업실에 걸린 그림을 다 사고 싶지만 (윌슨이 가져가서 몇 개 남지도 않았다) 참았다. 금전 거래에 비교적 솔직했던 태호와 달리 김 관장은 작가와 돈 얘기를 직접 하는 것을 꺼렸다.
다만 이렇게 초대한 것을 그녀는 다르게 해석했다. 전에 약속했던 후원 계약을 지키라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작업실을 보고 김 관장은 결심을 굳혔다. 태호는 그녀의 기대대로 올바르게 성장했고 대가의 면모를 작품에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라 경제 사정이 좋건 말건 태호 앞에서는 그런 건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태호 군, 진로는 결정했나요?"
"일단 미국의 대학을 가보려고 해요."
"혹시 생각하는 대학이 있나요? 전에 얘기했던 예일대?"
"입학 원서는 쓸 건데, 어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제가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들이 많아서요."
"후훗. 태호 군이 그런 걱정을 한다니 이제야 좀 나이에 맞는 걱정을 하는 것 같군요. 필요하면 김 과장이나 윌슨을 통해서 연락해요. 그 정도 도움은 줄 수 있답니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서현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고 헤어졌다. 태호는 서현을 잊어버린 듯 행동했고 김 관장은 태호가 딸 얘기를 꺼내지 않자 태호를 배려한 듯 꺼내지 않았다.
*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윌슨은 김 관장이 제시한 금액인 10억 원이 터무니없이 낮다고 주장하며 테이블을 엎었다.
태호가 6개월 넘게 그린 그림 두 점은 윌슨이 봐도 명작이었다. 개인 미술관에 순장시키기엔 그림은 아직 피어나지도 못했다.
활짝 피었을 때 작품의 가치는 지금 김 관장이 제시한 가격의 열 배도 부족할지도 몰랐다.
"그림은 언제 가지고 올 건가?"
"내년에요."
"너무 늦어. 빨리 보낼 수 없는 건가?"
"아직 그림이 다 마르지도 않아서 이송 중에 훼손될 수 있어요. 또 아직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도 않았고요."
"그래.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기서 그림 소개할 사람들이 많아. 사진만으로도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알았어요. 늦어도 연말 전에는 보낼게요."
하지만 얼마 후 윌슨의 강력한 요구에 그림은 특급 배송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
윌슨이 급하게 태호에게 그림을 보내라고 요청한 이유는 빌바오의 슈석 큐레이터이자 Faceless 복원 프로젝트 책임자인 제이슨 베이트만 때문이다. 윌슨이 태호에게 받은 사진을 슬쩍 제이슨에게 보냈고, 제이슨은 바로 그림을 실물로 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썬 갤러리에 도착한 태호의 그림은 갤러리 사무실에서 개봉되었고 얼마 뒤 갤러리 전시실의 가장 좋은 위치에 나란히 걸렸다.
그림을 걸자마자, 윌슨은 빌바오 미술관의 제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림이 도착했네."
"그래, 사진하고 비교해 어떻던가?"
"상상 그 이상일세. 언제 올 건가?"
"요즘 일이 많아서 다음 주나 되어야 시간이 될 거야."
"그림은 갤러리에 이미 걸었어. 내 주요 고객들에게는 다 문자를 돌렸네. 오늘 와서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림에 대한 얘기를 듣는 건 자네가 바라는 일은 아닐 텐데?"
"하아... 알았어, 알았다고. 퇴근하고 가는 김에 들르겠네. 좀 갤러리 다른 곳으로 옮겨. 집에 가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라는 거 자네도 알잖아. 들렀다 가면 퇴근이 최소 2시간은 더 늦어져!"
"어떻게 하라고?"
"투덜거리지도 못하나? 끝나고 갈게."
"빨리 와. 나도 8시에 문 닫을 거야."
"이런 망할!"
*
윌슨은 제이슨이 갤러리에 도착하기 전 복제품은 전시실에 그대로 두었지만, 빛의 마리아는 자신의 사무실로 옮겼다. 복제품을 보여주며 잽을 날린 다음 나중에 빛의 마리아를 통해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겠다는 계산이었다. 이런 게 설득의 묘미랄까.
7시에 맞춰 도착한 제이슨은 갤러리에 들어올 땐 성난 들소 같았지만 그림 앞에서는 온순한 사슴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그림은 도대체 뭐야? 왜 미술관에 있어야 할 게 여기 있어?"
제이슨은 정말 놀랐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아직 물감도 채 마르지 않았다.
윌슨은 제이슨이 더 놀랄 시간을 주었다. 8시에 문을 닫는다고 했지만, 제이슨이라면 자정까지도 기다릴 수 있다. 일부러 근처 단골 식당에 예약까지 해놨다. 윌슨은 같이 식사하러 갈 거라 확신했다.
그림을 확인하는 제이슨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빌바오 미술관에 있는 원본과 차이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미세한 붓질의 흔적마저 똑같았다.
Faceless도 모나리자만큼이나 연구가 많이 된 작품이라 그림이 인치 단위로 분석이 되어 있었다. 작가가 어떤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다 공개가 되어 있다.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언뜻 보면 선명한 붓 자국까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마치 지독히 복잡한 퍼즐 같은 작품이었다.
옆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윌슨을 보자 배알이 꼴렸지만, 제이슨은 인정해야 했다. 이건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아무리 잘 알려진 그림이라지만 이걸 석 달 만에 복제한다고? 허... 정말 얼굴만 그리면 되겠군."
"흐흐. 달러로 치면 슈퍼 카피 그 이상이야." 윌슨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슨은 말을 이었다.
"정말 그림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이 그린 작품이야. 이 선 하나하나가 원본과 똑같아.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니고 그림을 그린 순서가 원본하고 똑같다는 거야."
말을 멈추고 또다시 그림을 쳐다본다.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제이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똑같다는 표현은 잘못된 거야. 이 그림은 원본이 가진 불안함이 없어. 즉, 이 그림이 원본보다 더 낫다는 거야."
제이슨은 살짝 한숨까지 쉬었다.
"이거 내 논문 주제하고도 맞닿아 있는 건데, Faceless를 제작자는 건강이 매우 안 좋았을 거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 붓질이 뒤로 갈수록 잔떨림이 많아지고 물감이 튄 흔적들이 보여. 그림 그리다가 기침할 때 생기는 붓 자국도 많이 있기도 하고."
"여기 복사본은 모든 획이 자연스럽고 간결해. 호불호가 있겠지만 이 그림이 더 잘 그려진 그림이고 Faceless의 완성형에 가깝다는 거지."
"잘 그려진 그림은 과거에도 몇 번 있었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사실주의 쪽 화가 중에 유명한 사람치고 Faceless를 안 건드려본 사람이 없으니. 물론 그 그림들은 다 수장고에 처박혀 있지. 난 과거 어떤 버전의 Faceless보다 이게 더 나아 보여. 그래 누가 그린 건가?"
"나랑 얼마 전 위탁 계약한 화가. 그 화가가 석 달 만에 그린 그림이야."
윌슨은 태호에 대해 제이슨에게 설명했다.
"이걸 석 달 만에 그렸다고? 더 오랜 시간 그린 거 아니야? 아니지. 굳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지. 대단한 실력은 맞아. 이 그림만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그렸다고 해도 믿겠어. 그래, 나에게 이걸 보라고 한 이유가 뭔가?"
"이 작품을 보여준 이유는 다음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네. 안에 들어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