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aceless3 (44/181)

///// Faceless3

윌슨은 제이슨을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제이슨은 얼굴이 있는 Faceless를 보고 유령이라도 본 듯 놀랐다.

입을 벌리고 뭐라고 말은 해야 하는데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달싹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윌슨은 혹시 몰라 의자까지 가져다 놨다.

제이슨은 의자에 앉는 대신 그림을 더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그 벌린 입을 다물지도 않고 그림에 바싹 다가간 제이슨은 한참을 가까이서 쳐다보다 다시 멀찍이 떨어져서 그림을 관찰했다.

"돋보기는?"

"여기 있네."

윌슨에게 돋보기까지 받아 들고 그림을 세세히 관찰했다.

그림은 앵그르와 고흐 작품의 중간 어디쯤 같았다.

고흐 특유의 역동성은 덜했지만, 앵그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조화로움은 제이슨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그 원인은 바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Faceless를 그린 작가들은 얼굴도 강렬한 색채를 지닌, 고흐의 초상화에 사용된,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해 그렸다. 태호처럼 이렇게 깔끔한 신고전주의 그림으로 얼굴을 표현한 작가가 없었다.

"어이가 없군. 이 간단한 생각을 지금까지 못 했을 줄이야."

결국 제이슨은 진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뭐가 말인가?"

"빌바오의 수장고에는 Faceless의 실패작들이 꽤 있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도전한 작가들도 많아. 그림만 보면 누군지 뻔히 알지만 미술관 측에서는 모른 척했지. 작가의 명예를 생각해서. 수십 년간 이 그림을 복원하려고 하면서도 여기 이 그림처럼 얼굴을 복원할 생각을 못 했어. 이렇게 신고전주의 풍의 얼굴을 예상을 못 한 거지. 이유야 그림의 전체적인 색채가 워낙에 강렬하기 때문에 거기에 잡아먹힌 탓이겠지만. 나도 그중 하나이고."

의자에서 일어서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만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아무도 이렇게 그릴 생각을 못 했어. 이 그림은 그런데 달라. 얼굴은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이 아니야. 그러면서도 매우 어울려. Faceless를 수십 년 본 나도 이게 원본이랑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Faceless를 실제 제작한 사람이 인상주의를 추종한 화가가 아닐 수 있다는 거지. 아니,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 출신일 확률이 있어. 거기 출신이거나, 그쪽 출신을 스승으로 둔 화가이거나."

제이슨의 목소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미술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Faceless의 원작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얘기야!"

말을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칠판이라도 있었다면 분필로 '탕'하고 내리치며 열변을 토했을 제이슨이다.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했다는 게 억울했다. 그랬다면 논문들이 산으로 가지도 않았을 테고, 정확히 누군지 밝혀낼 순 없을지언정 훨씬 더 정답에 근접해 제작자를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제이슨의 설명과는 별개로, 윌슨은 이게 자신과 태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했다. 윌슨에게는 Faceless의 제작자를 찾는 건 둘째 문제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은 이를 어떻게 활용해 태호를 뉴욕 미술계로 화려하게 진출시키느냐였다.

무조건 태호를 복원 작업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계산이 섰다. 그리고 미술관에 요청해 Faceless 옆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기 있는 빛의 마리아에서 보이는 동양인의 얼굴선이 아닌 서양인, 정확히는 프랑스 여인의 얼굴선이 보이게 하면 시장에 강한 설득력이 있게 될 거로 생각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같은 그림을 보며 다른 생각을 했다.

*

그림의 감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제이슨이 윌슨에게 물었다.

"자네가 이 그림을 나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뭔가?"

"자네는 이걸 그린 작가가 완성할 Faceless 가 궁금하지 않아? 이 그림의 작가가 실제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그릴 Faceless의 완성본이 보고 싶지 않냐고."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실물도 보지 않고 이만큼 그렸다는 건가?"

제이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 작가는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어. 다만 내가 전에 작품을 자세히 찍은 사진을 보낸 적은 있지."

"그럼 사진만을 보면서 그렸다는 건가? 자네, 사진만으로 이 정도 그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말을 마치자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진 제이슨이다. 얼마 뒤 제이슨이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나?"

"이 친구가 나중에 Faceless를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줘"

"그런 이벤트는 안 한 지는 오래되었는데?"

"그러니까 그 친구에게 기회를 줄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 친구가 완성할 작품이 궁금하지 않아?"

"물론 궁금하지. 하지만 오랫동안 안 하던 이벤트를 다시 끄집어내야 할까? 한동안 심하게 비난받았잖아."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뛰어넘을 수 있어."

"흠... 좋아.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이건 필수이기도 해. 이사회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있으려면 이 그림을 미술관으로 옮겨서 그들이 직접 봐야 해. 그래야 나도 설득을 하지."

"그건 가능해. 우리 쪽 전시 끝나고 옮기면 될 거야. 오래 걸리지 않아. 참, 작가가 Faceless를 실물로 본 적도 없다는 얘기는 비밀로 해주게. 그나저나 우리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내 근처에 괜찮은 식당을 예약해 뒀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윌슨의 말에 제이슨은 짜증을 내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한껏 흥분해서 그림을 봤더니 벌써 8시가 훌쩍 지난 줄도 몰랐고, 정신을 차리자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

다음날, 제이슨은 미술관 이사회에 특별 안건을 올렸다.

Faceless의 복원 작업에 한 작가를 추가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안건은 이사회 멤버들 사이에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등장한 Faceless를 봤나?"

"봤지. 지금 뉴욕 미술계가 그 그림 때문에 떠들썩하잖아. 지금까지 봤던 Faceless 복제품 중에 단연 최고라 할 만해."

"자네도 얼굴이 있는 Faceless는 보지 못했나 보군."

"뭐라고? 그런 게 있었어?"

"썬 갤러리 사장인 윌슨이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 놓고, 몇 명에게만 보여줬다고 하더군."

"이런. 당장 오늘 찾아가서 봐야겠어. 자네도 같이 갈 건가?"

"그러려고 연락했어."

한동안 썬 갤러리는 Faceless를 보고자 방문하는 관람객들로 꽤 붐볐다.

그 덕에 제이슨이 올린 안건은 한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제이슨은 이사회 멤버들이 받은 충격을 십분 이해했다. 그들도 자신만큼 그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버전의 그림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제이슨은 이사회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Faceless 복원 작업에 전문가 한 명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새로 등장한 Faceless의 작가라도 된 답니까? 그 정도 아니면 의미가 없을 듯하네요."

"네. 바로 그 작가입니다."

"네? 정말입니까? 어떻게 그 작가를 제이슨이 알고 있는 거죠? 썬 갤러리 측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제가 썬 갤러리 사장인 윌슨과 안면이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윌슨이 빌바오 출신입니다. 여기서 꽤 오랫동안 저와 같이 일했죠."

"아, 그랬군요. 몰랐네요. 그래서 그 작가가 누굽니까?"

"윌슨이 계약한 작가입니다. 프로파일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Faceless' 복원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만 밝힌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임시 이사회라도 열어야겠군요. 임시 이사회를 열기 전에 새로운 버전의 그림에 대한 우리 측의 정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의사 결정할 근거는 있어야죠."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윌슨에게 협조를 구해 그림을 미술관으로 옮겨야겠군요. 그런 후 올라온 보고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이슨 씨가 제일 잘 알겠지만 아무래도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요. 내부적으로 의견이 모이면 아무래도 일이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

썬 갤러리에서 빛의 마리아까지 본 빌바오 임원은 이사회에 재밌는 그림이 있다며 분위기를 잡았다. 그래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빌바오 이사회에서 그림을 실물로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썬 갤러리에 그림을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

윌슨은 빌바오의 제안을 받았지만 그림을 바로 옮길 수가 없었다. 그림을 보겠다며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나날이 늘었기 때문이다. 전시를 시작한 지 두 달, 빌바오의 요청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림을 옮길 수 있었다. 제이슨의 갈굼이 이어졌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컴백 후 지금 같이 갤러리가 붐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Faceless 복제품과 빛의 마리아를 보고 경악한 큐레이터들이 Faceless 원본과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의견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원본에 견줄만합니다. 잔떨림이 전혀 없어요."

"최근에 작업한 그림이에요. 아직 물감이 다 마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봐야 잘 베낀 모조품에 불과 합니다. 느껴지는 포스가 약해요."

"분위기가 상당히 밝지만 애절함이 부족합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카피 중에선 최고지만 역시나 원본을 넘어서진 못하네요. 그림에 담긴 기운이 원본을 따라가기엔 많이 부족해요."

"그렇게만 생각하실 게 아니라 이벤트로 삼는 건 어떨까요? 지금 원본도 보수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파손되어 나간 부위를 중심으로 자잘한 크랙이 발견되고 있고, 기존 크랙은 그동안의 보존 노력이 무색하게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고요."

"보수를 시작하고 그동안 지금까지 보관 중인 모사품들을 다 꺼내 특별전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보수에 얼마나 걸리는지 파악부터 하고 시작하죠."

*

보수를 위해 미술관을 방문한 교수들과 미술 복원 전문 작가는 먼저 Faceless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예상은 했지만, 상태가 많이 안 좋네요. 그림 표면이 많이 상했어요."

복원 전문가는 돋보기로 그림을 세세히 살피면서 변질, 갈라짐, 찢김, 곰팡이, 백화 현상까지 확인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그림 위의 뜯겨 나간 부분에서부터 발생한 크랙이 심각해요. 옛날에 보존 처리 한 부분도 그 수명을 다했기에 당장에 조치가 필요합니다. 더 기다릴 여유가 없어요."

복원 전문가는 환자을 당장 수술대에 올리라고 말하는 응급실 의사 같았다.

"복원 기간은 얼마로 예상하십니까?"

"3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더 짧게는 안 되겠습니까?"

제이슨은 Faceless가 미술관 방문객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에 3개월이란 소리에 기함했다. 오죽했으면 수장고에 쌓여있던 옛 그림까지 다 끄집어낼 생각까지 했겠는가. 다 관객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복원 전문가는 제이슨의 바람을 간단히 일축했다.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겁니다. 그림도 크고 훼손이 심해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Faceless 아닙니까. 평소 작업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이 그림의 복원 작업을 망쳤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시장에서의 퇴출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제이슨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복원 작업에 한 사람을 추가하면 작업이 빨라질까요?"

"글쎄요.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전문가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 그림을 보고 얘기하시죠."

미술관 직원들이 꺼내온 태호의 그림을 보고 교수들과 복원 전문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이들은 함부로 태호가 복원 작업에 합류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복원을 하는 것은 정말 많은 부분이 다른 작업이기 때문이다.

복원 전문가는 제이슨에게 바로 '노'라고 하지 않고 여지를 뒀다.

"그래도 불러 보시죠. 이 정도로 Faceless를 재현할 작가라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

얼마 후, 뉴욕타임스 한쪽 구석 면에는 Faceless가 내년 초에 최소 3개월 이상 수리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기사가 떴다. 연말에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봄까지 미룬 결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