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celess1
윌슨이 뉴욕으로 돌아간 지 석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태호는 숙영과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을 걷다가 우연히 1:1 크기의 명화를 파는 매장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Faceless가 걸려 있었다.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모나리자,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리고 빌바오 미술관의 Faceless가 있다. 이 중 미국에 위치한 작품은 Faceless이며, 빌바오 미술관의 마스코트 같은 작품이기에 태호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그림이다.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Faceless는 제작자조차도 불명확했다. 심지어 제작자를 밝혀내기 위한 논문이 너무 많기에 '박사 제조기'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작자 관련 논문은 학계에서 누구도 건드리려 하지 않는 주제가 되어 버렸다.
얼굴은 파손되었고 제작자는 불분명하다. 성모 마리아를 표현했다고 추측되지만, 정설로 굳어진 것이 없다. 얼굴이 없으니 무슨 얘기를 하든 가설일 뿐이다. 물감과 캔버스의 재질 등을 통해 제작된 시기는 밝혀졌으나 그뿐. 그 시절 비슷한 화풍으로 그림을 제작한 작가가 없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인상파 화가 대부분이 제작자로 한 번씩은 추정되었다.
제작자를 알아내는 일은 마치 안개 낀 미궁 속을 빠져나오려 하는 데 집중할 수도 없게 사방에서 경적이나 사이렌이 울리고 뒤로는 번쩍이는 경찰차나 소방차가 쫓아오는 것과 같았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치명적인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빌바오를 넘어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의 명성을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 오랜 기간 미국이 유럽에 가지고 있던 문화적 열등감이었다.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1950년대 잭슨 폴록을 시작으로 다양한 거장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그림이 공개된 20세기 후반 이후 대대적으로 이 작품에 대해서도 선전을 했다. 미국도 유럽의 '모나리자'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못지않은 걸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증명하고 싶어 했다.
프랑스로부터 반환 요청도 있었지만, 프랑스가 모나리자를 이탈리아에 반환하지 않듯이 미국도 프랑스로 반환하지 않았다. 자작극인지는 지금도 논란인 도난 사건도 이 작품의 유명세에 기름을 부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유럽에 대한 급조된 대안이었지만, 정성과 사랑으로 그림을 대하자 이 그림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작품의 모든 것에 열광했다. 열광할 수록 잃어버린 얼굴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많은 이들이 도전했고 나름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지금은 모조리 미술관 수장고 어딘가에 버려지듯 방치되었다. 근 20년간 이 그림의 주인을 찾겠다며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태호도 잘 아는 내용이다. 모나리자만큼 유명한 작품이니 학교에서 기본 미술 교육을 받았다면 한 번은 접했던 작품이다.
이날은 뭔가가 달랐다. 가슴에 와닿는 뭔가가 있었다. 뭔가 그립고 슬프고 아프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초조하고 쓸쓸하고 그 감정의 끝에는 자책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감정에 색깔이 있다면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그 아래에는 펑펑거리는 거대한 소음과 함께 터지는 오색 찬란한 불꽃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금세 사그라들었다. 뭔가가 잡힐 듯했다가 사라졌다. 지독한 갈증을 유발하는 감정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사진에서 봤던 그림 그대로다. 실제 크기로 제작이 되었는지 머리 부분이 날아간 원작 그대로였는데 사라진 부분은 그냥 흰 바탕으로 남겨놨다. 그림은 최고 화질의 복제품으로 실제 작품을 99% 이상 구현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가격은 백만 원 정도. 많이 접하던 그림이었지만 오늘 이 그림이 뭔가 새롭게 보였다. 실물 크기여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비싸긴 했지만 태호는 그림을 구매한 후 배송을 요청했다.
매우 비싼 가격이지만 숙영은 카드를 꺼내 결제하는데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
당일 저녁 그림은 작업실로 배송되었고 한쪽 벽에 설치되었다. 프레임까지 구매했다. 그림의 실제 프레임과 거의 똑같았으며 프랑스와 미국 장인의 손길을 거친 제작된 예술 작품이었다. 복제 그림의 값보다 복제 프레임의 값이 훨씬 더 비쌌다.
밤이 깊어 갔다. 태호는 불도 켜지 않고 촛불에 의지해 그림을 살펴보았다. 다른 분위기에서 그림을 살펴보고 싶었다. 낮에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머릿속을 간지럽히던 그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틈틈이 그림을 봤지만 느껴지는 게 없었다. 문뜩 그림이 제대로 된 복제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Faceless를 재현해 보고 싶은데 한국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어요."
"태호도 그 작품에 빠질 때가 된 건가? 그 작품이 빌바오에 걸린 이후 누구나 한 번쯤 따라 하고 싶은 그림이 되어 버렸지."
윌슨은 그 작품의 화풍을 따라 하는 작품이 너무 많다며 참조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농담도 한마디 던졌다.
"독이 든 성배가 되어 버렸어. 누구나 완성하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완성하지 못하는. 실제 제작자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완성하고 욕을 먹을걸?"
"누군가가 그 작품을 완성한다면 엄청난 공격과 엄청난 찬사를 동시에 받으면서 미국 예술계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도 몰라. 도전할 만하지."
"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태호가 물었다.
"어떻게 완성된 건지 아느냐고?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긴 한대. 태호 군도 이 그림과 관련된 귀신 이야기를 알지? 이쪽 업계에선 누군가가 완성하면 더 이상 유령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다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유령을 봤다는 사람들이 나타났거든."
"누가 그 꿈을 자주 꿔요?"
태호의 물음에 윌슨은 피식 웃으면 대답했다.
"그 꿈을 단골로 꾸는 건 제이슨이야. 내가 빌바오에 있을 때 동료이기도 했지."
*
한 달 뒤 윌슨은 정말 백여 장의 사진을 찍어왔는데 높은 해상도를 가진 사진기로 찍었는지 사진이 선명하고 디테일이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잘 그려보려 했지만 정말 얼굴은 머릿속에 먹물을 뿌려 놓은 듯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은 찾은 궁여지책으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지우고 다시 하는 작업만을 반복했다. 막상 그려놓고 보니 어느 흔한 성모 마리아 그림과 다를 바가 없었고 다른 유명한 화가들의 성모 마리아도 다 찾아봤지만 결국은 맘에 들거나 어울리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제야 빌바오에서 Faceless의 얼굴을 못 찾은 이유를 이해했다.
태호는 일단 얼굴은 빼고 나머지 모습만을 먼저 그려보았다. 석 달 동안 하루에 두 시간 정도 그림에 시간을 투자했다. 교수들과의 수업에 학원에 사진까지 정신이 없이 바빴지만 가능하면 시간을 내 그림을 그렸다.
다 그리고 보니 정말 원작과 비슷한 작품이 되었다. 백 장이 넘는 사진을 통해 확인한 붓 자국 하나까지 맞춘 작업이라 옆에 걸려있는 복제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퀄리티의 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그림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더 잘 베낀 그림이 하나 탄생했을 뿐. 느낌도 감정도 아무런 자극도 없었다.
태호가 처음 제대로 접한 Faceless는 얼굴이 없는 미완성으로 남아 작업실 한쪽에 대충 방치되었다.
*
두 달 뒤.
태호는 한쪽에 대충 걸린 자신이 만든 Faceless의 복제품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정성껏 그린 그림이지만 뭔가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냥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그리면 될 것을 괜히 따라 한다고 시간만 낭비했네."
태호는 다시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화방에서 Faceless와 동일한 크기의 최고급 캔버스를 주문했다.
받은 캔버스를 작업 벽에 건 태호는 스케치부터 했다.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그냥 내 방식대로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리는 게 낫겠어."
태호는 기존 Faceless는 무시하고 내키는 데로 그리기 시작했다.
곧 태호의 특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은 더 깔끔해졌고 정확해졌다. 색은 더 선명하고 더 아름다워졌다.
Faceless에서 볼 수 있는 붓질은 자세히 보면 매끈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튀고 불안정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지만 태호의 붓질은 정말 깔끔하게 떨어졌다. 자유롭고 강렬한 붓질. 일필휘지가 서양화에 적용된 듯했다.
Faceless의 붓질이 여기저기 먹물이 튀는 거친 붓글씨 같다면 태호의 붓질은 오케스트라의 시각적 연주 같았다.
Faceless 그 특유의 야성미와 생기는 덜 했지만, 지성미와 조화로운 품격은 확 올라갔다.
결정적으로 새로 그리는 Faceless는 얼굴이 있었다.
비록 가까운 사람이라 설명을 들어야 숙영의 얼굴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태호는 키도 컸고 힘도 좋아져 그림을 그리는데 신체적으로 힘든 점이 없었다.
그림은 비교적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벽에 캔버스를 건지 석 달 만이었다.
*
태호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숙영은 작업실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집중해 신경이 곤두선 아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태호가 부부를 작업실에 초대하자 두 사람은 바로 태호의 작업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작업실에는 그림 세 점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구매한 복제품, 하나는 그린 복제품, 마지막은 새로 그린 그림이었다.
크기가 꽤 큰 Faceless 세 점이 벽에 나란히 걸려있자 벽은 온통 노란빛으로 가득했다. 여기에 정오를 맞아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빛은 그림에 반사되어 흰빛과 노란빛으로 은은하게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거 그 Faceless 맞지? 빌바오 미술관에 있는 그 그림. 어떻게 여기에 있니?"
영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가 다 그린 거니?"
고개를 끄덕이는 태호.
두 사람은 그림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태호가 정성껏 그린 그림을 자주 봐왔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번은 특별했다.
Faceless에 얼굴이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숙영은 한참 미화되긴 했어도 자기 얼굴과 닮았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게 네가 생각하는 Faceless니? 너무나도 아름다워. 옆에 있는 복사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워."
숙영은 감동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Faceless의 실제 얼굴도 이 그림과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아." 영준이 말했다.
혹시나 아들이 환생한 화신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 생각은 지웠다. 화신이면 어떤가.
자기 아들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