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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화제작 (18/181)

///// 탱화제작

강재범 교수는 이틀째 하루에도 몇 번을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를 반복했다.

김창기 교수에게 태호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 였다.

김 교수와 언제 직접 전화를 했었는지 기억도 없었다.

전시장이나 학회에서 만나도 데면데면했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지만 만나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불쾌지수가 상승했기에 직접적인 만남이나 통화는 피해왔다.

하지만 태호에 대한 걱정 혹은 궁금증이 그 불쾌감마저 극복하게 만들었다.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기입니다."

"어. 나다. 잘 있었냐?" 강 교수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김창기 교수도 놀라 아주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

"잘 있었지. 네가 전화를 다 주고 웬일이냐."

"전화를 기다렸는데 안 오길래 관대한 내가 먼저 전화를 했지."

"전화 한 통화에 관대 씩이나. 무슨 일이야."

"내가 너에게 전화할 일이 관혼상제 빼고 뭐가 있겠어? 있으면 태호밖에 없지. 태호 소식 들은 거 있으면 알려줘. 석 달 동안이나 연락이 없는데 궁금하네."

"미화에게 연락하지 그랬어?"

"당연히 해봤지. 걔도 잘 모르더라. 대구에 몇 달 내려가 있겠다는 얘기만 들었다고 하니, 한국에 있긴 할 거야. 너도 잘 모르는구나. 알았다. 담에 보자."

"잠깐. 어떻게 할 생각이야?"

"태호 어머니에게 전화해 봐야지."

"좋은 생각이다. 무슨 일 있으면 나도 알려줘."

"오케이. 알아보고 연락 주지."

태호 어머니와 연락이 닿은 강재범 교수가 막 출발하려는 찰나, 조교에게서 연락이 왔다.

"교수님, 이번 학회에 발표할 자료 제출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지난번에 제출하지 않았나?"

"국제 서양화 학회 말고요. 한국 서양화 학회요."

"이런. 두 개가 일정이 비슷한가?"

"일주일 차이에요."

강 교수는 태호에게 가는 것을 포기하고 김창기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질척거리는 전 여자친구에게 전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화를 받은 김 교수는 그날 저녁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김 교수는 상가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3층에 있는 작업실을 들어섰다.

아무리 집이 부자라지만 동부 이촌동 상가 안에 작업실을 마련해 준 태호 집안 어른들의 그 담대함과 재력은 부러웠다.

하얀색으로 내부 인테리어가 된 작업실은 자신의 작업실보다도 훨씬 깨끗했고 마치 미술관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정면으로는 유리창이 보이고 오른쪽 벽면과 왼쪽 벽면에는 아직은 아무런 작업이 되어 있지 않은 캔버스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선반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조금은 낡아 보였지만 그래서 더 멋있어 보이는 선반이었다.

문쪽 벽면에 이 무심한 제자가 앞치마를 하고 손에는 팔레트에 유화물감을 풀어놓고 한창 채색을 진행하고 있었다.

태호는 김 교수를 보자마자 곧 인사를 했지만 채색 작업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김 교수의 눈에 비친 그림은 점점 더 완성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채색 작업이 진행될수록,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격을 높여갔다.

선에서 면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단순 상에서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으로, 이제는 인간에서 신으로 변해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잠시만 저기 앉아 계시겠어요? 이거 마르기 전에 얼른 칠해야 되어서요."

김 교수는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평소 태호의 실력을 봤을 때 대충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꽤 봐줄 만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호의 작업은 10분이 더 지나서야 끝났다.

"교수님, 차는 뭐로 드시겠어요? 커피? 녹차?"

"너 커피는 끓일 줄 아니?"

"여기 포트에 물 넣고 이 컵에 믹스 커피 넣고 물 부으며 되는 거 아니에요?"

"끓여는 봤고?"

"아니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태호를 보고 김 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직접 커피를 끓였다.

"무슨 일을 한다고 넉 달 동안 연락도 없었니?"

"죄송해요. 이거 그리는데 너무 몰두해버렸어요."

태호는 자기가 작업하고 있는 캔버스 두 개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동화사에 갔다가 염불암 극락전 뒤에 있는 마애여래좌상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김 교수는 태호의 설명을 들으면서 새삼 자신의 제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바위 안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부처들을 그리기 위해 몇 달을 산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는 무슨 신화나 전설의 한 장면 같았다.

이 어린 천재 제자가 감수성이 예민하고 대단한 직관 기억 (Eidetic or Photographic Memory)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타고난 화가라는 것도 잘 안다.

거의 스스로 깨쳐 유화를 그리는 천재이니 더 말해선 입만 아플 뿐이다.

하지만 이게 불교라는 종교와도 연결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태호가 어떤 화신 (아바타) 인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 교수는 동양화 전공에, 박사 학위는 미학과 관련된 철학으로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박사가 불교 미술과 철학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기에 김 교수는 태호가 그린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다만 하단부 그림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그림을 그린 의도를 바로 물어봤다.

"태호야. 하단 그림에 나오는 저 여자들이라고 해야 할지 보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걸 왜 그린 거니? 내가 아는 어떤 탱화 구도하고도 맞지 않는데?"

"저도 얼마 전에 저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요. 모르겠어요. 본 대로 그린 거라."

"흠... "

김 교수는 이 그림이 태호의 스타일과 생각을 모두 담은 그림이라고 봤다.

이건 견본이고 벽에 걸린 두 개의 캔버스에 담길 그림이 진짜겠지만 이 견본만으로도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짐작이 되었다.

하긴 그러라고 만든 그림이기도 했으니까.

매우 디테일하게 표현하면서도 지극히 화려한 걸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작품 퀄리티는 매우 높을 테지만 제작에는 매우 많은 시간이 들어갈 것이 뻔하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는 지켜보고 방향을 알려줘야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니?"

"이것만 하면 일 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내가 도와줄게 있을까?"

"색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고민해야 돼요."

"그래. 그건 도와줄 수 있겠구나. 그림은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직접 다 그릴 거니?"

"이건 제가 완성시켜 보려고요."

김 교수는 태호와 커피를 마시며 탱화 같은 불화를 그릴 때 색 쓰는 법과 대형 작품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할 점과 다양한 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어 시간 후에 돌아갔다.

*

강재범 교수는 김 교수보다 한 일주일 정도 늦게 태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학회 자료뿐만 아니라 외부 강의 등으로 일정이 안 맞았기 때문이다.

태호는 견본 작품은 완전히 완성을 해서 건조 중이었고, 이제 막 캔버스에 밑그림 작업에 열중하던 차였다.

몇 개월 만에 봤지만 강 교수는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했다.

바로 말리고 있는 그림에게 다가가 꼼꼼히 그림을 살펴봤다.

*

"이건 밑 그림 같은 거지? 저 큰 거 그리기 위한."

태호에게 말을 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말을 하던 강 교수는 이내 그림 앞에 두고 생각에 빠졌다.

"정말 괜찮은데. 근데 뭐가 조금 허전해. 가만 보자."

강 교수는 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 들어간 선들 중 이런 부분은 금색으로 해야 되잖아. 이 장신구들 보석이지? 그럼 이것들은 메탈 계열 물감으로 색을 칠할 건가?" 강 교수는 그림의 몇몇 선들을 가리키며 물어봤다.

"네. 금색도 넣어야 되고 메탈 계열 색도 맞춰서 넣어야 돼요."

"어떤 색깔로 할지는 다 정했고야? 금색도 종류가 많은 건 아니?"

"네. 김 교수님이 금에도 여러 가지 색깔이 다르다고 하시더라고요. 불화에는 자줏빛이 들어 있는 황금을 제일이라고 하시는데 본 적이 없어서 감이 안 잡혀요. 다음에 오실 때 어떻게 황금색을 쓰는지 자세히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 친구가 그쪽은 잘 알지."

"견본 그림을 보니까 녹색이 많이 사용되었던데 그건 정말 잘 한 거야. 녹색이 안정감을 주고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편안하게 하거든."

"어떤 녹색 안료를 써야 될까요?"

"내가 아는 녹색 중에 제일 아름다운 색은 그린 그로슐라 라는 보석의 녹색이야. 케냐 산이 특히 유명한데 정말 선명한 녹색이야. 에메랄드보다 더 짙은 녹색이지. 짙은 녹색으로 옥(Jade)도 나쁘지 않아. 이런 녹색을 표현하려면, 퍼머넌트 그린을 이용해서 작업하고 테르베르트를 약간씩 섞어 쓰는 것도 좋을 거야."

"파란색은 울트라마린만 한 재료가 없어. 하지만 괜히 베르메르 따라 한다고 천연 울트라마린에 돈을 낭비하지는 마. 합성도 충분히 쓸만해."

"흰색은 내가 워낙에 티타늄 화이트와 징크 화이트를 좋아해서 많이 쓰긴 하지만 사실 사용하기 가장 어려운 색이야. 보통 까다로워야지. 웬만하면 흰색을 섞어서 색을 연하게 만들지 말고 옅은 색의 물감을 그냥 쓰는 게 좋아."

"검은색이 정말 잘 써야 되는 색이야. 난 아이보리 블랙을 선호하는데 약간의 신비한 느낌을 주는 푸른빛을 더하기 원하면 블루 블랙을 쓰는 것도 괜찮을 거야."

"붉은색은 차이니즈 레드나 카드뮴 레드 계열이 가장 선명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더라. 투명하고 밝은 색을 원하면 크림슨 레이크도 괜찮을 거야."

"노란색은 누가 뭐라 해도 고흐가 사용하던 노란색이 제일 인상적이지. 크롬 옐로와 크롬 오렌지가 들어간 밤의 카페테라스는 보는 순간 두 가지 색이 눈에 바로 들어오잖아."

강 교수는 완성된 견본 그림을 보며 색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환기는?"

"인테리어 하신 분이 이쪽으로 잘 아셔서 잘 되어 있어요."

"다행이네. 환기에 신경 안 쓰다가 나중에 몸에 이상이 올 수 있어."

이거 언제쯤 완성될 거 같니?"

"일 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가끔 와서 보고 가야겠네. 일 년 뒤에 완성되고 나면 전시할 거지?"

"해야겠죠?"

"네 솜씨로 봐서는 괜찮게 나올게 확실하다만. 전시할 장소 없으면 얘기해. 내 학교 미술관에 얘기해서 자리는 만들어주마."

"김 교수님도 같은 얘기하던데요?"

"우리 학교가 먼저다!"

"김 교수님이 먼저 손드셨어요."

"에잇!"

"죄송해요."

"하아... 늦은 내가 잘못이지. 참, 너 검정고시는?"

"내년에 봐야죠."

"중학교는 갈 생각은 있고?"

"글쎄요..."

"훗. 잘 판단해. 나 간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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