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화
역습 (5)
순간 붕 떠올랐던 김나래가 바닥에 고꾸라진다.
쿵─!
서울시청 멤버 절반이 설주희에게 탈락당하기까진 약 2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나, 나래 탈락….”
부스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규리는, 심판 자격으로 김나래의 탈락을 선언하며 나란히 선 도지혁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담담한 그의 얼굴.
사실 그녀가 얼마나 괴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도지혁으로선 별로 놀랍지 않은 결과였다.
“이제 하나 남았네?”
“…….”
아직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설주희와 혼자 남아버린 진서원.
3분을 남긴 두 사람의 승부는 생각보다 싱겁게 설주희의 승리로 끝이 나버렸다.
아무리 괴물 같은 재능을 지닌 진서원이라곤 해도, 지난 10년간 몸소 전투 경험을 축적해온 설주희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삐이이익───
그렇게 모든 승부가 끝이 난 후.
“고생했어, 얘들아. …정말 고생 많았다.”
팀원들을 수습한 도지혁과 한규리가 훈련 데이터를 취합하는 사이.
“뭘 봐?”
“…돼지.”
“뭐?”
“…….”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설주희와 진서원 사이에 작은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
옆에서 그러든 말든 조용히 고개를 푹 숙인 방한나는 머리를 싸맨 채로 깊은 상심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 번도 버티질 못했어.’
A급 괴수의 공격조차도 막아냈던 방한나는 적어도 설주희의 공격을 한 번 정도는 막아내리라 생각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막는 것 하나만큼은 정말 자신 있으니까.
그런데….
단 한 번의 공격에 나가떨어졌다.
고작 주먹 한 방에.
“…하아….”
방한나는 오랜만에 몰려오는 자괴감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고,
‘프로듀서님….’
도지혁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묵직한 괴로움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
그날 오후.
“왜 이렇게 늦어? 지금 1분 1초가 소중한 거 몰라?”
“이것도 빨리 나온 거야.”
일찌감치 훈련장을 나선 나는, 꽤 오랫동안 기다렸던 설주희와 합류하였다.
앞선 설주희와 팀 서울시청의 승부 이후, 우리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피드백을 진행하였는데,
격한 승부에 지친 팀원들의 상태를 고려하여 예정된 스케줄보다 조금 빨리 훈련을 마치곤 약속대로 곧장 설주희와의 데이트에 나섰다.
원래는 적당히 돌아오는 주말에 데이트를 하려고 했으나….
“또 딴소리하려고? 절대 안 돼. 오늘 당장 해!”
설주희가 당장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왔다.
언제 말이 바뀔지 모른다는 이유로.
너무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흐흥…. 노래 좀 틀까?”
“그러던지.”
그렇게 우리는 장소를 이동하고자, 주차해둔 차에 몸을 실었는데….
“하.”
조수석에 앉아 블루투스를 만지던 설주희가 갑자기 코웃음을 치더니, 대뜸 싸늘한 목소리로 폭언을 쏟아냈다.
“개 같은 년. 아주 곳곳에 흔적을 남겨놨네?”
“갑자기 뭐라는….”
[ 임아린‘s phone ]
뭔가 했더니, 차량 블루투스 연결 목록에 임아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 맞네. 이 자리에 그 년이 앉아있던 거잖아. 그치?”
“…뭘 그런 걸 따져.”
“그럼 안 따져? 설마 너…. 차에서까지 한 건 아니지…?”
“뭐?”
“이 차에서 그 년이랑 했냐고.”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추궁해오는 그녀.
나는 오래된 기억을 슬며시 밀어 넣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안 했어.”
그러자….
“안 되겠다. 차 바꿔.”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녀가 길길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뭔 갑자기 차를 바꿔.”
“불쾌하니까, 차 바꾸라고! 이거, 이것도 그래! 너, 이 향 안 좋아하잖아. 그 씨발년이 좋아하던 향이잖아!”
설주희는 자연스레 놓여있던 차량용 방향제까지 정확하게 골라내며 임아린의 흔적을 찾아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가만히 내버려둔 걸 순식간에 찾아낸 그녀의 눈썰미는 그야말로 경이로울 지경.
“이딴 거 들고 다니지 마.”
설주희는 그대로 차량용 방향제를 뜯어 창밖으로 휙 내던져버렸고,
할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살벌하게 쏘아보며 나지막이 경고해왔다.
“내가 더 좋은 차로 뽑아 줄 테니까, 이거 폐차해. 알았어?”
그렇게 작은 헤프닝과 함께 주차장을 나선 우리는, 곧장 설주희가 예약한 호텔로 향했다.
워낙 그녀가 유명하기도 하고 화려한 외모를 지닌 덕분에 공개적인 장소를 다니기가 어려웠는데, 이번엔 아예 모든 게 해결 가능한 호텔에서 시간을 즐길 계획이었다.
“쇼핑부터 할까? 아니면 밥부터?”
“시간이 애매하긴 한데…. 구경이나 좀 하다 가자.”
어느덧 호텔에 도착하여 차를 맡긴 우리는, 곧장 호텔에 딸린 쇼핑몰로 향했다.
“어디부터 가볼까….”
널찍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선 명품 매장들.
일반적인 쇼핑몰과는 달리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는데,
덕분에 설주희도 나도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우리 저기 좀 보자.”
“응?”
설주희가 가장 먼저 지목한 곳은 스위스의 시계로 유명한 브랜드.
성별을 불문하고 유명하긴 하지만, 평소 시계를 차지 않는 설주희가 흥미를 보일만 한 브랜드는 아니었다.
“가자.”
자연스레 내게 팔짱을 끼며 곧바로 매장으로 향한 그녀는, 대기하고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남성용 시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뭐, 예쁜 거 있어?”
내게 선물할 요량이었는지, 은근히 눈치를 살피며 내 취향을 물어왔다.
“글쎄, 내 눈엔 다 예쁜데….”
물론 내가 시계를 차고 다니긴 하지만, 그녀에게 선물 받을 생각은 없다.
금전적인 이유가 아니라, 괜히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없네.”
하지만….
“그래? 그럼, 앞으로 내가 고른 걸로 차고 다녀.”
“어?”
“저기, 이거랑 이거 좀 보여 주세요.”
설주희는 멋대로 직원을 시키며 시계를 꺼내기 시작했다.
“…주희야.”
“왜. 마음에 드는 거라도 생겼어?”
요망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나는 미리 선을 그으며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사줘도 받을 생각 없어.”
그러자.
덥석─
설주희가 내 왼쪽 손목을 붙잡아 들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이거, 누가 사줬어?”
“…어?”
한창 퀸즈의 프로듀서로 있을 시절에 임아린이 선물한 시계였다.
‘아니….’
말문이 막힌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내가 하나씩 다 바꿔 줄게.”
그녀는 내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내곤, 진열대 위에 올려놓으며 직원에게 말했다.
“이거, 버려 주세요.”
“야. 그걸 왜…!”
“조용히 해.”
임아린이 선물한 시계도 만만찮은 명품.
“바, 바로 버리면 되겠습니까…?”
“네.”
“아니, 안 버릴….”
“닥쳐.”
잠시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리며 우리의 눈치를 살피던 직원은, 이내 설주희의 손을 들어준 듯 내 시계를 챙겨 들었다.
“아….”
“아쉬워? 지금 저게 아쉬워?”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뭐. 내가 지금 못할 짓 해? 현 여친이 전 여친 흔적 지우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설주희는 구구절절 맞는 말만 내뱉으며 내 말문을 틀어막아 버렸고,
쇼핑을 빙자한 임아린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이것도 사.”
“내 취향 아닌데.”
“내 취향이니까, 사.”
옷부터 시작하여.
“뭔 커플링을….”
“손 안 내밀지? 또 힘 써?”
“…자.”
커플링.
“폰 케이스는 좀 별로….”
“닥치고 껴.”
심지어 휴대폰 케이스까지도 그녀에게 맞춰줘야 했다.
“예쁘다.”
“…이제야 마음에 드냐?”
“어. 너무 좋아.”
그렇게 VVIP로 등극한 그녀는 자신의 입맛대로 꾸민 나를 보며 사뭇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여왔고,
“이제 올라가서 밥이나 먹자.”
쇼핑을 마친 우리는 곧장 같은 건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였다.
“으. 배부르다.”
“너, 얼마 먹지도 않았잖아.”
“원래 남자친구 앞에선 조금 먹는 법이야.”
설주희는 비록 조건부이긴 하지만, 나와 사귄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좋은 걸까….’
그런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한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솔직히 설주희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내다보니 좋아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어떤 이유인지까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대체 어떤 이유로 인생을 걸 정도로 날 좋아하고 있는 걸까?
띵──
어느덧 멈춰선 엘리베이터.
우리는 미리 안내받았던 숙소로 들어섰다.
“방 좋네.”
설주희가 예약한 방은 남산과 서울의 야경이 훤히 보이는 스위트룸.
적당히 짐을 내려둔 나는, 창가에 서서 반짝거리는 야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스윽─
부드럽게 몸을 감싸오는 포근한 감각.
흘끔 고개를 돌려보자, 꽉 껴안아온 설주희가 물끄러미 눈을 마주쳐왔다.
“왜.”
“그냥. 좋아서.”
어딘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띠며 지그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마치 정말로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다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불현듯 떠오른 질문을 꺼내보았다.
“넌 내가 그렇게 좋냐?”
“응.”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그러자.
“음….”
그녀가 내 몸을 와락 끌어안곤 천천히 몸을 흔들며 나지막이 대답해왔다.
“일단 상냥하고. 자상하고. 착하고. 호구 같은 면도 있는데, 냉철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계산적인 척하기 좋아하고. 또 웃음도 헤프고. 눈치가 빨랐다가 둔하기도 하고. 분명 똑똑한 거 같은데 어디선 또 개 멍청하고….”
“…내가 멍청해?”
“멍청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하고.”
“야.”
눈에 힘을 주며 바라보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그녀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계속해서 좋은 이유를 늘어놓았다.
“노력하기 좋아하고. 기브 앤 테이크 확실하고. 잔정도 많고. 승부욕도 엄청나고. 거기도 엄청 크고.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더럽게 잘하고. 평소엔 상냥한 주제에 침대에선 완전 짐승이고….”
“…….”
“이건 부정 안 하네?”
“…몰라.”
그렇게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특징들을 담담히 늘어놓던 그녀는 은근슬쩍 나를 마주 보며 껴안아왔다.
그리고는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이 말해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설주희를 제일 좋아하잖아.”
대체 언제 들킨 건지, 그녀는 내가 몰래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 이것도 부정 안 하네?”
“…지금은 아니야.”
괜히 어깃장을 놓으며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야경을 배경으로 선 그녀는 화려한 야경보다 훨씬 반짝거리고 있었고,
알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은, 마치 내가 좋아했던 시절의 설주희를 보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좋은 거야?”
“응. 더 말해줘?”
“…됐어.”
궁금증을 해결한 나는,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킬까 싶어 자연스레 몸을 돌려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설렜어?”
귓가를 파고드는 기대에 찬 목소리.
“…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히죽히죽 웃으며 물어왔다.
“나한테 설렜냐고.”
“…뭐래.”
나는 괜히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의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상하네. 두근거리는 거 다 들리는데에?”
약삭빠른 설주희는 이미 능력을 사용하여 내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것 같았다.
‘아.’
예상치 못한 기술 활용에 허를 찔려버린 나는 표정을 무너뜨리고 말았고,
와락─
다시 한번 폭 안겨온 설주희는 몸을 밀착시키며 속삭여왔다.
“괜찮아. …나도 엄청 두근거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쪽─
그녀가 입술을 부딪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