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화
역습 (4)
이른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의 거울 앞에 선 나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와 머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머리 세팅이 잘된 느낌.
괜히 몸도 가벼운 게, 최근 중에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뭐, 좋은 일이 있으려나.’
최근 우여곡절이 많긴 했으나, 벌어진 일마다 잘 풀리긴 했다.
솔직히 잘 풀렸다고 보기 애매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쨌든 뜻하는 대로 흘러갔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맞겠지.
“흐흥….”
드물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는, 차를 몰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응?”
그런데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주차된 곳의 양옆이 시원하게 비워져 있었다.
‘운이 좋군.’
그렇게 평소보다 쉽게 차를 뺀 나는, 더 이상 단지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며 여유로이 출근길에 올랐는데….
‘아니…. 진짜 무슨 날인가?’
항상 느릿하게 굴러가던 도로가 뻥뻥 뚫리는 기적을 맛보았고,
흐름까지 제대로 탄 듯, 신호도 죄다 피해 가며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뭐지….”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렇지, 이 정도로 술술 풀려버리면 되레 불안해질 수준.
나는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빌며 평탄한 하루를 기도하였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팀 서울시청의 두 번째 시즌.
“다들 잘 쉬었지?”
“네…!”
“너무 쉬어서 근질거렸어요!”
“…별로.”
오랜만에 모인 방한나, 김나래, 진서원과 마주한 나는, 몰래 그녀들의 능력치를 살피며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서원이만 천장을 뚫었네….’
일전에 마왕군 사천왕 모리모와의 일방적인 승부를 치르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진서원은 이미 천마신공을 마스터한 수준.
아마 조만간 진행될 랭크 테스트에서 S랭크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한나는 그대로고….’
리더인 방한나는 그동안 푹 쉰 듯,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나래가 좀 올랐네?’
따로 훈련이라도 한 건지, 김나래가 전반적으로 성장해있었다.
‘꽤 노력했구나.’
김나래는 우리 팀에서 가장 많은 오퍼를 받았던 핵심 멤버.
다른 멤버들에 비해 B랭크라는 한계치가 명확했으나, 정령술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장차 1부에서도 충분히 먹힐만한 자원이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몸부터 풀고, 가볍게 레벨 테스트랑 피드백만 진행해보자.”
““네!””
그렇게 몸풀기를 지시한 나는, 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뒤쪽에서 일하고 있을 한규리에게 향하였다.
그런데.
“어디 갔지?”
웬일인지 한규리가 노트북을 덩그러니 내버려둔 채로 사라져있었다.
‘급하게 볼일이라도 보러 갔나?’
그녀가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이용하여 훈련 프로그램을 설정했다.
“음…. 레벨은….”
그때.
톡톡─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누군가의 손길.
“어, 왔어요?”
나는 당연히 한규리가 돌아왔으리라 생각하며 손길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 순간.
쿡─
얇은 손가락이 볼을 찔러왔고,
“응. 왔어.”
뒤이어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이 목소리는….’
틀림없는 설주희였다.
“네가 왜 여기에….”
“남자친구 일하는 거 보러 왔지.”
뻔뻔스레 연인 관계를 들먹이며 이유를 둘러댄 그녀는, 마치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 왔는데….
시원하게 모아 묶은 검은색 머리칼과 품이 넓어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원색 반소매 티셔츠.
그리고 허벅지까지 오는 청색 반바지에 편해 보이는 샌들까지.
어디 피서라도 가는 듯한 시원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때? 괜찮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평가를 요구해오는 그녀.
나는 기대에 응해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각박한 평가를 내려주었다.
“별로야.”
물론 이건 거짓말.
지나가다 혹할 정도로 매우 아름다웠다.
“흐응…. 부끄러워하긴.”
그런 내 마음을 진작 알아챈 설주희는 요망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짐짓 담담한 체하며 엄포를 늘어놓았다.
“나, 일 중이야. 내가 일할 때 방해하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곱게 따르지 않으면 페널티를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왜 말을 그렇게 해?”
“…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선공을 날려왔다.
“내가 무슨 방해꾼도 아니고, 왜 보자마자 협박질이야?”
아무래도 대놓고 진상을 부리려는 것 같았다.
“방해꾼 맞잖아. 애들 훈련 봐야 하니까, 당장 돌아가.”
“지금 여자친구보다 다른 여자가 더 소중하다 이거야?”
“어. 그리고 여자친구니 뭐니 떠들고 다니지 마. 소문나니까.”
물론 나는 그런 그녀의 장단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는데….
“어떻게 내 앞에서 대놓고 그딴 말을 지껄여? 안 되겠어. 나 억울해서 그냥 못 넘어가.”
그녀는 심술 맞은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꼬곤 당당하게 말해왔다.
“나랑 데이트해.”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데이트가 목적이었던 게 분명했다.
“싫어.”
“…뭐?”
“데이트는 내가 원할 때만. 그렇게 합의했잖아.”
“그래서 안 하겠다고? 지금 사람 마음 다 질러놓고, 데이트 안 하겠다고?”
“어.”
그 순간.
“흐응….”
설주희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더니….
발라당─
대뜸 바닥에 누워버렸다.
‘미친.’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퍼뜩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찰나.
“데이트해줄 때까지 누워있을 거야.”
귓가를 스치는 섬뜩한 경고.
“내가 어떤 년인지 똑똑히 보여 줄게.”
그녀는 진심이었다.
“미쳤어? 당장 일어…!”
“데이트!”
설주희는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완전히 대자로 뻗어버렸고,
웅성웅성─ 웅성웅성─
“뭐야…? 저거 설주희 아냐?”
“어? 설주희 맞는데?”
“저기 서울시청 부스…. 어? 도지혁?”
“근데 뭐라는 거지?”
“데이트…?”
덕분에 주목이 이끌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미친년이 진짜…!’
황급히 설주희에게 다가선 나는, 그녀를 다그쳐 붙잡아 당겼다.
“너, 이딴 식으로 나오면…!”
“데이트!!!”
바로 그 순간.
“프, 프로듀서님…? 이게 무슨….”
방한나가 나타나 버렸다.
“어, 한나야…! 그게…!”
“너…, 뭔데 내 남친을 찾아?”
“나, 남자 친구요!?”
“설주희! 당장 입 다물고 일어나!”
“…오빠, 뭐해?”
“뭐? 오빠? 오빠아? 도지혁.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
“어머, 도지혁이 바람피웠나 봐…!”
“임아린이랑 사귄다며?”
“그새 헤어졌나?”
순식간에 개판이 돼버린 상황.
‘미치겠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자리를 비웠던 한규리가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
“…한나야, 그,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할 수 있어요…! 아니, 반드시 해낼 거예요…!”
도지혁은 뺨을 짝짝 두드리며 전의를 불태우는 방한나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앞서 난장판이 벌어진 직후.
겨우겨우 협상의 장을 마련한 설주희와 도지혁은 뒤늦게 나타난 한규리의 아이디어로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을 내걸며 극적으로 합의를 이루었다.
바로 설주희와 팀 서울시청의 모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조건은 팀 서울시청이 4분 이상 버틴다면 도지혁의 승.
만약 팀 서울시청이 4분을 넘기지 못한다면 도지혁의 패배다.
이는 도지혁과 설주희를 비롯한 팀 서울시청 멤버들에게도 아주 좋은 기회였다.
도지혁에겐 와일드 카드 격으로 여기는 팀 서울시청 멤버들을 성장시킬 기회였고,
팀 서울시청 멤버들에겐 도지혁을 지킴과 동시에 소원권을 따낼 절호의 기회였으며,
설주희에겐 합벅적으로 도지혁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말 그대로 모두에게 명분이 있는 내기였다.
‘3분을 따냈어야 했는데…. 쯧.’
물론 이 승부는 처음부터 도지혁에게 승기가 기울어있었다.
아무리 격차이가 난다고 해도, 무엇보다 믿음직한 ‘천마’라는 카드가 숨겨져 있었기에.
“준비 끝났으면 빨리 들어오지?”
“갑니다…!”
그렇게 승부 준비가 끝난 후.
훈련장 내부로 들어선 팀 서울시청 멤버들과 설주희.
“다들, 파이팅…!”
“열심히 해서, 꼭 이겨보자!”
“…응.”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며 전의를 단단히 다졌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주희는 조용히 코웃음을 치며 머릿속으로 전략을 구상했다.
‘흥. 건방진 년들.’
이 승부는 몸에 누적된 충격을 합산하여 탈락이 결정된다.
즉, 덜 맞고 많이 때리면 이기는, 아주 단순한 승부다.
삐이익───
이윽고 훈련장 내부에 울려 퍼지는 비프음.
“갑니다!”
방한나는 작전대로 곧장 설주희에게 달려들었다.
적어도 한 방은 버틸 거라는 계산으로, 그녀가 주의를 끄는 사이에 나머지 두 사람이 뒤통수를 치는, 일종의 미끼 작전이었다.
“하아아아앗───!”
“흐응….”
금세 작전을 파악한 설주희는 살짝 물러선 김나래와 진서원을 흘기며 내공을 끌어올렸고,
“프로듀서님은 우리 거예요!!!”
방패를 치켜든 방한나가 죽을 각오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달려든 그 순간.
“건방지네.”
설주희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산산조각 나버린 방패.
“커흑…!”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 방한나는 그대로 날아 훈련장 벽면에 처박혀버렸고,
쿵─!
“하, 한나 탈락…!”
시작 3초만에 탈락해버리고 말았다.
도지혁에게 기울어져 있던 승기가, 설주희에게로 옮겨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