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27화 (127/165)

제 127화

반란 (8)

기습적인 입맞춤이었기 때문일까.

“!”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인지한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며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자.

와락─

설주희가 내 목에 팔을 둘러버리더니, 고개를 살짝 비틀며 다시 입술을 부딪쳐왔다.

“웁…!”

입술을 짓누르는 부드러운 촉감.

그녀는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혀를 쭉 내밀어 왔고,

“츄릅─.”

무방비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일말의 저항도 없이 그녀의 침입을 허락하고 말았다.

“우웁…!”

입안을 마구잡이로 헤집는 말랑한 그녀의 혀끝.

“쯉…츄룹…쥬루릅….”

혀 끝에 탐욕이 잔뜩 느껴지는 게, 마치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얼굴을 스치는 거친 숨결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설주희를 밀어내고자 그녀의 몸에 손을 짚었다.

그런데….

꾸우욱─

왠지 모르게 특유의 탄탄한 저항감에 뒤이어 물컹한 감각이 느껴졌다.

하필 그녀의 가슴을 짚어버린 것이다.

“…….”

맘껏 입안을 헤집던 그녀는 자극을 받은 듯 짧게 몸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길게 늘어지며 옷깃을 적시는 끈적한 타액.

아련히 뜨이며 마주쳐오는 그녀의 시선엔 오묘한 흥분이 가득 맺혀있었고,

살짝 번진 립스틱과 자그맣게 벌려진 입술은, 고운 그녀의 얼굴에 한 떨기 야릇함을 그려냈다.

“…아니야. 시, 실수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실수임을 강조하며 슬며시 손을 뗐다.

하지만.

“…….”

설주희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입술 끝을 낼름 훑으며 목에 두른 팔을 풀었고,

“괜찮아.”

마치 발정기에 접어든 뱀처럼 매끄럽게 손가락을 얽혀오며 아슬아슬하게 속삭여왔다.

“어차피 네 거니까, 마음대로 만져도 돼.”

부드럽게 깍지를 끼곤 요망하게 입술 끝을 끌어올리는 그녀.

스윽─

어느새 다리 사이에 무릎까지 집어넣은 그녀는 탄탄한 허벅지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은근슬쩍 하반신을 자극했고,

“사실 오늘 약 먹고 왔는데….”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함께 당당히 유혹해왔다.

“먹을래?”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

다음 날.

삐비비빅─ 삐비비빅─

귓가에 스치는 휴대폰 알람 소리.

“…으….”

온몸을 잠식한 뻐근함에 천천히 눈을 뜬 나는 근처에 있던 휴대폰 집어 알람을 끄곤, 피부에 감겨오는 푹신함을 즐기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천장이 낯선 게, 아무리 봐도 집은 아닌 것 같았다.

‘…어라? 분명…’

얼룩진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비로소 호텔에서 잠들었음을 알아차린 순간.

“아.”

등골을 쭉 훑어 내리는 오싹한 감각.

꿀꺽─

괜히 침을 삼키며 덮고 있던 이불을 콱 움켜쥔 나는, 혹시 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어, 없네?’

예상과 다르게 텅 빈 옆자리를 보며, 외려 당황스러움에 빠져버리고 말았는데….

터벅─ 터벅─

그때, 침대 너머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기, 깼어?”

설주희였다.

‘망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녀의 애칭에 참담함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발치에 느껴지는 침대의 출렁임.

순식간에 침대로 기어오른 그녀는, 이불 채로 나를 끌어안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잘 잤어?”

말투에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게, 누가 봐도 연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한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위에 올라탄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촉촉함.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 씻은 모양이었다.

“…주희야.”

“자기.”

“뭐?”

“자기라고 불러야지.”

설주희는 히죽히죽 웃으며 내게 애칭을 요구해왔다.

그러고 보니 서로 애칭으로 불렀던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녀의 뜻대로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어제는 어제로 끝난 거야. 선 넘지 마.”

그러자.

“흐응….”

가만히 내려다보던 설주희가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흘리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물어왔다.

“너. 어젯밤에 안에 몇 번이나 싼지 기억나?”

“…뭐? 갑자기 무슨….”

“그 정도면 100% 임신이야. 넌 내 난자가 얼마나 건강한지 모르지?”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뜬구름 잡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그 순간.

“나, 사실 약 안 먹었는데.”

귓가에 파고드는 섬뜩한 한 마디.

“……어?”

“아주 좋다고 싸더라? 바보같이.”

소름 끼치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지, 진짜야? 약을 안 먹었다고?”

“많이 놀랐어?”

“네가 그랬잖아. 분명 약 먹었다고! 무조건 안전하니까, 괜찮다고!”

“글쎄. 분명 약을 받긴 받았는데…,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녀는 나를 놀릴 생각인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이야기를 빙빙 돌리며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너, 진짜…!”

“그렇게 불안하면 어디 배라도 한 대 쳐 보던가. 어제 엉덩이는 잘 때리던데, 그 정도면 안 되겠어?”

“야이…!”

끝내 그녀는 내 반응이 우스운 듯 웃음을 터트리며 약을 먹었다고 이실직고했고,

정 불안하면 보는 앞에서 사후 약까지 먹어주겠다며, 흥분한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장난에도 정도가 있지,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다시는 그런 장난 치지 마.”

그렇게 겨우겨우 마음을 놓으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길 잠시.

킥킥 웃으며 속옷을 입던 그녀가, 문뜩 떠올랐다는 듯 홍유라의 이야기를 꺼내왔다.

“유라랑도 할 거야?”

“뭐?”

“우리 공평하게 대해 준다며. 솔직히 난 걔랑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왜. 내가 못할 말 했어? 양다리 걸치겠다고 한 건 너잖아.”

“…….”

“홍유라, 진짜 걔 무서운 년이야. 가만히 보면, 얌전한 얼굴로 할 거 다 하고 다닌다니까? 진짜 약 먹었다 거짓말치고 몰래 임신할 년이니까, 함부로 속지 마.”

진심을 담아 홍유라에 관한 조심성을 경고하는 그녀.

‘홍유라….’

나는 언젠가 하렘 계획을 들이밀었던 홍유라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떠올렸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얌전히 지내.”

그녀를 뒤로한 채, 출근 준비를 위해 욕실로 향했다.

*

얼마 후.

여느 때와 같이 진행된 팀 서울시청의 훈련.

한창 세트를 진행하고 휴식을 취하던 방한나는, 잠시 김나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진서원에게 말을 건넸다.

“서원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프로듀서님이 설주희랑 만나는 거…!”

방한나는 도지혁이 설주희와 데이트한 이후, 어딘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느꼈는데….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진서원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싫은데.”

“싫어? 정말로…?”

“…응. 그 돼지, 마음에 안 들어.”

진서원은 설주희를 ‘돼지’라 부르며 유난히 경계했다.

그러나 이건 설주희 자체를 싫어하는 거지, 도지혁이 설주희와 만나는 것 자체에는 개의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저, 정말 뭔가 있는 건가….’

방한나는 자연스레 진서원과 도지혁의 유착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점점 확실해지는 두 사람의 관계에, 묵직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나는….’

설주희와의 승부에서도 활약하지 못하고, 도지혁과 개인적으로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마냥 어린애 같았던 진서원마저도 앞서나가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여전히 뒤처져있다.

힘만 더럽게 세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진시원에게 밀려버린 것이다.

이러다간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도태돼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방한나는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데 그때.

“얘, 얘들아…! 크, 큰일 났어…!”

볼일을 보러 잠시 자리를 비웠던 김나래가 황급히 달려와 두 사람을 불렀다.

“…?”

“큰일이요…? 무슨 일 있어요…?”

진서원과 방한나는 헐레벌떡 다가온 김나래를 바라보며 물음표를 띄웠고,

“네?! 저, 정말이요…?!”

“……?”

“으, 응…!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자초지종을 듣곤 깜짝 놀란 방한나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진서원을 이끌고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제발…. 제발…!’

방한나는 다급히 발을 옮기면서도 김나래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기도했다.

이미 한없이 뒤처진 상황인데, 여기서 더 뒤처질 순 없기에.

그렇게 빌며 힘차게 발을 옮기길 잠시.

웅성웅성─ 웅성웅성─

팀 서울시청 멤버들은 훈련장 입구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말았다.

“와…. 진짜 뭐야? 뭐,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아니, 저 정도면 오히려 쫄릴 거 같은데. 괜히 싸움나면 진짜 칼부림 수준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저 정도면 나라를 팔아먹은 게 맞지.”

“이러다가 우리도 휘말려 죽는 거 아냐?”

“에이…. 도지혁이 막아주겠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불안한 목소리.

방한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에 침을 꼴깍─ 삼키곤 천천히 인파를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고,

“야…! 제발…!”

인파 너머로 들려오는 도지혁의 간절한 목소리에 주먹을 꼬옥 움켜쥐며 조심스레 현장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데, 데이트, 해줘…!”

우아한 옷차림으로 땅바닥에 발랑 드러누워 데이트를 요구하는 홍유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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