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10화 (110/165)

팀원들과의 업무를 마친 후.

사무실에 앉혀놓은 설주희를 뒤로한 나는, 예정된 대로 이혜리와 볼일부터 마치기로 했다.

“…아, 안 가시면 안 돼요…? 급한 거 아니면….”

“그냥 내가 갈까? 아니, 그냥 오후에 이야기해도 되잖아…!”

설주희와 사무실에 남는 게 껄끄러운 듯, 한규리와 김준형이 나를 붙잡기도 했지만….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일을 끝내는 게 낫다는 말을 덧붙이며 조용히 이혜리의 사무실로 향했다.

“어떻게 잘 왔네?”

이혜리는 사무실에 나타난 나를 보곤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설주희에게 붙잡혀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듯한 눈치였다.

“누가 불렀는데, 당연히 와야지.”

“흐응…. 그런다고 내가 좋아할 거 같니?”

“싫어?”

“아니, 너무 좋아.”

곧이어 나타난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시원한 차를 건네받은 나는, 에어컨 바람에 건조해진 목을 축이며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그럼…, 이제 일 이야기 좀 해볼까?”

“리스트랑 대략적인 내용만 정리해뒀어. 적당히 골라서 진행하면 될 거야.”

이혜리는 내게 큼직큼직한 업체들이 적힌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금액이 꽤 크네.’

그녀가 주선해온 스폰서들은 대부분 세진 그룹과 연관된 곳으로 이루어졌다.

업체마다 온갖 할인이나 혜택 등 수많은 조건이 종류별로 달려있었고,

모기업이 모기업이라 그런지, 영세한 팀이라면 매우 혹할만한 금액들이 적혀 있었는데….

“스읍…. 이걸 당장 받아도 괜찮나 모르겠네.”

이 조건들을 ‘팀 서울시청’에 붙이는 게 맞는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느 빠르면 이번 시즌, 늦으면 다음 시즌에 본격적으로 팀을 옮길 생각이다.

즉, 서울시 소속 ‘팀 서울시청’이 아니라 민간 소속의 새로운 팀을 꾸릴 생각이기에, 당장 투자 계약을 맺는 게 미묘하다는 뜻이다.

“정 그러면, 반년 단위로 갱신 조건을 걸어도 괜찮아.”

이혜리는 내 뜻을 금방 이해한 듯 바로 적절한 조건을 덧붙어왔다.

현 팀에 있을 동안만 계약을 유지할 수 있는 조항을 추가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좀 아쉬운데.’

그러나 덥석 조건을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 투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사실상 세진 소속으로 새로운 팀을 꾸리는 게 확정되기에.

이미 세진 쪽으로 마음이 꽤 기운 상태긴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글쎄….”

“…아직도 나랑 일하는 게 고민되니?”

눈치 빠른 이혜리는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금세 알아챈 듯 야속하다는 눈빛을 보내왔고,

나는 리스트를 슬쩍 내려놓곤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이게 직업병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네.”

“너…. 그거 되게 기분 나쁜 거 아니? 네가 그럴 때마다 우리 길드가 아쉽다는 소리로 들린다고.”

“에이. 세진 길드가 아쉬운 건 아니야. 세진이 아쉬우면 대체 어느 길드가 날 만족시키겠어?”

“차라리 길드를 하나 파지 그래? 네가 한번 단장이 돼봐야, 내 마음을 알지.”

“난 프로듀싱 전문이지, 경영은 못 해.”

“…안 만든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안 하는구나?”

“아니, 뭐…. 굴지의 대형 길드 단장님께서 손수 경영을 맡아주면 아예 못할 것도 없지.”

“내 남편 길드라면 맡아 줄 수는 있는데?”

“내가 졌다. 길드 안 만들게.”

이혜리는 내 포기 선언을 듣곤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고,

나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헤프게 웃으며 솔직히 말을 꺼내보았다.

“터놓고 말해서…, 당장은 세진하고 일할 생각이긴 해. 여기만큼 마음에 드는 곳이 없거든.”

“…정말이니?”

“정말이야. 진짜 안 가곤 못 배길 조건이 뿅!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면 세진이랑 할걸?”

의문문으로 끝나긴 했지만, 사실상 구두 계약에 가까운 발언.

이혜리는 내 발언에 기분이 풀린 듯 묘하게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스윽-

대뜸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을 집었다.

“……?”

속셈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가만히 지켜보던 그 순간.

[ 터놓고 말해서…. 당장은 세진하고 일할 생각이긴 해. ]

휴대폰 스피커로부터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혜리가 그새 대화를 녹음하고 있던 것이다.

“구두 계약도 효력 있는 거 알지?”

썩 흡족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엉덩이 옆에 내려두는 그녀.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그녀의 행동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미쳤어?”

“몰랐니? 원래 사랑에 빠진 여자는 다 미치는 법이야.”

“허….”

“뭐…, 나도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법정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어. …당분간은 말이야.”

나도 이혜리가 진심으로 공격하진 않으리라 생각하긴 한다.

아마 그녀에게도 나름의 보험이 필요했던 거겠지.

“…마음대로 해.”

그렇게 그녀의 요망한 웃음과 함께 몇 가지 협의를 마친 후.

드디어 돌아온 사무실.

‘벌써 점심이네. …밥이나 먹이고 보내야겠다.’

곧 점심시간인 걸 확인한 나는, 일단 설주희부터 데리고 나가자는 생각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나 왔….”

그런데…..

“어머, 진짜요!?”

“와…. 소문이 진짜였구나.”

“연예인들이 다 그렇죠.”

웬일인지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나는 확연히 달라진 세 사람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레 다가섰고,

“아, 오셨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아 보이는 한규리의 모습에 의문을 품으며 설주희를 흘끔 바라보았다.

“어, 왔어?”

고개를 돌리며 뻔뻔할 정도로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오는 설주희.

아무래도 내가 없는 사이에 팀원들을 꾀어낸 모양이었다.

“꽤 늦었네. 이혜리랑 있는 게 꽤 좋았나 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짐이나 챙겨. 점심 사줄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팀원 분들은 안 데려가?”

“…뭐?”

“같은 팀인데. 같이 가면 좋잖아.”

뜬금없이 팀원들을 물고 늘어지며 합석을 제안해왔는데….

“괜찮아요! 저희는 따로 먹으면 돼서…!”

“예, 예! 그냥 두 분이서 편하게 드시고, 천천히 쉬었다가 오세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듯, 팀원들은 송구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합석을 거부해왔고,

“그럼, 다음에 같이 먹어요. 요 근처에 괜찮은 식당 알거든요. 그땐 제가 쏠게요.”

“아유, 그럼 감사하죠!”

“와…! 기대할게요!”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며 멋대로 이야기를 맺어버렸다.

‘어이가 없네….’

눈치 보인다며 빨리 보내라 할 땐 언제고, 그새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빨리 가자.”

그렇게 설주희를 데리고 부랴부랴 사무실 나서는 길.

“흐흥….”

나는 콧노래까지 부를 정도로 기뻐 보이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갑자기 사무실에 나타나선 이혜리와 신경전을 펼치곤 팀원들에게 점수까지 땄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이긴 했지만, 이번엔 무슨 속셈인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설주희. 오후엔 할 일 많으니까, 점심만 먹고 돌아가.”

“걱정 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정말?”

그녀는 정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흘긋 시선을 보내오며 말해왔다.

“오늘은 그냥 네가 어떤 곳에서 일하나 궁금해서 찾아온 거야. 보니까, 팀원들도 착하고, 꽤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더라. …이혜리하고 가까운 것만 빼면.”

‘무슨 정찰이라도 하러 온 건가…?’

그렇게 설주희의 행동에 의문을 품으며 사옥 로비를 빠져나간 그때.

“…….”

설주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기 시작했다.

“왜?”

나는 별생각 없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옮겨보았고,

‘…어?’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 지혁아…?”

임아린이었다.

*

여자에겐 밝혀지지 않은 제 6의 감각, 흔히 ‘촉’이라 부르는 정체불명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한다.

마법사인 임아린은 주변에서 다른 여성들이 촉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떠들 때마다, 내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적당히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지, 지혁이가 왜….’

눈앞에 나타난 설주희와 도지혁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네가 왜 여기에….”

물론 당황스럽긴 도지혁도 마찬가지.

하필 설주희와 있을 때, 그것도 하필 임아린과 마주쳐버린 도지혁은 등골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끼고 말았다.

‘…좆됐다….’

그렇게 도지혁과 임아린이 각자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아 얼어붙어 있길 잠시.

“흐응…?”

눈치를 살피던 설주희가 도지혁의 팔에 슬쩍 팔짱을 껴버렸다.

스윽-

화들짝 놀란 도지혁은 다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고,

“야, 야!”

설주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곤 임아린을 꼬나보며 나지막이 선수를 쳤다.

“오랜만이네?”

수많은 전장과 생사를 넘어온 설주희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임아린보다 훨씬 우위에 섰다는 사실을.

“미안한데, 우리가 지금 바빠서 말이야.”

그녀는 수많은 감정이 담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도지혁에게 찰싹 들러붙었고,

“지, 지혁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한 임아린의 동공은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는데….

“…설주희. 적당히 해.”

결국,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던 도지혁은, 애써 차분함을 되찾으며 설주희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곤 임아린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어, 어? 그, 그게…. 그냥…. 보, 보고 싶어서….”

묘하게 차가운 도지혁의 반응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임아린은 횡설수설하고 말았고,

도지혁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그의 눈엔, 그런 임아린의 모습조차도 그저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 근데…, 왜 둘이 같이 나오는 거야…?”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은 임아린은 설주희를 가리키며 도지혁을 추궁해보았다.

선약이 있다는 남자친구를 몰래 만나러 왔더니, 대놓고 남자친구를 노리는 여자와 만난 상황.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임아린에게도 나름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잠깐 일 때문에 만났어. …혹시 이야기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도지혁은 단호하게 부정하며 선을 그어버렸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더니….

“…오늘은 좀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 …가자.”

이내 대화를 피하듯 설주희를 데리곤 자리를 휙 떠버렸다.

“…지, 지혁아…! 자, 잠시만…!”

퍼뜩 정신을 차린 임아린은 다급히 도지혁을 붙잡으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설주희만 슬쩍 고개를 돌리며 따라오는 임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흥.”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곤 보란 듯이 도지혁과 걸음을 맞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아린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사라진 시간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애틋한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지, 지혁이가, 왜….’

임아린은 갑자기 도지혁이 자신을 천대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란히 거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임아린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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