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11화 (111/165)

어느 순간 목적지를 잃고 멍하니 길을 거닐던 그때.

“뭐 먹을래? 오늘 예쁜 짓 했으니까, 내가 맛있는 걸로 쏠게! 아니다. 차라리 가까운 호텔 잡고 편하게 시켜 먹을까?”

뭐가 그리 기쁜지, 설주희는 연신 밝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말을 걸어왔는데….

“…….”

한창 형용하기 힘든 심란함에 휩싸여 있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멍하니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미치겠네….’

임아린에게 일방적으로 다음 기회를 통보하며 발길을 옮기던 그 순간.

불안함에 젖어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눈빛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연기였을 거야…. 분명 그랬을 거야….’

나는 그녀의 그런 애처로운 눈빛마저도 하나의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사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살인까지 저질렀던 그녀였기에.

여태껏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기만해온 행동을 생각해보면, 외려 당연하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두커니 선 그녀를 지나쳤던 그 찰나에, 그녀가 보여온 모습은 가슴이 무거워질 정도로 가련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녀의 속내를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어서 깊은 정이 들어버린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그녀의 혐의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나 스스로도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 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하아….”

그렇게 심란한 마음에 내심 머리를 싸맨 채로 멍하니 설주희의 꽁무니를 따라가길 얼마나 지났을까.

“오늘은 여기서 먹자.”

설주희는 사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다른 손님들과 동떨어진 작은 룸에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몇 번 와본 듯 익숙하게 메뉴를 뒤지며 내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뭐 먹을래? 전에 와봤는데, 여기 음식 다 괜찮아.”

“…아무거나 시켜줘.”

물론 입맛이 없던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겨를이 없었고,

“…그럼, 이것저것 시켜서 같이 나눠 먹자.”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알아서 음식을 주문하였다.

“…….”

그렇게 설주희의 주도로 음식 주문을 모두 마친 뒤.

곧이어 직원이 내온 탄산수를 조용히 홀짝이며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슬쩍 잔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물어왔다.

“그 자료 봤어?”

“……뭐?”

“임아린 자료. 그거 본 거 아냐?”

은근한 기대가 깔린 그녀의 목소리.

흘끔 시선을 옮겨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대답을 아끼곤 조용히 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흐응….”

설주희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요염한 콧소리를 내며 진한 미소를 그렸고,

마치 묵은 체증이 내려간 사람처럼 후련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네왔는데….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솔직히 그걸 보고도 정신 못 차렸으면, 진짜 실망했을 거야.”

“…….”

“아예 거기서 뺨따귀를 한 대 후렸으면, 더 마음에 들었을 거 같긴 한데…. 뭐, 그 정도면 나름 칭찬할만했어.”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기특하다고 칭찬해오는 그녀의 행동에 무심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실 내 기준에선 설주희도 임아린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얌전히 마주 앉아있는 건, 그녀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기에.

그리고 앞서 그녀가 보여온 충격적인 모습들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주인공이 아니었고, 그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멋대로 합동결혼식을 꾸민 것도 모자라, 강제로 범하기까지 한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겠는가?

“설주희.”

“왜?”

“뭔가 착각하는 거 같아서 말하는데, 솔직히 내 입장에선 너나 임아린이나 똑같아.”

“…뭐라고?”

일순간 싸늘하게 굳어버리는 설주희의 얼굴.

나는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거니까, 얌전히 밥이나 먹고 돌아가.”

한기가 폴폴 풍기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보내오던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속삭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치료…덜 됐…?”

똑똑-

“!”

곧이어 문밖에서 두드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표정을 풀어버렸고,

“뭐어…. 그래. 오늘은 볼일 다 봤으니까, 곱게 돌아갈게. 대신 같이 카페도 가는 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카페 동행 조건을 덧붙이며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어왔다.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그런 그녀의 뻔뻔한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말았으나….

이내 곱게 돌아가는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한편.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임아린은, 도지혁이 남기고 간 옷을 입곤 숨겨진 방에 기어들어,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도지혁이 말했던 대로,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속셈이었다.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분명 지혁이가 나중에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그녀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궁지에 내몰린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절벽에 겨우 걸친듯한, 매우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아직 식당이야. 응. 겨우 밥만 먹고 있을 뿐이야. 밥 정도는 누구든지 먹을 수 있잖아. 지혁이는 정에 약하니까, 그냥 점심만 먹고 헤어질 거야. 틀림없어.’

임아린은 1분 단위로 마법을 갱신해가며 도지혁과 설주희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설주희에게 끌려 강제로 호텔이라도 들어간다면 자신이 곧바로 구해 줄 생각으로,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전이 마법과 무기까지 옆에 준비해두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

임아린의 표정이 순간 긴장으로 물들었다.

도지혁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꿀꺽-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곤 마력을 끌어올리며 갱신 주기를 훨씬 더 짧게 전개하였다.

“…….”

식사를 마친 듯, 식당을 나와 이동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

두 사람은 목적지를 정해둔 듯 계속해서 길을 거닐었고,

임아린은 재빨리 모니터에 지도를 띄워, 도지혁이 걷고 있는 길을 따라가 보았는데….

“…어?”

잠시 후,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을 확인한 임아린의 얼굴에 순간 핏기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고급 호텔 앞.

그것도 하필 임아린이 아주 잘 알고 있는 호텔 앞이었다.

‘…어, 어라?’

임아린은 무심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시간 속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로 호텔로 사라지던 설주희와 도지혁의 모습을.

‘…아, 안 돼….’

그녀는 스스로가 떠올린 회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고,

‘지, 지혁이를 구해야 해…!’

당장 도지혁을 구하기 위해 곧장 전이 마법을 사용하여 설주희를 급습하려는 찰나.

“!”

때마침 갱신된 두 사람의 움직임에 가까스로 전이 마법을 멈추었는데….

‘…어, 어디 가려는 거지…?’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한 임아린은 핏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두 사람의 위치를 추적해보았다.

그리고….

‘…아….’

잠시 후, 인근의 대형 카페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위치를 확인하곤 간신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풀썩-

긴장이 탁- 풀려버린 임아린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그마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법을 사용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지혁아….”

임아린은 마치 강가에 내놓은 아이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에, 미움을 사더라도 무력을 이용하여 안전하게 그를 보호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아아….”

그렇게 도지혁을 감시…. 아니, 보호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점심이 끝날 즈음에 맞춰 갈라지는 도지혁과 설주희.

아무래도 무사히 헤어진 것 같았다.

“휴우….”

물론 완전히 마음을 놓긴 아직 이르다.

선약도 끝났겠다, 도지혁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진 확실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제발…, 빨리 연락해줘….’

임아린은 한층 더 초조해진 마음으로 휴대폰을 붙잡으며 도지혁의 연락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한 시간.

‘마, 많이 바쁜가…?’

그리고 또 한 시간.

‘…왜, 왜 연락이 없지…?’

그리고 또 한 시간이 지나자.

“…….”

어느새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린 임아린은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질근질근 깨물며 충혈된 눈으로 휴대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연락이 없지? 사무실에 있는데? 휴대폰을 볼 시간이 없는 건가? 배터리가 다 떨어진 건가? 혹시 충전기를 잃어버렸나? 설마 나한테 연락하는 걸 잊어버린 건가?’

높게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 고통스럽고, 잃을 게 많을수록 겁쟁이가 되는 법.

이미 과분할 정도로 행복을 껴안았던 임아린은 산들바람에 흔들릴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고,

‘왜 연락이 없지? 왜 연락이 없지? 왜 연락이 없지? 왜 연락이 없지? 왜 연락이 없지?’

극심한 스트레스에 휩쓸려, 극단적인 사고에까지 치닫고 말았다.

‘잘라버릴….’

그 순간.

“!”

임아린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자친구….”

바로 자신이 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비로소 그에게 얼마든지 먼저 연락을 해도 괜찮은 관계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했던가.

고작 그 정도 명분조차 쉽사리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되돌아본 임아린은, 어느덧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멍청해졌음을 실감하고 말았다.

‘…이, 일단 연락부터…!’

임아린은 그렇게 반쯤 정신을 차리곤 재빨리 메신저를 켜 도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여자친구라도 일 중에 방해를 하면 곤란하니, 딱 한 통만.

[ 지혁아. 일 열심히 하고 있어? 아까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거 같아. 갑자기 사무실까지 찾아가서 정말 미안해. 근데 너무 보고 싶어서 참지 못했어. 지금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저번에 남긴 티셔츠 입으면서 꾹 참고 있어. 사실 아까 네가 주희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가슴이 막 터져버릴 거 같았다? 근데 어떻게든 열심히 참았어. 진짜 죽을 뻔했는데, 네 얼굴 생각하니까 참아지더라. 그리고 네가 먼저 연락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먼저 연락해서 정말 미안해. 방해였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꾹 참아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눈물이 막 나와서 못 참고 메시지 보냈어. 한심한 여자라 미안…. 그 대신 주희랑 왜 만났는지 안 물어볼게. 나는 너 믿으니까, 얼마든지 만나도 괜찮아! 대신 나한테 이야기만 해주면 좋을 거 같아…. 아무튼 일 열심히 하고, 끝나자마자 연락해줘. 알았지? 사랑해♥ ]

“헤헷….”

그렇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낸 임아린은, 손톱에서 샌 핏줄기가 휴대폰을 더럽히는 줄도 모르고 도지혁에게 답장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어느덧 도지혁이 퇴근할 즈음.

띠링- 띠링-

짧은 진동과 함께 임아린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도지혁으로부터 답장이 온 것이다.

“와, 왔다…!”

임아린은 허겁지겁 휴대폰 잠금을 풀어 메신저를 열어보았고,

반사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도지혁이 보내온 메시지를 다급히 읽어보았는데….

[ 아린아 ]

[ 이런 식으로 갑자기 전하게 돼서 미안해. ]

그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에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 어라?”

몹시 당황한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고 있을 즈음.

띠링-

마치 고민이라도 한 듯, 뒤늦게 도착한 한 통의 메시지.

[ 우리 당분간 서로 시간 좀 갖자. ]

사실상 이별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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