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09화 (109/165)

‘…뭐지. 아니, 진짜 뭐지 이거…?’

서로를 조용히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 설주희와 이혜리.

나는 눈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정신이 살짝 혼미해지고 말았다.

‘설주희가 왜 여기에….’

아마 그녀는 나를 보러 사무실까지 찾아왔으리라.

암시도 풀렸겠다, 평소 그녀의 거침없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썩 그렇게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우리 팀 서울시청은 세진 길드와 협력 관계를 이루는 조건으로 세진 길드 건물에 자리를 빌린 상황.

무려 세진 길드 본거지에 설주희가 찾아온 것이다.

천화와 세진은 하위 계열사끼리도 으르렁거리는 라이벌 관계인데….

천화의 간판스타인 설주희가 이곳에 직접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특종 기사 감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니?”

그때, 먼저 선수를 치며 선공을 날리는 이혜리.

그녀는 설주희를 대놓고 훑어보며 나긋한 말투로 은근히 비꼬았다.

“보아하니,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온 거 같은데…. 꽤 한가롭나 보네?”

그러자.

“…….”

도발이 먹힌 듯, 일순간 설주희의 얼굴에 살벌한 기색이 드러났는데….

“흥.”

그녀는 이내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곤 삐딱한 자세로 당당하게 받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넌. 그동안 너무 바빴나 봐? 얼마나 바빴으면 관리도 못 했을까?”

설주희는 가소롭다는 듯 검지를 치켜들곤 이혜리의 얼굴을 가리키며 조곤조곤 쏘아붙였다.

“얼굴에 독기 아주 가득한 게…. 부하 직원들이 얼마나 고생할지 뻔하네. 평소처럼 호빠나 다니면서 풀지 그래?”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은 지켜보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웅성웅성─ 웅성웅성─

“…….”

그런 그녀를 빤히 노려보던 이혜리는, 이내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천박한 말투는 여전하네. 우리 애들한테 깨지고 활동 접었다길래 변한 줄 알았는데…. 여전한 거 같아서 다행이구나.”

“뭐? 우리 애들…? 하!”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설주희.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저기, 네가 뭘 단단히 착각하는 거 같은데. 너희가 이긴 건 전부 지혁이 덕분이야. 니네 실력으로 이긴 게 아니라고!”

“…그 도지혁이 지금 누구랑 일하는진 알고 지껄이는 거지?”

물론 쉽게 당해 줄 이혜리도 아니었다.

‘…안 되겠다.’

점점 불타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보다 못한 나는, 그녀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며 싸움을 중재했다.

“…얘들아. 이제 그만하자.”

그 순간.

“…….”

얌전히 입을 다물며 서로를 쏘아보곤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이혜리와 설주희.

다행히 두 사람은 생각보다 순순히 꼬리를 내려주었는데….

웅성웅성─ 웅성웅성─

“와…. 뭐야? 설주희가 말을 듣네?”

“퀸즈를 어떻게 운영했나 했더니….”

“도 프로듀서가 단장님 억제기였어?”

“괜히 편애하던 게 아니구나….”

외려 그 모습 지켜보던 직원들은 깜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여왔고,

‘이거…. 소문 못 막겠는데.’

그런 직원들의 반응에 살짝 곤란함을 느낀 나는, 일단 상황을 수습하고자 설주희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일부터 끝내고 보자.”

“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먼저 연락이라도 줬으면 몰라도….”

“너…. 지금 멋대로 찾아왔으면, 입 다물고 조용히 기다리라 이거야?”

“나쁘게 해석하면, 맞아.”

이러나저러나 여기는 내 일터다.

나는 팀 서울시청의 프로듀서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기약 없이 찾아온 손님에게 먼저 시간을 낼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다.

“…좋아. 얼마든지 기다려 줄게.”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설주희는 보란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혜리를 흘끔 쏘아보곤, 당당히 사무실 안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기다릴 생각인 것 같았다.

“어…. 프, 프로듀서님…?”

“어어? 저대로 그냥 둬…?”

옆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한규리와 김준형은 당당히 사무실에 자리를 잡는 설주희를 부며 다급히 나를 붙잡았지만….

“…조금만 양해해 줘요. 최대한 빨리 데리고 나갈게요.”

나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며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사실 그녀를 사무실에 앉혀두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설주희가 사무실에 눌러앉은 게 한두 번도 아니기도 하고,

정말로 여기서까지 내쫓으면 또 무슨 행패를 벌일지도 모르기에, 이 정도는 봐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

상황을 살피던 이혜리가 눈치껏 사무실로 돌아간 사이.

뒤이어 시작된 팀 서울시청의 업무.

“나래한테 오퍼가 또 들어왔는데, 이건 어떻게 할까요?”

“어디서 왔죠?”

“KS 길드, 러블리요. 조건은 3번 자료에 정리해뒀고, 이적료 40억에….”

도지혁은 팀원들과 옹기종기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

한쪽 구석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훔쳐보던 설주희는, 오랜만에 보는 도지혁의 모습에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일할 때 제일 멋있어.’

설주희는 오래전부터 도지혁이 일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일에 집중하여 진지한 표정을 짓다가도, 뭔가 잘 풀리지 않은 듯 살짝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한 번씩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하는,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평소 막역한 친구처럼 대하기만 하는 그에게선 볼 수 없었기에, 종종 사무실에 찾아와 그가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곤 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설주희는 슬쩍 다리를 꼬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사무실에 찾아온 것으로 본격적인 선전포고는 성공리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으니, 정말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도지혁에게 맹공을 퍼부어도 문제가 없는 상황.

문제는….

주제도 모르고 도지혁의 주변을 맴도는 망령들이다.

‘저 여자는 관심이 없는 거 같고….’

설주희는 도지혁의 대각선에 앉은 한규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한규리는 도지혁과 꽤 친근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를 이성으로 느끼는 여성들 특유의 질척거림이 묻어나지 않았다.

즉, 한규리는 견제 대상 외.

오히려 자신이 잘 보여야 할 대상에 포함해야 할 정도였다.

‘그 앞은 뭐….’

한규리로부터 시선을 거둔 설주희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김준형을 바라보았다.

동성애자가 아닌 김준형도 당연히 견제 대상 외.

설주희의 기준으론 팀 서울시청의 팀원 중에선 딱히 견제할만한 대상은 없었다.

‘그 멤버란 년들이 문제인데….’

아직 진서원과 방한나를 제대로 맞닥뜨리지 않았던 설주희는 가장 유력한 견제 후보로 서울시청의 멤버들을 지목했다.

도지혁의 프로듀싱은 특유의 압도적인 데이터와 끈끈한 신뢰감, 그리고 어장관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지난 10년 가까이 직접 어장에서 헤엄쳐온 설주희는 도지혁이 어떻게 팀을 이끌었을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고,

이미 그녀들이 도지혁에게 푹 빠졌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해낸 것이다.

‘미리 싹을 잘라버려야 하는데…. 이혜리, 개 같은 년도 문제네.’

설주희는 가장 큰 걸림돌인 이혜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구둣발을 까딱였다.

이혜리는 현재 도지혁과 협력을 하는, 정확히는 도지혁이 이혜리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다.

계약으로 약점이 잡혀버린 도지혁에게서 이혜리를 떼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

당장 오늘만 해도 사무실에 같이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꽤 업무적으로 깊이 연결돼있는 게 분명했다.

‘죽일 수도 없고….’

그렇게 설주희가 회의 중인 도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그때.

“…프, 프로듀서님….”

한규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무심코 몸을 움츠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너무 눈치 보여요…!”

자신을 동료로 삼으려는 줄도 모르고, 설주희가 노려본다고 착각한 것이다.

“…규리 씨. 저는 아까 눈까지 마주쳤다고요.”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준형도 불편하긴 마찬가지.

이미 임아린에게 붙어먹은 전적이 있던 그는, 더더욱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는데….

“…다들 조금만 참아요. 제가 조만간 밥이라도 쏠게요.”

도지혁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설주희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팀원들을 다독이곤 다시 업무를 진행하였다.

*

한편.

앙증맞은 앞치마를 두른 임아린은 태블릿에 정리한 도시락 반찬 목록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음…. 이 정도면 되겠지?”

그녀는 손수 도시락을 싸서 도지혁의 사무실로 찾아가, 정실로서의 면모를 맘껏 드러낼 계획이었는데….

도지혁을 공략하기 위해 밤새 고민한 그녀가 내놓은 방안은 바로 정공법.

차근차근 도지혁과 결혼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임아린은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며 수많은 계획을 세워보았다.

극단적으론 납치 감금부터 시작해서….

반대로 자신의 다리를 잘라, 도지혁의 동정심을 얻는 것까지.

그 많은 계획 중에서 고른 게, 바로 정공법이었다.

물론 마음 같아선 설주희와 홍유라를 물리적으로 죽이든 사회적으로 말살시키든 도지혁을 고립시키는 게 최선이지만,

도지혁이 두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버린 지금으로선 섣불리 움직였다간 그대로 역풍을 맞아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안위를 최대한 보장하며 움직이려면, 당연히 수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

결국, ‘연인’이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공격적으로 도지혁과 결혼 각을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물어보고….”

임아린은 도시락 싸기에 앞서, 미리 도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약속을 잡아보았다.

[ 오늘 점심에 시간 있어? ]

[ 도시락 싸서 가려고! 같이 먹자…! ]

멋대로 찾아가서 먹자고 할 수도 있지만, 혹여 자신이 귀찮은 여자로 취급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

임아린은 곧이어 돌아온 도지혁의 답장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말았다.

[ 미안.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다음에 먹자. ]

아무리 가까운 사이어도 선약을 우선시하던 도지혁이었기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지…. 이 불안함은…?’

왠지 모를 불쾌함이 임아린의 마음을 스멀스멀 잠식하기 시작했고,

‘…안 되겠다….’

끝내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으며 직접 사무실에 찾아가기로 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