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으음….”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난 나는, 묘하게 뻐근한 몸을 천천히 일으켜보았다.
“…으….”
지끈지끈한 두통과 온몸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알코올 기운.
침대 대신 사용하던 소파 앞에 놓인 낮은 탁상엔 선물로 받아둔 위스키들과 냉장고 깊숙이 잠들어있던 맥주 캔들이 나뒹굴었고,
먹다 남은 임아린표 반찬들이 안주 옆에 놓여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꺼냈지?’
임아린이 해둔 반찬들을 싹 버린다고 한쪽에 꺼내뒀던 건 기억나는데, 이게 왜 탁상에 놓인 지 모르겠다.
“…하아….”
알코올 섞인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댄 나는, 거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푸르스름한 하늘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늘이 푸르다는 건 창밖에 해가 떴다는 뜻.
다시 시선을 옮겨 거실 벽면에 달린 전자시계를 흘끔 바라보니, ‘06:12’라는 숫자가 띄워져 있었다.
곧 있으면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연차 쓸까….’
실로 오랜만에 출근하기 싫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배어 나온다.
딱히 일하기 싫은 건 아니었으나, 출근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귀찮게 느껴졌다.
“…으….”
사실 정기 연차를 쓰지 않고도, 쉬려면 얼마든지 쉴 수는 있다.
공휴일과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같이 출근해야 하는 한규리나 김준형과는 달리, 나는 공무원도 아니고, 출근하지 않는다며 나무랄 상사도 없으니까.
그냥 적당한 핑계를 대고 쉬어버려도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 처리할 거 많은데….’
막상 쉬려고 하니, 못다 한 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최근 퀸즈의 멤버들에게 정신이 쏠려있긴 하나, 사실 지금은 팀 서울시청에게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시청은 지난 데뷔 시즌을 거치며 ‘주목할만한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쟁취해냈다.
이는 수많은 팀과 관련 기업들의 머릿속에 팀 서울시청을 확실히 각인시켰다는 뜻이고,
우리는 돌아오는 시즌에 단순한 신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그야말로 지금의 행보가 앞으로 팀 서울시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다.
물론….
세계 멸망을 막아내지 못하면, 모든 게 아무래도 좋을 일이긴 하다.
9월에 터질 서해 게이트도 그렇고, 이번에 발견된 마왕군의 근거지도 그렇고.
당장 이것들부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나라 전체가 엎어질 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원작에서 한국이 그렇게 망했으니까.
‘작가 놈이 급발진만 안 했어도….’
속으로 작가를 욕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쉰 나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몸을 채찍질해가며 엉망이 된 술상을 정리했고,
“…단속 걸리겠는데….”
적당히 출근 준비를 마친 뒤,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근길에 올랐다.
*
텅 빈 사무실.
편의점에서 사온 해장용 컵라면과 헛개 음료를 들고 구석 회의실에 자리를 잡은 나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라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
그러던 그때.
벌컥─
투명한 회의실 창밖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응…? 어, 프로듀서님!”
한규리였다.
나는 적당히 손을 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짐을 적당히 내려놓곤 곧바로 회의실에 들어와 걱정스레 말을 건네왔다.
“어제 술이라도 드셨어요? 아침부터 컵라면을….”
“뭐…. 그렇게 됐습니다.”
“세상에….”
“괜히 냄새 풍겨서 미안해요. 사람들 많은 라운지에서 아침부터 혼자 컵라면 먹기엔 좀 그렇더라고요.”
“아니, 뭐, 저야 괜찮긴 한데…. 차라리 저한테 말해서 하루 쉬시지 그랬어요.”
“사실 그러려고 했는데, 전에 며칠 빼먹은 것도 있고…, 할 것도 많고…. 그래서 그냥 출근했어요.”
한규리는 내게 일 중독이라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해왔고,
나는 은근히 정이 느껴지는 그녀의 한 마디에 슬쩍 미소를 짓곤 조용히 컵라면을 뜯었다.
“후우, 후우….”
그렇게 뜨끈한 컵라면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속을 풀길 얼마나 지났을까.
“컵라면에 헛개수까지…. 술 먹었냐?”
뒤이어 출근한 김준형도 회의실에 찾아와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김준형은 뻔뻔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아 컵라면 국물을 조금 뺏어 먹더니, 자연스럽게 자초지종을 물어왔는데….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다.”
“얼씨구. 아무런 일도 없다는 놈이, 밤새 술을 퍼먹고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냐?”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내 주장을 부정하곤 진지한 눈빛을 띠며 넌지시 물어왔다.
“심각한 일이야?”
심각하냐고?
심각한 걸로 치면, 이보다 더 심각할 수가 없다.
죽고 못 살던 여자친구가 사실 희대의 나쁜년이었다니.
애써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담담한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어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적당히 나쁜 짓이었으면 그냥 시원스레 화라도 낼 텐데, 스케일이 너무 방대해서 증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글쎄….”
솔직히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온다.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상황을 마주하면 사람이 멍청해진다고 하는데,
딱 지금 내 꼴이 그랬다.
“준형아.”
잠시 고민하던 나는, 주어를 쏙 빼놓곤 김준형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만약 네가 신뢰하던 사람이…, 뒤에서 네 뒤통수를 치고 있었으면 어떨 거 같아?”
그러자.
“…갑자기?”
김준형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으음….”
이윽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이해한 듯, 팔짱을 꼬며 진지한 표정으로 시작했다.
“솔직히 내 기준에선 그냥 손절이야.”
“손절한다고?”
“어쨌든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잖아. 그게 깨졌으면, 뭐. 그냥 끝이지.”
“…역시 그런가?”
“근데…. 이건 또 있지 않을까?”
“뭘?”
“모든 관계에는 감정이 들어가잖아. 사랑이든, 아니면…. 우정이든. 무슨 말인지 알지?”
김준형은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그 사이에 얽힌 여러 가지 요소를 언급했다.
사랑으로 얽힌 연인 관계와 우정이 동반된 친구 관계는 전혀 다르다는,
요컨대, 사실을 깨닫고 감정이 어떻게 변하였는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뒤통수를 맞았는데도 손절하기 싫을 수 있잖아?”
“호구네.”
“호구지.”
김준형과의 대화는 꽤 도움이 되었다.
결국,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게 최선.
일단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되기까진 당분간 임아린과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거 같다.
“후우….”
그렇게 회의실을 치우곤 카페테리아에 들려, 시원한 커피를 받아 사무실로 돌아오는 사이.
“왜 아침부터 죽상이니?”
갑자기 이혜리가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어머, 놀랐어?”
팔 부분이 슬쩍 드러난 시스루 블라우스에 딱 달라붙는 스커트.
그리고 단정하게 모아 묶은 보랏빛 머리카락까지.
평소와 다르게 오피스 레이디의 정석을 보여 주는 듯한 모습으로 꾸민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금 있다가 사무실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네.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 좀 할까?”
“…무슨 이야기?”
“계약 좀 따다 주려고.”
“계약? …또 침 바르려는 속셈이야?”
“얘는, 날 무슨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노리는 음흉한 여잔 줄 아네?”
“맞잖아.”
“부정은 안 할게.”
진한 미소를 그리며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내저은 나는, 가던 길을 가리키며 대답해주었다.
“나, 사무실 들러서 할 거 있어.”
“급한 거니?”
“업무 지시.”
“흐응…. 그럼 같이 가. 오랜만에 ‘우리 팀원들’ 얼굴 좀 보게.”
“…벌써 우리 팀원이야?”
“우리 길드에 있으니까, 우리 팀원이지. 안 그러니?”
“공무원은 정부 소속이라고.”
그렇게 이혜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무실로 향하던 그때.
“응?”
왠지 모르게 우리 사무실 앞 복도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뭐지….”
이혜리와 나는 별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사무실로 다가갔고,
“실례합니다. 좀 지나갈게요. 안쪽이 저희 사무….”
“길 좀 내줄래요?”
“아앗…! 단장님…! 야, 야! 앞에 당장 길 비켜!”
이혜리의 도움으로 손쉽게 수많은 인파를 뚫으며 사무실로 향하던 그때.
“…와, 진짠가보다…. 완전 아침 드라마네.”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우리 단장님도….”
“야, 조용히 해!”
뒤쪽에서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는데….
‘…뭐야?’
알 수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며, 잠자코 팀 서울시청의 사무실에 발을 들인 순간.
“프, 프로듀서님…!”
“지, 지혁아…!”
사무실에 남아있던 한규리와 김준형이 쪼르르 달려와, 다급히 나를 찾았다.
“무슨 일이죠?”
“앗, 단장님…!”
“다, 단장님까지….”
웬일인지 두 사람은 뒤따라 들어선 이혜리를 보며 매우 당황스러워하는 듯한 반응을 보여왔고,
“……?”
그런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조용히 물음표를 띄우던 찰나.
“이제야 왔네.”
갑자기 사무실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얘가 왜 여기에….’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띤 그녀는 쓰윽─ 팔짱을 꼰 채로 또각또각 다가왔고,
“흐응….”
나란히 선 이혜리를 발견하곤 대놓고 불쾌하다는 반응을 드러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쟨 왜 같이 있어?”
설주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