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62화 (62/165)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흰색 셔츠형 원피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작은 가방까지.

평소 편함을 추구하여 후드나 티셔츠에 휴대폰만 들고 다니던 진서원의 취향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설마…, 화장까지 한 건가?’

심지어 화장까지 한 듯, 항상 밋밋하던 얼굴에 은근한 색채가 더해져 있었는데….

‘와….’

기본 외모가 워낙 뛰어나던 편이라 그런지, 살짝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왜 그래요?”

그때, 진서원이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묘하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물어왔다.

“아니, 그냥…. 예뻐서.”

“…그래요?”

진서원은 무심한 대답과는 다르게 내심 부끄러웠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시선을 슬쩍 피해버렸는데,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은근한 사랑스러움이 꽤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화장은 한나가 해줬어?”

그녀는 내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을 대신해왔다.

함께 사는 방한나가 평소 외출을 거의 하지 않던 그녀를 위해 조금 힘을 쓴 모양이었다.

‘역시 한나가 착해.’

새삼 기특한 방한나를 떠올리며 슬쩍 입꼬릴 끌어올린 나는, 자연스레 화제를 바꿔 그녀에게 점심부터 간단히 먹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그럼 간단히 배만 채우고 돌아다니자.”

“…네.”

그렇게 장소를 옮겨, 인근의 샌드위치 전문점.

적당히 자리를 잡고 가볍게 식사를 하던 도중, 나는 진서원이 세운 일정에 대해 말을 꺼내보았다.

“그래서,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임아린에겐 쇼핑을 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정확한 일정을 모른다.

애초에 그녀가 동행을 요청해온 걸 그대로 받아 준 거라서,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이거요.”

포크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매만지던 진서원은 내게 휴대폰 화면을 슬쩍 보여왔다.

어디 매장을 직접 찾아서 정리한 듯, 여러 가지 브랜드가 주르륵 적혀 있었는데….

‘…응?’

가장 위에, 무려 별표까지 처져 있는 한 매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레드…나이트 본점? 이게 뭐야?”

“…제일 가보고 싶던 곳이요.”

“가보고 싶던 곳…?”

진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내려놓곤 가장 먼저 들를 곳이라고 간단히 설명을 덧붙여왔다.

의견을 잘 표출하지 않는 그녀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사실상 이곳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것 같았다.

“거긴 뭐하는 곳인데?”

생소한 이름에 질문을 건넨 나는, 별생각 없이 콜라를 쪽 빨아들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

레드 나이트.

직역하면 붉은 밤.

별의별 단어를 브랜드 이름으로 사용하는 시대이기에, 요즘 유행하는 인기 카페 같은 곳인 줄 알았던 그곳은….

[ Adult Shop ]

성인용품 매장이었다.

“…….”

길거리에 떡하니 세워진 간판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진서원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던 건지, 그녀는 마치 놀이공원에 들어서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너무나 순수한 그 모습에, 슬슬 어지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원아…. 그…. 진짜 여기 맞아…?”

“…네.”

‘세상에….’

나를 데리고 성인용품 매장에 들어간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어서 가요.”

애석하게도 진서원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아니…. 그….”

“…빨리 안 들어가면, 다 떨어질지도 몰라요.”

진서원은 내 옷깃을 붙잡으며 드물게 재촉하기까지 했고,

“…하아…. 그래, 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잠자코 매장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레드 나이트입니다!”

정다운 직원의 인사와 함께 들어선 드넓은 매장엔 낯뜨거운 제품들과 꽤 많은 사람이 깔려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혼자 온 것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에 뒤처지는 건가….’

“…아.”

그때, 진서원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쪼르르 앞서나갔다.

기상천외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녀의 뒤를 쪼르르 따라갔고,

[ 혼자도 즐겁고, 같이하면 더 즐거운! ]

진서원이 여성용 코너를 진지하게 살피는 사이, 나는 괜히 어색한 동작으로 주변의 물건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와….”

“…오빠. 어디 봐?”

“어, 어어?”

“…따라와.”

“와씨…. 존나 잘 생겼다….”

“말 걸어볼까?”

“옆에 여자 안 보여? 우리가 눈에 보이겠냐?”

“누나. 오늘 이거…. 누나?”

“으, 응?! 나, 아무것도 안 봤어!?”

남녀 할 것 없이, 우리를 향해 은근히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많은 커플들이 깨질 것 같았다.

‘진짜 난리도 아니네.’

그렇게 잠자코 진서원의 쇼핑이 끝나기만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

한참을 고민하던 진서원이 내게 의견을 구해왔다.

“…이거랑, 이거 중에, 뭐가 더 귀여워요?”

그녀가 가리킨 건 물건에 어울리지 않는, 썩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작은 진동기였다.

“…이거.”

나는 그중에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쪽을 골랐고,

진서원은 망설임 없이 내가 고른 진동기를 집어 들었다.

‘분명 쓰던 게 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로선 그녀의 취미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요.”

진서원은 그대로 진동기 하나만 구매한 채, 카운터로 향했다.

드디어 내가 부끄러움을 참고 여기까지 따라온 목적을 이룰 시간이었다.

“포장해 드릴까요?”

“…네.”

계산을 마친 카운터의 여직원이 물건을 능숙하게 포장하는 사이, 진서원이 슬쩍 말을 꺼냈다.

“…커플 이벤트는 다 끝났어요?”

그렇다. 오늘 내가 순순히 따라온 건,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함.

연인 동반으로 물건을 구매했을 때 참여할 수 있는 추첨 이벤트를 위해서였다.

분명 그런 이유였는데.

“아. 커플 이벤트는, 커플 코너 물건을 구매하셔야 참여할 수 있으세요.”

“……!”

진서원이 고른 물건으론 이벤트 참여가 불가능했다.

그녀가 조건을 잘못 알아본 것이었다.

“…골라올게요.”

진서원은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는지, 곧장 나를 이끌곤 커플 용품 코너로 향했다.

‘살벌하네….’

커플 용품 코너는 다른 코너의 물건들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옷의 역할을 못하는 옷 같은, 남사스러운 이벤트용 제품들이 즐비했다.

“뭐 살건데?”

“…잘 모르겠어요.”

진서원은 앞서 진동기를 칼같이 고르던 모습과는 다르게 살짝 헤매는 모습을 보여왔다.

또 이런 부분에선 의외로 문외한인 것 같았다.

“음…. 그럼, 이건 어때?”

물건을 쓱 훑어보던 나는, 중간에 놓여있던 한 제품을 추천해주었다.

“……?”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선이 달리지 않은 형태의 무선 진동기였다.

‘진짜 사람 인생 모르는구나.’

내가 연인도 아닌 이성에게 이런 걸 추천해주는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벤트 참가 비용도 넘고, 꽤 고급스러워 보이네. 어때?”

진서원은 내가 건넨 시제품을 들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더니, 문득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

성인용품을 든 채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걸로 살게요.”

진서원은 카운터로 돌아가, 내가 추천한 물건을 구매했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이벤트 기회가 돌아왔다.

“한 분당 하나씩 가능하시고, 뽑으신 거 저한테 보여주시면 되세요.”

추첨은 종이 여러 개가 붙은 추첨판에서 원하는 걸 떼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등은 고급 호텔 숙박권.

2등은 매장 상품권 20만 원.

3등은 매장 상품권 10만 원.

그 뒤부턴 진서원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비매품 한정판 진동기를 고를 수 있다.

이중에서 진서원의 목표는 가장 확률이 높은 진동기.

총 두 종류를 모두 얻어내기 위해 굳이 나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툭!

먼저 뽑기에 나선 진서원은 재는 것 없이 곧바로 추첨지를 떼어내어 직원과 함께 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앗…! 축하 드립니다! 1등 당첨되셨어요!”

“……?”

단번에 1등을 뽑아버렸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직원의 놀라운 반응은 매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었다.

“와. 1등 뽑았다는데?”

“1등이 뭔데?”

“피아 호텔 숙박권.”

“미친…. 개 부럽다.”

사람들은 단번에 1등을 뽑아버린 진서원의 행운에 부러워했는데….

“…….”

정작 1등을 뽑아낸 진서원은, 자신이 원하던 게 아니라 그런지 매우 허탈해 보였다.

“서원아. 아직 내 것 안 뽑았잖아.”

“…!”

다행히 이번 이벤트는 총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저도 뽑으면 되죠?”

“아, 네!”

나는 직원의 확인을 받으며 곧바로 새로운 추첨지를 떼어냈고,

[ 4등! ]

마침내 진서원이 그토록 원하던 진동기를 뽑아낼 수 있었다.

*

“그렇게 좋아?”

“…네.”

진서원은 새카만 쇼핑백을 꼬옥 껴안곤 드물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었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이제 다음은 어디 갈 거야?”

“…카페요.”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유명 브랜드의 대형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앞선 성인용품점의 충격으로 또 이상한 장소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다행히 멀쩡한 장소였다.

“음…. 사진을 찍고 싶다고?”

“…네.”

그녀는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해왔다.

또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최근 SNS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찍고 싶다고 한다.

“…싫어요?”

“아니, 뭐, 싫은 건 아닌데…. 그래. 해보자.”

하필 또 전문 분야가 아니었던 탓에, 나는 부랴부랴 예쁜 사진 찍는 법을 속성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그 사이, 그녀는 화장을 고치고 오려는 듯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렇게 찍는 건가…?”

찰칵─

그렇게 주문한 음료와 간식을 대상으로 사진을 연습하고 있던 그때.

“…뭐해요?”

“아, 연습 좀 하고 있었어.”

진서원이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앞서 찍어둔 사진으로 보정 기능을 실험해보고 있었다.

‘오…. 좀 나아졌네.’

그때.

“…이거 해볼래요?”

진서원이 뜬금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들이밀어 왔다.

“응?”

그녀의 휴대폰엔 알 수 없는 화면이, 마치 함수 그래프와 비슷한 배경에 ‘Move!’라고 적힌 분홍색 점이 찍혀 있었다.

“이게 뭔데?”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받아, 화면 중앙의 분홍색 점을 쓱─ 옮겨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읏!”

맞은편에 앉아있던 진서원이 화들짝 놀라며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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