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서울시청의 성공적인 데뷔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임아린이 올린 축하 글은 어마어마한 팔로워 수를 타고 해외에서도 우리 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국내 방송사나 언론은 물론이고, 해외 유명 언론에서도 정식 인터뷰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정말 축하하네! 자네가 반드시 해낼 줄 알았어!”
거기에 발 무겁기로 소문난 시장께서 몸소 사무실까지 부리나케 달려올 정도이니….
더 말하면 입만 아프리라.
“준형 씨. 어떡하죠. 저…, 조금 무서워졌어요.”
“전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아니, 공무원 붙었을 때에도 연락 없던 친척들이, 뉴스 봤다면서 연락이 왔다니까요?”
한규리와 김준형도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여왔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규리 씨도 어서 정신 차리고 일하세요.”
“…저희는 프로듀서님이 아니라서 그런가, 정신이 안 차려져요.”
“그래. 넌 익숙할지 몰라도, 우린 아니란 말이야.”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지만, 두 사람이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조금 곤란했다.
“하여튼…. 애들 앞에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벌써 헌터병이라도 걸리면 진짜 골치 아파진다.”
방송가에는 연예인병이 있다면, 헌터 업계엔 헌터병이 있다.
갑작스레 늘어난 관심과 인지도에 자아도취 하는, 일종의 불치병이다.
이제 막 발걸음을 뗀 단계인데, 약도 안 통한다는 헌터병을 치르는 건 사절이다.
“…노력해볼게.”
“…저도요.”
그렇게 팀원들이 휴식기가 끝나기 전에 정신을 차리길 빌며 곧 다가올 새로운 일정을 준비하는 사이….
[ ㄱ아린이 : 오늘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을까? 내가 거기로 갈게! ]
나는 임아린과 새로운 관계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규리 씨. 오늘 점심에 약속이 생겨서, 저는 따로 먹을게요.”
“……그분이죠?”
“100%죠. 아니면 제 손에 장을 지집니다.”
숨길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눈을 흘기며 조그맣게 소곤거리는 두 사람.
아무래도 아린이와 점심을 먹으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신성한 일터에서 대놓고 썸이라니…. 진짜 너무하네요.”
“같은 업계 사람인데, 사실상 사내연애죠.”
“어머, 웬일로 생각이 통했네요?”
한규리와 김준형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뭐래도 저는 갑니다. 오후에 봐요.”
“와…, 진짜 가네?”
“세상에….”
나는 두 사람의 시기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빠르게 짐을 챙겨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
식당 한쪽에 마련된 작은 방.
[ 단독) 설주희,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아 은둔 생활에… ]
[ 단독) 홍유라, 모든 스케줄을 접고 설주희를 보살피는 중… ]
[ 천화 길드 “이번 시즌 퀸즈는 리빌딩을 위한 자율 휴식 예정. 아무 문제 없어… ]
임아린을 기다리며 퀸즈의 소식을 찾아보던 나는, 새롭게 떠도는 설주희의 소식에 살짝 근심을 품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큰 충격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보여온 묘한 반응까지 생각해보면, 걱정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ㅣ
‘…정말 괜찮은 건가…?’
건방져지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콧대를 꺾어주려고 했는데, 아예 기가 죽어버리는 건 곤란하다.
어쨌든 설주희는 이 세계의 주인공.
주인공인 그녀의 부재는 매우 큰 문제고,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까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아무리 그녀가 내게 실망스러운 짓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정말로 재기불능 상태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괜찮겠지…?’
그렇다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굳이 임아린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묻는 것도 그렇고, 설주희나 홍유라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그저, 원작 속 설주희가 매번 보여줬던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고 당차게 일어났길 빌 수밖에 없었다.
“지혁아…!”
그때, 문이 열리며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가 나타났다.
“기다렸지…? 미안…! 점심때 되니까, 또 차가 좀 막혀서….”
“아냐, 괜찮아. 어서 앉아.”
임아린은 천화 길드의 후속 조치로 스케줄이 줄어들며 자연스레 장기 휴가를 맞이하였는데,
덕분에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나게 되었고,
나는 마치 여태껏 누리지 못했던 시간들을 보상받듯, 달콤한 설렘을 천천히 음미해가며 그녀와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오늘도 열심히 일했어…?”
스륵─
자연스레 말을 걸어오며 내게 은근슬쩍 손가락을 얽혀오는 그녀.
예전이었다면 이런 사소한 접촉도 웬만해선 피했겠지만….
지금은 애써 피할 필요가 없었다.
“엄청 열심히 했지. 근데…. 혹시 너 오늘 어디 가?”
“응…? 아니? 왜…?”
“누구 꼬시려고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었나 해서.”
“…!”
임아린은 살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내 장난을 받아주었다.
“드, 들켰어…?”
“응. 엄청 티나.”
“히힛…. 어때? 오늘 좀 먹힐 거 같아…?”
생글생글 웃으며 슬쩍 깍지를 걸어오는 그녀.
강렬한 자기주장과 함께 애정을 어필해오는 그녀의 행동은 끊임없이 마음을 자극해왔고,
나는 멋대로 흘러나온 웃음을 참지 못하곤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아주었다.
‘진짜 요물이 따로 없네.’
임아린은 그동안 어떻게 참아온 건지, 무서울 정도로 사랑스러움을 뿜어왔다.
가히 사랑스러움의 악마라고 칭해도 모자랄 수준.
이미 콩깍지가 거하게 씐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적당히 식사를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틈을 엿보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퀸즈에 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보았다.
“요즘 애들은 좀 어때?”
그러자.
“그, 그냥…. 잘 지내고 있어….”
임아린이 살짝 꺼리는 듯한 기색으로 은근히 이야기를 피해버렸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럼, 다행이고.”
차마 자세한 내용까지는 물을 수가 없었다.
안면이 있는 지인의 안부를 묻는 수준.
설주희나 홍유라와는 딱 그 정도 거리였기에.
*
한창 도지혁이 임아린과 들러붙어 꽁냥거리고 있을 무렵.
팀 서울시청의 합숙소.
“히히….”
휴가를 맞아 소파와 한몸이 된 방한나는, 곱게 잘린 흰 종이를 바라보며 행복한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앞으로 8개만 더 모으면…!’
종이엔 ‘자유 소원권’이라는 문장과 함께 열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중에 두 개의 동그라미에 도지혁의 친필 사인이 적혀있었다.
앞서 도지혁이 약속했던, 소원권을 실제로 만들어낸 것이다.
“꺄아아앗…!”
방한나가 쿠션에 얼굴을 묻곤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바동거리던 찰나.
“…뭐해?”
“!?”
내내 방안에 박혀있던 진서원이 대뜸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언제 나왔어!?”
“…방금.”
고개를 퍼뜩 들곤 당혹스러워하는 방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서원은, 그녀의 손에 들린 흰 종이를 흘끔 쳐다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게 뭐야?”
그 순간.
“어, 어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방한나가 다급히 종이를 숨기더니, 진서원의 옷차림을 흘끔 바라보곤 어색하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 그나저나…. 어디 나가…?”
평소 후드티나 반팔 티셔츠를 즐겨 입던 진서원은 웬일인지 여성스러운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카락도 직접 빗질을 한 건지, 평소와 다르게 부스스한 느낌이 없었다.
“…내일.”
“내일? 아, 내일 입을 거 미리 입어본 거야?”
“…응. …어때?”
“으음….”
객관적으로 진서원의 외모는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심지어 평소와 다르게 미모를 깎아 먹는 후줄근한 패션까지 말끔히 정리한 덕인지, 더할 나위 없이 예뻐 보였다.
“화장만 조금 하면 더 예쁠 거 같은데…. 내 화장품 빌려줄까?”
“…나, 화장할 줄 모르는데.”
“내가 도와줄게! 이참에 미리 연습이나 좀 해볼까?”
방한나는 망설임 없이 진서원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자 했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누굴 만나러 가는데 이렇게 꾸미고 가는 거지?’
방한나는 지금껏 진서원이 꾸미고 다니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진서원이 이렇게까지 꾸미고 다닌다는 건, 그 무감각하던 진서원조차 신경을 쓸 정도로 특별한 상대라는 뜻.
“근데….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흥미진진한 냄새를 맡은 방한나는 은근히 눈을 반짝이며 슬쩍 질문을 건네보았고,
“…프로듀서님.”
돌아온 대답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누구랑…, 만난다고…?”
“…프로듀서님.”
“…!”
잠시 나마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던 방한나는, 짧은 어지러움과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덥석 붙잡았다.
‘…왜, 왜 얘가 프로듀서님이랑 단둘이…?! 심지어 이렇게 꾸미고 간다고!? 아니, 왜?! 누구는 도장이나 모으고 있는데…!’
솟구치는 위기의식과 뒤따라오는 열등감.
밀려오는 부정적인 감정에 그대로 휩쓸리려는 순간.
‘…아.’
방한나는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자신도 도지혁과 데이트를 즐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즉, 선수를 친 쪽은 진서원이 아니라 방한나였던 것이다.
“…그, 그렇구나….”
이내 자신의 선례를 떠올리며 부정적인 감정을 잠재운 방한나는, 흑역사만 남기고 끝내버린 지난날의 기억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알았어…. 그럼, 언니가 프로듀서님이 놀랄 정도로 예쁘게 꾸며 줄게…!”
“…진짜?”
사실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잠시나마 진서원에게 나쁜 생각을 품은 것에 대한 나름의 속죄였지만….
‘…서원이는 괜찮겠지?’
방한나는 어차피 자신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호언장담해버렸다.
“그, 그럼…! 언니만 믿어!”
*
다음날.
서울 중심의 번화가.
[ ㄱ아린이 : 오늘은 그 서원이라는 아이랑 만난다고 했지? ]
[ 나 : 응. 밥 먹고, 쇼핑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어. 아마 저녁에 헤어질 거 같아. ]
[ ㄱ아린이 : 재밌겠다…! 그럼 잘 놀아주고, 헤어지면 꼭 연락해줘야 해…? ]
[ 나 : 알았어. 너도 푹 쉬고 있어. ]
임아린이 뒤이어 보내온 귀여운 이모티콘에 하트 마크를 달아주고 메신저를 끈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토벌 휴가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진서원이 개인적으로 요청해온 일정에 맞춰 특별히 오후반차를 사용했다.
평소 외출 자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기에, 흔쾌히 받아주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함께 외출하자고 권한 건지 살짝 흥미가 돌았다.
“…프로듀서님. 저 왔어요.”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원이구나.’
진서원의 목소리였다.
“어서….”
나는 별생각 없이 인사를 건네며 뒤를 돌아보았고,
“…!?”
눈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에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왜 그래요?”
분명 진서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곳엔….
‘…지, 진짜 서원이인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