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57화 (57/165)

“프로듀서!”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내게 쪼르르 달려온 최효민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감상을 물어왔다.

“나 어땠어요? 잘했어요?”

정확히는 감상보단 칭찬해달라는 느낌이었다.

“잘했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잘한 사람에게 굳이 칭찬을 아낄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 파워 랭킹도 좀 오르겠던데요? 그동안 고생했어요.”

“뭐야…. 그게 다예요? 좀 더 해줘요!”

최효민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몸을 들이대며 더더욱 칭찬을 요구해왔는데….

정작 그런 시선들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나는, 그녀를 슬쩍 밀어내며 나중을 기약했다.

“이따 해드릴 테니까, 일단 옷이나 좀 갈아입고 오세요.”

“진짜? 진짜죠?”

“네. 인나 씨랑, 민주 씨부터 칭찬해주고 해드릴게요.”

“지금 장난해요!?”

“어어? 지금 두 사람은 고생 안 했다 이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세상 싸가지 없이 굴 땐 언제고…. 그새 귀여워졌네.’

3주만에 변해버린 최효민의 행동에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으며 그녀와 투닥거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웅성웅성…웅성웅성…

갑자기 팀원들과 스탭이 모여있던 쪽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그때.

우르르……

모여있던 인파가 갑자기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 틈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고,

“!”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질끈 묶은 새카만 머리카락에 차가운 외모를 지닌, 한때 그 누구보다 아꼈던 그녀.

설주희였다.

“뭐야?”

“쟤가 왜….”

그녀는 막 장비를 해체하고 찾아온 듯,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

미처 경황이 없던 건지, 뽀얀 맨발로 흙바닥을 거닐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급하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

모든 이들의 시선을 이끌며 내게 천천히 다가온 그녀는,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최효민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다시 내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건네왔다.

“이번 토벌…. 정말 네가 했니?”

희미하게 파르르 떨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눈동자.

질문을 건네오는 그녀의 모습에선 평소의 당당함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외려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너무나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하! 그걸 이제 알았어?!”

그때, 최효민이 내 앞을 막아서곤 보란 듯이 팔짱을 꼬며 설주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네 손으로 버린 프로듀서한테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 어때?!”

“…효민 씨.”

나는 최효민을 말리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슬쩍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설주희가 몸을 움찔거리며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말리지 마요!”

최효민은 그동안 참아왔다는 듯, 질척질척한 감정을 끌어올리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1등에서 끌어내려 지는 것도 꽤 괜찮지? 그거 내가 당해봐서 아는데, 한동안 아주 많이 좆같을 거야. 뭐…, 꼬우면 연예인 생활 청산하고 다시 게이트나 뛰던가?”

“효민 씨. 이제 됐으니까….”

“아니, 안 됐어요!”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최효민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설주희와 강제로 눈을 마주치며 따박따박 쏘아붙였다.

“무식하게 힘만 쎈 년이, 주제도 모르고 싸가지 없이 굴 때 알아봤어. 넌 네가 영원히 1등이라도 할 줄 알았지? 응? 평생 여왕이라 떠받들면서, 영원히 머리 꼭대기에 군림할 줄 알았지?”

“…….”

“재수 없는 년.”

퉷─ 하고 발치에 침을 뱉은 최효민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설주희를 노려보았고,

어딘가 흐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 쪽을 흘끔 쳐다보더니….

“흐응….”

묘하게 음흉한 웃음을 흘리곤 내 허리에 슬쩍 손을 두르며 세상 얄미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고마워. 이렇게 훌륭한 프로듀서를 버려줘서.”

꽈악─

그리곤 보란 듯이 내 허리를 꽉 잡아당겨 찰싹 끌어안곤,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설주희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너네 프로듀서 개 쩔더라?”

그 순간.

움찔─

설주희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이제 그만해요!”

내심 아쉬워하는 최효민을 다급히 떼어낸 나는, 점점 초점이 흐려지는 설주희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을 꺼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거 같은데, 맞아.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아서 이번 토벌에 참여했어.”

“…….”

“혹시 내가 참여한 게 불만이면 나중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네 팀원들도 널 찾고 있을 거야.

설주희는 자초지종을 듣고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묘하게 흐린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스윽─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갈 뿐이었다.

터벅… 터벅…

그렇게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던 설주희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작아 보였고,

왠지 모르게….

굉장히 외로워 보였다.

*

그날 저녁.

“블랙 로즈를 위하여!”

““위하여!””

블랙 로즈 1위 기념 뒤풀이에 참석한 나는, 이혜리와 최효민 사이에 껴서 술 공세를 당하고 있었다.

“자. 한잔 더 해야지?”

“나 이제 안 마실 거야.”

“그럼 물이나 좀 마셔요.”

“…이거 술 아니에요?”

“아직 안 취했네?”

“덜 먹였나?”

“이 사람들이 진짜….”

블랙 로즈를 서포트하며 응원하온 팀원들은 몇 년 만에 되찾은 1등에 매우 기뻐하였다.

특히 콧대 높은 퀸즈를 꺾으며 자력으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가장 만족스러워했는데….

‘아린이는 괜찮을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이야 어쨌건 퀸즈는 내가 만든 팀이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천화 길드에 한 방 먹인 게 기쁘긴 하나, 그렇다고 막연히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딱, 싱숭생숭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오늘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셔.”

“어라? 왜 단장님이 프로듀서님을 데려다 줘요?”

“친구니까?”

이혜리와 최효민의 대화를 뒤로한 채 품속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슬쩍 말을 건넸다.

“저는 먼저 일어나볼게요.”

“응…? 갑자기?”

“무슨 일 있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러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바래다주려고 했는데….

“괜찮아. 혼자 돌아갈게. 천천히 놀다 와.”

나는 두 사람의 권유를 사양하며, 조용히 회식 자리를 빠져나왔다.

“후….”

알코올에 둔해진 코끝으로 상쾌한 밤 공기가 스쳐 지나간다.

반짝거리는 거리를 피해 고개를 들어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알싸한 술기운이 담긴 숨결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 ㄱ아린이 : 아, 이제 들어가야 해서 못 볼 거 같아…. 그래도 이번에……]

마지막으로 보내온 임아린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 설주희가 내 소식을 알았으니, 분명 임아린도 알게 됐을 터.

하지만 임아린은 내게 아무런 연락조차 보내오지 않았다.

귀띔하지 않은 내게 실망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며 설움을 털어내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치 않았다.

풀썩─

발길을 멈추고 갓길에 취해있던 사람들과 섞여 적당히 자리를 잡은 나는, 술기운이라는 핑계로 손가락을 놀리며 임아린에게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 나 : 뭐해? ]

그러자.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메시지 옆에 ‘읽음’ 표시가 떠올랐다.

임아린이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꿀꺽─

길거리의 음악 대신 귓가에 둥둥 울려대는 심장 박동.

혹시 아직도 답장을 고민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휴대폰이 이상해서 연락이 늦게 도착하는 건 아닌지.

술기운에 별의별 고민을 다 해가며 노심초사 답장을 기다리길 몇 분이 지났을까.

마침내 그녀로부터 답장이 돌아왔다.

[ ㄱ아린이 : 너 기다려 ]

“…!”

임아린의 메시지는 짧고 굵었다.

너무 임팩트가 강하다 못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꼴깍─

마른 침을 삼키며 괜히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애써 침착하게 다시금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 나 : 지금 어디야? ]

[ 나 : 내가 거기로 갈게 ]

그러자….

[ ㄱ아린이 : 우리 집으로 와 ]

임아린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하필 집이었다.

‘이거…. 가도 괜찮을까?’

호기롭게 간다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임아린의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머뭇거리게 됐다.

이대로 그녀의 집에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사달이 날 게 분명했기에.

“…….”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줄곧 강하게 나를 잡아당기던 임아린이 슬쩍 한 마디를 덧붙여왔다.

[ ㄱ아린이 : 싫으면 안 와도 돼 ]

내 눈치를 살피는 걸까.

내 마음을 떠보는 걸까.

아니면 둘 다인가.

‘나는 모르겠다…!’

초조함에 괜히 입술 끝을 질근질근 씹어대던 나는, 눈을 딱 감으며 답장을 보내놓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나 : 금방 갈게 ]

그리고는 곧장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은 뒤,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임아린의 집으로 향했다.

‘이게 맞나…?’

그렇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밤거리를 바라보며 스스로의 선택에 끝없이 의문을 품고 있을 무렵.

우우웅─ 우우웅─

갑자기 품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나는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상대를 확인해보았고….

[ 서울시청 진서원 ]

“얘는 또 왜….”

뜬금없는 진서원의 이름을 확인하곤, 왠지 모르게 살짝 안심하며 전화를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 어디에요? ]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잔잔한 진서원의 목소리.

그 묘한 안정감에 살짝 풀어진 나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뒤풀이 끝나서, 잠깐 어디 좀 들르려고.”

그러자.

[ 어, 어디 들르냐고 여쭤…. ]

스피커 너머로, 희미하게 방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같이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 어디 가는데요? ]

“…잠깐, 친구 집에.”

임아린과는 여전히 친구가 맞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나랑 같이 있어?”

[ 어…. 아니요? ]

방한나가 무언가 말이라도 한 걸까.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작은 웃음을 터트린 나는, 모르는 체하며 용건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 어…. 1등 축하 파티? 하자고 해서요. ]

왠일로 기특한 제안을 들이밀어 왔다.

진서원이 말을 꺼냈을 리는 없고….

아마 방한나가 생각해낸 것 같았다.

“어떡하지? 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할 거 같은데.”

[ 무슨 일인데요? ]

무언가 지시를 받은 듯, 집요하게 물어오는 진서원.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냥, 일 때문에.”

[ 어…. 그럼 다음에 해요. ]

일을 들먹이자 진서원은 금세 꼬리를 내리며 다음을 기약해왔고,

나는 뻔히 보이는 두 사람의 행동에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 너무 늦게 자지 말고. 한나한테도 잘 자라고 전해줘.”

[ 네. ]

그러자 스피커 너머로 조그맣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실 웃음을 흘리며 얌전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손님, 다 왔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임아린의 집.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나는, 살짝 가신 술기운에 의지하여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고,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거울을 보며 가볍게 옷매무새를 만진 뒤,

“후우….”

임아린의 집에 다다라,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초인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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