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58화 (58/165)

초인종을 누른 직후.

문 옆에 설치된 인터폰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임아린은 나를 확인한 듯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인터폰을 꺼버렸고,

이내 문 너머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후우…….”

언젠가, 첫사랑과 데이트를 하던 때보다 더 떨리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삐리릭─

도어락 열리는 소리에 괜히 머리카락을 한번 만지며 슬쩍 뒤로 물러선 나는,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은색 머리칼을 자연스레 풀어헤친 그녀는 급하게 걸친 듯 얇은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그 아래론 항상 입던 귀여운 잠옷이 아닌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 본 건지, 평소와 다르게 꽉 죄어져 있던 흉부가 너무나 자유분방해 보였다.

마치 속옷을 안 입기라도 한 것처럼.

“…들어와….”

귓가에 꽂히는 임아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히 시선을 거두며 현관으로 발을 내디뎠고,

끼이이익…… 쿵─ 철컥─

그렇게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좀 어둡네.’

나는 임아린의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묘하게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두꺼운 암막 커튼에, 곳곳에 설치된 무드등까지.

집안 전체가 은은하게 밝혀져서 그런지, 어딘가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앉아.”

임아린의 말을 따라 얌전히 소파에 자리를 잡자, 그녀도 은근슬쩍 찰싹 달라붙으며 나란히 엉덩이를 붙여왔다.

비좁은 크기의 소파면 몰라도, 이렇게 누워 자도 손색이 없는 커다란 소파에서 굳이 달라붙는 건 누가 봐도 고의.

하지만 딱히 싫지는 않았기에, 은근히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를 모르는 체하며 슬쩍 말을 꺼내보았다.

“숨겨서 미안해.”

특별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사과하러 온 마당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

화라도 난 건지, 임아린은 곧바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게 기대어 앉아있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듯 나지막이 말을 건네왔다.

“…어쩔 수…, 없던 거지…?”

어쩔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엄연히 나는 세진 길드와 함께하는 몸이고, 그녀는 라이벌인 천화 길드 소속이었기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블랙 로즈의 프로듀싱을 맡았다며 나불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응.”

“…그렇구나….”

하지만.

어쨌든 내가 임아린에게 상처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고,

그녀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싶었다.

스윽─

나는 조용히 손을 옮겨 그녀의 어깨를 감싸곤 조심스레 꼬옥 끌어안으며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해.”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그녀의 작은 떨림.

그 이유 모를 떨림에 맞춰, 희미한 두근거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한테 딱히 나쁜 감정이 있던 건 아니야. 그냥….”

“…공과 사는 다른 거니까…. …그렇지?”

“…응.”

다행히도 마음씨 고운 임아린은 내 뜻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있었다.

그저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쳤을 뿐이라는 것을.

스륵…

그때, 임아린이 슬쩍 양팔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선명한 온기와 압도적인 부드러움.

그 낯설고도 야릇한 감각에 무심코 몸을 움찔거린 나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따라 안아주었고,

임아린은 내 손길에 겨우 마음을 놓았다는 듯 천천히 고백해왔다.

“나…. 너무 무서웠어…. 나한테 실망한 줄 알고…. 너무 무서워서…. 흑….”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실망해.”

“그, 테스트 때문에….”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실망할 거였으면, 진작에 실망했지.”

“…우읏…. 미안해….”

나는 울먹이는 임아린을 조용히 토닥여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이리와 봐.”

나는 임아린을 번쩍 들어, 내 다리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어스름한 조명 사이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정성스레 매만져주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넌 내가 싫어?”

내가 설주희나 홍유라와는 다르게 여전히 임아린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내가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고, 함부로 몸을 굴렸던 문란한 놈이라 싫어?”

“아, 아냐…! 절대 안 그래…!”

임아린은 나를 믿어주었다.

다른 두 사람과는 다르게.

물론 내가 정말로 소문 속 쓰레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임아린은 그 모든 걸 감수하고 내게 마음을 부딪쳐왔다.

그런데 어찌 안 예뻐할 수가 있겠는가?

쪽─

“……!”

훔치듯 스친 짧은 입맞춤에 순간 화들짝 놀란 그녀는 입을 가리곤 땡그란 눈으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그리고 사랑스러움이 철철 흘러넘치는 그녀를 잠시 감상하던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만…. 조금만 이러고 있자.”

“……응.”

임아린도 썩 싫진 않은지, 냉큼 찰싹 달라붙어 왔다.

조심스레 내뱉던 숨결은 어느새 서로의 고동을 따라 자연스레 박자를 맞춰갔고,

느긋하게 주고받던 체온은 어느덧 모두 녹여버릴 것처럼 뜨거워져 갔다.

“…….”

그렇게 온전히 서로를 느끼며 한참을 껴안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임아린은 어느 순간 다리를 끄집어내곤, 은근슬쩍 내 허리에 둘러 더욱더 단단히 달라붙어 왔다.

마치 내가 그녀를 안은 게 아니라,

역으로 그녀가 나를 옭아맨 느낌이었다.

*

블랙 로즈가 1등을 달성한 이후, 헌터 업계엔 큰 파장이 일었다.

[ 퀸즈, 이대로 괜찮은가? ]

[ 블랙 로즈, 1등을 되찾은 이유 ]

[ 세진 단장 이혜리 “이번 시즌은 블랙 로즈의 것.” ]

[ 의아함을 낳은 천화 길드의 선택…… ]

다시는 1위를 되찾지 못할 것 같았던 블랙 로즈가 1위를 달성한 것.

그리고.

절대로 왕좌에서 내려올 것 같지 않았던 퀸즈가 2위로 내려간 것.

언론에선 예상치 못한 이변에 끝없는 관심을 보이며 온갖 화제를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 세진 길드 “헌터에겐 카메라보단 게이트.” ]

세진 길드에선 외부 스케줄을 모두 빼버리곤, 시즌이 끝날 때까지 게이트에 집중하겠단 의지를 내세우며, 그간 돈만 추구하던 헌터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세진 길드가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던 것에 반해….

“구 단장…. 요즘 이런저런 말이 들리던데. 잘 돼가고 있나?”

“예, 예…! 살짝 삐걱거리긴 했지만, 잘 되고 있습니다…!”

천화 길드는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구석일은 매일같이 천화 그룹에 불려 가 허리를 숙이며 간신히 자신의 자리를 보전해야 했고,

1위를 되찾기 위해 다급히 스케줄을 줄이곤,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둥 뒤늦은 보수를 하기 시작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사실 구석일로선 그저 억울할 따름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시키는 것만 열심히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탓만 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단장님. 그…, 주희 씨가 연락이 안 돼서….”

“아잇…! 내가 스케줄 다 빼버리라고 했잖아!”

“그, 단장님께서 이건 빼지 말라고….”

“그냥 다 빼! 걔가 지금 어디 스케줄 뛰게 생겼어!? 다 취소해!!!”

“아, 알겠습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게이트에서 패배한 직후, 설주희가 대뜸 잠적해버렸다.

패배의 충격이 컸던 건지, 홍유라를 통해 간간히 생사만 확인하고 있는데….

덕분에 밀려있던 스케줄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못 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한테 왜 그래!!”

그렇게 구석일이 홀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무실 책상을 걷어차고 있을 무렵.

드디어 찾아온 팀 서울시청의 데뷔전.

“프, 프로듀서님…! 어, 어떡하죠…! 지, 진정이 안 돼요…!”

입장을 목전에 둔 방한나는 긴장한 탓에 도지혁을 붙잡고 한창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청심환이라도 하나 입에 넣어 줄까?”

“채, 챙겨오셨어요…?!”

“아니.”

“흐잉….”

“쓴 것도 못 먹는 게…. 벌써 이러면 곤란해.”

“그, 그치만, 어쩔 수 없는 걸요…!”

“서원이 좀 봐. 얼마나 멀쩡해?”

“서원이는 원래 긴장을 안 하잖아욧…!”

방한나의 말대로, 한규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장비를 체크하고 있던 진서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해 보였는데….

“서원아. 고개 좀 살짝 흔들어볼래?”

“…이렇게요?”

“흔들려?”

“…아뇨.”

“그럼 이건 됐고….”

사실 이건 진서원이 특이한 케이스.

방한나와 마찬가지로, 김준형과 장비를 확인하던 김나래도 긴장에 떨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까….’

도지혁은 그중에서도 유독 긴장하고 있는 방한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고민했다.

첫 단추를 끼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헌터에게도 첫 데뷔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전에 게이트 적응차 들어갔던 하급 게이트에선, 방한나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 주겠다며 적당히 동기를 끌어올렸는데….

매번 보상을 걸 수도 없기에, 적당히 머리를 굴리며 좋은 아이디어를 짜내 보았다.

그리고….

“!”

일순간 도지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한나야.”

“…네에…?”

“너, ‘참 잘했어요’ 도장 알지?”

“…가, 갑자기요…?”

“이번 게이트 잘 끝내고 나오면, 내가 도장 하나 찍어 줄게.”

“네…?”

정신이 없던 방한나는 곧장 도지혁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 10개 모을 때마다, 소원권 1개. 어때?”

그리고 이어진 도지혁의 설명에 일순간 멈칫하더니….

“…소원권이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번뜩이며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응. 뭐든지 다 들어주는 소원권.”

“지, 진짜요…? 뭐든지…?”

방한나는 ‘뭐든지 다 들어준다’는 키워드에 눈을 반짝거렸고,

도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침없이 공수표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은 첫 게이트니까…. 내가 인심 썼다! 도장 두 개!”

“두, 두 개…!”

마치 수련회에서 의미 없는 포인트를 부여하는 것과 같았다.

꿀꺽─

방한나는 군침을 꼴깍 삼키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고,

‘귀엽네.’

도지혁은 어느새 긴장하지 않게 된 방한나를 보며, 무책임한 웃음을 지었다.

“스탠바이! 3분 전!”

어느덧 다가온 입장 시간.

“애들 잘 다독여주고. 내가 있으니까. 알았지?”

“넵…!”

도지혁은 어느새 텐션을 회복한 방한나를 뒤로한 채, 다른 팀원들에게도 응원의 한 마디씩 남기며 지휘 석에 자리를 잡았다.

“입장 5초전! 4, 3, 2…! 입장!”

마침내 팀 서울시청의 첫 번째 토벌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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