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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22화 (222/248)

222. 기억을 들여다볼 때

흰옷을 입은 사제들은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전투 훈련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공격을 눈치채고 몸을 피하기는커녕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숨 한번 내쉬고 들이킬 시간 동안 내가 던진 비도와 단검이 모두 합쳐서 26개였다.

그리고 투척이 끝난 후 살아남은 자는 2명뿐이었다.

내가 무기를 던지는 사이에 또 한 명의 사제가 대사제의 손아귀에서 먼지로 화해 사라진 것이다.

주변의 동료들이 일제히 쓰러지자 뒤늦게 이상을 눈치챈 두 명의 사제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반응이었다.

그들의 목숨은 내가 아니라 대사제가 가져갔다.

대사제의 두 손이 그들의 머리를 쥐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한 번 더 반복되었다.

두 사람이 먼지로 변해서 대사제의 몸을 휘감다가 사라졌다.

먼지로 변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지하 2층의 객실에 살아있는 자는 나와 대사제 단둘뿐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도, 흰옷을 입은 사제들도 모두 죽었다.

이제 대사제만 제거한다면 세르케티의 상층부를 모두 날리는 것이다.

나는 살아남은 자신의 추종자들까지 태연하게 흡수해버린 대사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볼포토나 숲의 현자와 다르지 않은 자였다.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까지 죽이는 신이라니. 인간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걸.”

“모든 존재는 신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그런 짓거리 하다가 잊혀진 신들이 많지.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태연하게 범죄를 저지르던 신들. 다 죽었지.”

내 말에 대사제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내려다보듯 나를 보던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나를 향해 다그치듯 캐물었다.

“죽었다고?”

“신에게 있어서는 잊혀진 것이 곧 죽은 것 아니던가?”

“아니다. 잊혀진 것과 죽은 것은 다르다. 그런데 너는 죽은 신이 아니라 잊혀진 신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서 너는 그들에 대해 아는가? 그들의 이름과 상징을?”

그런 것을 내가 알 리가 있나.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직 너무 적었다.

심지어 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은데 무슨.

그러나 지구의 신들은 조금 안다.

지구에서 소멸한 종교의 신들 중 일부는 태연하게 인신공양을 일삼았다.

평범한 인간보다 못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던 신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신들은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서 이제는 완전히 잊혀졌다.

인간의 심장을 받아먹던 아즈텍의 신들, 인신공양을 제례로 삼았던 메소포타미아의 신들, 윤리가 바닥에 떨어져서 태연하게 강간이나 일삼던 그리스 로마의 신들.

종교로는 조금의 의미도 남아있지 않은 신들이다.

사제도 신자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와 다른 이곳에서 지구의 신들을 들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름을 말하는 대신 신을 자처하는 대사제를 비웃어 주었다.

떠받들어주는 신자들로 둘러싸인 그에게는 가장 아픈 공격일 것이다.

“인간인 나조차 알고 있는 사실을 신을 자처하는 너는 모른다고?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나?”

“혹시나 오래 묵은 놈인가 했더니 입만 살은 자였군. 그렇게 거짓말로 나를 흔든다고 해도 소용없다. 나는 나로 존재한다.”

“나이가 어린놈이라서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인데 뭘 그렇게 스스로를 추켜세우나?”

역시 나이가 급소였다.

이번에도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전처럼 얼굴색이 붉어진다.

정말 속을 알기 쉬운 자였다.

대사제는 더 이상 나와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다고 다시 기운 덩어리를 던지지도 않았다.

내게는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

대신 그는 나를 향해 직접 날아왔다.

그리고 내 어깨를 잡았다.

나 역시 그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서로의 눈이 바로 코앞에서 마주쳤다.

이것은 익숙한 전투였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방식으로 싸웠고, 이겼다.

그리고 상대를 흡수했다.

나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내 믿음은 배반당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의 기운이었지만, 어떤 흐름이 나와 대사제 사이에 형성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의 기운.

그리고 미약했다.

왜 대사제가 배터리 대용으로 사제들을 데리고 다녔는지 단숨에 이해가 될 정도였다.

지금까지 내가 소멸시킨 자들에게서 느껴진 흐름이 꼭지를 한껏 틀어놓은 수도였다면, 이자에게서 느껴진 흐름은 졸졸 흐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사제 역시 그런 점을 느끼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에서 먼지 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도 보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거꾸로 자신이 당하게 생긴 것이다.

나는 점차 공포에 질려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을 통해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도약했다.

[신의 파편은 5개의 대륙과 4개의 바다에 걸쳐 흩어져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넓군요. 내가 아는 대륙은 두 개뿐인데. 그런데 설마 나보고 그 모든 곳을 돌아다니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질문을 하는 자는 대사제였다.

지금보다 좀 더 젊은 모습의 대사제.

지금과 달리 경박한 태도를 가진 내 또래의 젊은이였다.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아니라고 하니까 다행이기는 한대. 이봐요. 별의 의지라고 하신 분. 나는 당신과 달리 오래 못 살아요. 인간이 오래 살아봐야 백 살이지.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에요. 그런데 신의 파편을 모으라고요? 그거 모으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대사제의 앞에서 대답을 하는 자는 여인이었다.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모두 모호하기만 했다.

마치 반쯤 투명한 커튼을 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흥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하군요. 하지만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신비에 접한 자들을 죽인다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아요. 나는 살인마가 아닙니다. 사람을 좀 죽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당신의 선택이라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신의 파편을 모으는 또다른 자가 당신을 찾아갈 테니까요. 당신은 선택된 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런!”

그러나 여인은 대사제를 무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말에서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를 아는 것 같았다.

저 여자가 별의 의지라고?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게 된 것부터해서 모두 다.

그러나 나는 입을 떼지도 못했다.

나와 그녀가 마주보는 순간 나는 다시 시간과 공간을 도약해서 배의 지하 2층 객실로 돌아와버린 것이다.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질려 있던 대사제가 죽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죽은 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죽은 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고, 호흡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도,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실린 간절함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내가 가진 마지막 무기에 손을 댔다.

사복검.

사라 남작 부인이 사용하던 무기와 같은 종류의 검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사복검은 가볍게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풀려나왔다.

와이어를 당기자 연검처럼 축 늘어져 있던 사복검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조각난 철편이 이어져 검의 형상을 갖추게 되는 무기답게 그 예리함은 잘 갈아놓은 검 못지않았다.

얼마나 예리한지 대사제의 목을 자를 때도 약간의 저항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제서야 대사제의 몸이 천천히 부서져 갔다.

밀가루 더미 앞에서 선풍기를 틀어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대사제의 육체는 한 무더기의 가루로 변한 후 허공으로 흩어졌다.

객실이 먼지로 가득 찬 뿌연 공간이 되어 버렸다.

잠시 후 먼지는 공중에서 녹는 것처럼 사라지고 모든 것은 내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나는 대사제의 기억까지 모두 흡수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부분적으로 기억과 능력을 흡수해왔던 지금까지와 달리 대사제의 기억과 능력은 모조리 내 것이 되었다.

심지어 몸에 익은 습관까지 말이다.

마치 내가 한 때 그의 생을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기억이 오염당한 느낌?

더 이상 순수한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전생인지 빙의인지를 이미 경험한 터라 정신적 혼란은 덜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본 장면은 대사제의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지막 순간은 내 바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을 건너뛰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내 희망이 시각화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대사제까지 정리했으니 남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전투의 영향으로 인해 배의 밑바닥에 뚫린 구멍이 수백 개에 달했다.

이 정도라면 항해 중에 간단히 수리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펌프로 물을 퍼내고 최대한 수리하면서 버틴다면면, 침몰 전까지 하루 이틀 정도는 시간을 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다면 지나가는 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선체를 해체해서 뗏목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생존자를 남기고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이들 중에는 대사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를 목격한 자들이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증언하면 분명히 나를 떠올리는 자가 나올 것이다.

아무래도 비도를 던지며 싸우는 실력자가 나 말고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역시 배를 가라앉혀야 했다.

그래서 지하 2층과 1층의 창고를 뒤져서 기름을 찾아냈다.

요리용으로 정제된 질 좋은 기름이 두 통이나 있었다.

이 정도면 불을 지르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나는 이곳저곳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아서 번지는 것을 보고서야 갑판으로 올라갔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불안해하며 아래층 객실로 통하는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사람들은 내가 갑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메뚜기가 튀듯이 사방으로 도망쳐서 모습을 감췄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돛대로 향했다.

이번에는 사복검을 도끼처럼 사용해서 돛대를 내리쳤다.

아무리 단단하고 유연한 나무로 만든 돛대라고 하더라도 연달아 내리치는 도끼질을 버틸 수는 없다.

돛대까지 제거하자 비로소 선내에서 일어난 불길이 갑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갑판이 뜨거워!”

“불이다! 어서 불을 꺼!”

그러나 얼마 남지도 않은 자들로 이미 선내에 번질대로 번진 화재를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그들을 뒤로 하고 뱃전으로 올라섰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가 타고 온 조각배가 맴돌고 있었다.

바람을 움직여 조각배를 가까이 몰고 온 후 그곳으로 뛰어내렸다.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듯 부드러운 낙하였다.

나는 세르케티의 선박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더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내가 비엘리에 다시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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