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프리시오의 선택
“배를 내놔!”
“꼼짝 마!”
비엘리에 도착한 나를 반긴 것은 한 무리의 패잔병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일부로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조각배를 댔는데, 그게 이들의 눈에 뜨인 모양이다.
그들은 내가 조각배를 당겨서 육지로 끌어올리고 근처의 나무에 밧줄로 묶자마자 무기를 앞세우고 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을음과 피로 얼룩진 갑옷을 입고 있는 그들은 어떻게 보아도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자들이었다.
섬에서의 전투는 단두대 매치나 다름없다.
도망칠 수단을 미리 확보해두지 않았다면 지는 쪽은 무조건 죽거나 사로잡힌다.
운 좋게 도망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섬에서 어디로 도망을 칠 텐가.
그렇다고 부두로 가서 다른 교역선에 숨어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승리한 비엘리의 국왕이 이미 부두를 장악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런 이들에게 내 조각배가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구명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칼을 쓰는 자들이지 배를 다루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패잔병 중 그나마 좀 멀쩡한 자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
“배를 몰 수 있는 자가 있나?”
대답이 없었다.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배를 다루고 수영을 하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이들은 바다 건너 대륙 출신이다.
칼은 좀 쓸지 몰라도 바닷일은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그들의 무기도 나를 향했다.
“너.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같이 가는 것은 가는 것인데 누구와 같이 가는 거지? 저 조각배에 탈 수 있는 사람은 4명이 한계다. 게다가 식량도 물도 없는데?”
내 질문은 병사들의 불안을 건드렸다.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면 조각배를 보는 순간 10명이 넘는 인원이 다 탈 수 없다는 것쯤은 짐작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남아야 했고, 남기 싫은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칼부림이 벌어진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성급한 것인지 아니면 과감한 것인지 모를 사람의 칼이 다른 사람을 찌른 순간, 신호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한 칼부림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다.
나는 서로 악을 쓰며 죽고 죽이는 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사람이었다.
조각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끼리는 지금까지의 친분과 신분은 상관없다는 듯 격렬하게 칼부림을 벌였다.
하나둘 운이 없거나 실력이 부족한 자가 쓰러졌다.
서 있는 자가 4명이 되는 순간 나는 허리의 사복검을 풀었다.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던 내가 검을 들자 살아남은 병사들의 시선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리고 그들의 당혹감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병사에 지나지 않는 그들로서는 거침없이 찔러내는 내 검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막기는커녕 그 궤적이나 제대로 보았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 서 있던 4명은 곧 2명이 되었고, 그나마도 금방 쓰러져 버렸다.
도망치던 병사들이 발견한 것은 구명줄이 아니라 재앙이었던 셈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 부두 방향으로 향했다.
비엘리의 상황은 내 예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분명히 어젯밤에는 귀족들의 사병이 부두까지 몰려왔었지만 지금은 국왕의 병사들이 부두를 장악하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배는 출항이 금지된 채 억류된 상태였다.
다리클리프의 용병사무소로 가기 위해 섬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본 광경도 국왕의 승리를 선언하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켰던 병사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포로가 된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뻔했다.
포로로 잡힌 프리시오 공작의 병사들처럼 종신노역형을 선고받고 죄수 겸 노예의 신분으로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나마 그들은 목숨이라도 부지했지.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들은 목이 잘려서 궁성벽에 내걸려 있었다 .
그중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자도 있었다.
분명 쿠나 왕국 출신의 귀족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바다 건너 대륙 쪽이었던 모양이다.
용병사무소장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밤을 새운 모양이군.”
“예. 백작 각하. 반란의 진행에 따라 저희도 움직여야 했으니까요.”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자네가 단순히 밤을 새웠다고 해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내 말에 사무소장은 축 늘어지는 느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애인에게 배신당한 남자처럼 내게 하소연을 해왔다.
“그래도 그동안 다리클리프가 비엘리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외부인이었던 모양입니다.”
“귀족들은 국왕 편이라고 생각하고, 국왕은 아직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귀족들이 우리에게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은 이해가 되는데 국왕이 다른 섬나라에는 지원군을 요청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같은 섬인데 말입니다.”
“섬나라끼리의 연대가 이미 수백 년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양쪽 대륙 중간에서 절묘하게 줄을 타면서 이득을 취해왔다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도 어려운 시기니까 믿음이 우선이겠지. 계속 지켜보고 도와주라고. 어쩌면 반란세력을 제압한 지금이 가장 취약한 시기일 수도 있으니까.”
“백작님께서는 외부에서 개입하는 것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사무소장의 어조와 태도는 입으로 내뱉은 정보 말고도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고있었다.
비언어적 정보와 독심술을 통해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손으로 잡는 것처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귀족들의 반란을 예상해서 이곳에 온 것이었구나.
어제도 반란 추이를 살피기 위해 돌아다닌 것이었겠지.
주동 세력이 누구인지도 확인한 모양이고.
그런데 그 세력은 누굽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걱정할 수밖에. 쿠나 왕국은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잘 살펴보겠습니다.”
“해상 교역망의 유지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자네도 명심해 주게. 용병업으로 먹고사는 다리클리프나 장사해야 하는 칼마르나 해상 교역망이 다른 세력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네.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해야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대들처럼 저도 잘해 내겠습니다.”
“그래. 믿겠네. 칼마르와 다리클리프의 유대가 앞으로도 굳건하길.”
반란의 뒤처리가 끝나고 항구가 정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에도 칼마르에서 보낸 육식조가 나를 찾아와서 외부의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편지 배달용의 전용 드론을 가진 느낌이었다.
육식조가 전해준 편지에는 프리시오 공작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과연 칼마르에서 다급하게 육식조까지 동원해서 내게 보낼 만한 내용이었다.
변경백들이 모두 숙청당한 모양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이 자신의 황제 선언에 반발하던 변경백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그답지 않게.
매우 비겁한 수단으로.
*
프리시오 공작이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한 후 반발하는 변경백들은 무력을 행사해서 프리시오 공작을 견제해 왔다.
그가 제국 서편의 왕국들과 결혼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상당한 피해를 수반하는 무력 충돌까지 감수했다.
그래도 프리시오 공작과 변경백들 사이에는 제국의 서쪽 국경에서 힘을 합쳐서 적대적인 왕국들과 다투며 쌓아온 오랜 유대가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친인척으로 엮여 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진짜 본격적으로 죽고 죽이는 사태로 발전하기 전에 한 번쯤은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나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은 이번 모임을 대화만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프리시오 공작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변경백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공작령의 외곽 경계의 작은 성에서 프리시오 공작은 변경백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장시간에 걸친 설득과 토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은 강경하기만 했다.
결국 프리시오 공작은 지금이 행동해야 할 때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변경백들의 의사를 확인했다.
“내 지원이 없으면 자네들은 자급자족도 안 돼. 고사할 수밖에 없다고! 병사도 영지민도 모두 굶게 될 걸세. 그런데도 고집을 피우나?”
“그래도 다시 말씀드립니다. 공작 전하. 황제가 되고 싶다면 다른 선제후들의 동의를 받으십시오.”
“이제는 살아남은 선제후가 몇 명 되지도 않지 않은가?”
“살아남은 선제후의 동의라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귀족들에게 복속을 명령할 수 있는 명분이 섭니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내게 합류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저희는 저희의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변경백들을 대표한 그랜디슨 백작의 답변은 오해의 여지조차 없었다.
프리시오 공작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국 중부와 동부가 혼란에 빠진 지금이 물실호기라고 판단한 그는 시간을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다.
명분을 따지고 설득하기 위한 시간은 그에게 아주 비싼 낭비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 같군.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걸세.”
“유감입니다. 공작 전하.”
“우리의 오랜 유대를 끝내는 의미로 마지막 잔을 들도록 하지.”
시녀들이 다가와서 새로운 잔을 놓고 독주를 따라주었다.
같은 주전자에서 나온 독주를 모두에게 한 잔씩 부어준 것이다.
침묵이 회담장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이제 술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변경백들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프리시오 공작은 모두의 잔이 찬 것을 확인하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
“우리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기를!.”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프리시오 공작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변경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변경백들의 신뢰는 배반당했다.
내전이 벌어지고, 공작들끼리 죽고 죽이며, 심지어 하극상까지 벌어지는 지금.
명예와 관례는 신뢰할만한 것이 안 되었다.
초청한 손님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관례도.
귀족은 암살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명예도.
이제는 지키는 사람만 지키는 것이 되었다.
술을 마신 변경백들은 거의 동시에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발이 마비되고,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은 독이었다.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이런 짓을······”
“나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네들은 조금도 타협하려고 들지 않았지.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명분도 명예도 저버린 자가 어떻게 황제를······”
“내가 황제가 되면 명분과 명예는 저절로 따라올걸세. 누대에 걸친 인연이 이렇게 끝나게 되어서 나도 유감일세들.”
프리시오 공작은 마지막까지 버티던 변경백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술잔을 던졌다.
밖에서는 비명과 함성이 들리고 있었다.
매복해둔 부하들이 변경백들의 수행원들을 공격하는 소리였다.
여기서 수행원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면 변병백들이 남겨놓은 군세를 흡수할 수도 있다.
어떻게 되었든 이번 암살로 변경백의 군대는 더 이상 골칫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프리시오 공작의 다음 목표는 세력을 잃고 자신의 성에 틀어박혀 있는 겁쟁이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프리시오 공작의 안중에도 없는 하찮은 자들이었다.
결혼 동맹으로 얻게 된 조력자 한 명의 능력만으로도 벌레를 눌러 죽이듯 없앨 수 있다.
프리시오 공작은 좀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