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21화 (221/248)
  • 221. 대사제와 싸우다

    계단 아래는 적막하기까지 했다.

    계단 아래로 던진 시체에 얻어맞은 사제는 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동료와 함께 엉켜 있었다.

    사제 두 명이 죽어서 선실 복도에 쓰러져 있는데도 나와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판 위에서 소란스럽게 난리를 쳤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이렇게 조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들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한 층 더 아래.

    그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직감이 이끄대로 걸어갔다.

    갑판 위에서 처리한 사제들만 해도 15명에 달한다.

    모두 기사 못지않은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실전 능력이 영 꽝이라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곧 만나게 될 자들은 갑판 위에서 내게 죽어갔던 자들과 다를 것이 뻔했다.

    적어도 내게 죽어간 자들보다는 실력이 뛰어날 것이다.

    어쩌면 신비에 접한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다.

    대사제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키는 자들이니까 말이다.

    과연 갑판 아래로 2개 층을 내려가자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평민의 집에서 귀족으로 집으로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지하 2층은 대귀족이 머무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선실을 만든 나무는 최고급을 썼고, 가구와 비품조차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름 부잣집 사위로 들어온 터라 비싼 물건이라면 원 없이 써 본 나조차 흠칫할 정도로 비싼 것들이 복도에서부터 널려 있었다.

    장사 중에서도 종교 장사가 제일 짭짤하다고 하더니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치유와 풍요는 개뿔이.

    신전 건립을 위해 기부금을 요청하던 사제들이 이 꼴을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

    이러니 본단은 또 얼마나 화려할까?

    여기 있는 것을 다 팔면 신전을 몇 개라도 지을 정도였다.

    대사제는 세르케티에 기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사제를 지키는 자들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객실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모두 4명이었다.

    물론 그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나를 보자마자 안으로 기별을 했는지 객실에서 계속 사제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갑판 위에서 내게 몰살당한 자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사제복의 색도 흰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고, 얼굴에서 드러나는 삶의 경험도 다양했다.

    일부는 용병 출신, 일부는 기사 출신.

    그리고 일부는 암살단같이 어두운 일을 처리하던 자들이었다.

    모두 실전을 겪을 대로 겪은 자들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함선 특유의 좁은 복도는 내 행동을 제약했다.

    그러나 그만큼 저들의 행동도 제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앞에 서는 자는 2명이 한계다.

    그것도 옆에 있는 동료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전투를 한다고 가정해서 2명이다.

    조심스러운 전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결국 제 실력대로 싸우려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차례차례 나를 공격해야 한다.

    저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뚜벅뚜벅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나를 향해 한 명씩 일렬로 마주 보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선 자는 짧은 칼을 들었다.

    좀 길다 싶은 단검?

    50cm 정도 되어 보이는 칼이었다.

    내가 든 무기 역시 단검이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다른 무기를 쓰는 것이 불리하기는 하다.

    아무래도 길면 걸리적거리니까.

    그래서 단검으로 하나 더 빼어 들었다.

    나는 양손에 단검을 역수로 사마귀처럼 잡고 나를 향해 오는 자를 노려보며 걸어갔다.

    우리가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을 때 .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로 그때.

    복도의 나무벽을 꿰뚫고 창촉이 나를 향해 찔러왔다.

    지나가던 나를 벽 뒤에서 노리고 찌른 것이다 .

    창끝은 내 가슴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손바닥도 하나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동시에 나는 쥐고 있던 단검을 왼쪽 벽을 향해 던졌다.

    단검은 얇은 나무벽을 부수고 그 뒤에 있는 자까지 꿰뚫었다.

    좌우의 벽 뒤에는 아직도 3명의 적이 남아 있었다.

    좌측에 1명. 우측에 2명.

    상태창은 그들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표시했다.

    그러나 일단은 눈앞의 사제부터 처리해야 했다.

    바로 두 걸음 앞에 있던 검은 옷의 사제는 내가 단검을 벽을 향해 던지는 순간을 노리고 칼을 찔러왔다.

    그러나 내게는 느리기만 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으며 아래로 당겼다.

    압도적인 힘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세가 구부러진 사제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단 한 합이었다.

    쓰러지는 그에게서 칼을 빼앗아서 이번에는 오른쪽 벽을 향해 던졌다.

    벽이 부서지고 벽 뒤의 적도 부서졌다.

    연달아 뛰어들려고 했던 바로 뒤의 사제는 오히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나를 보고 다급하게 칼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짧은 칼은 가까이 접근해야 비로소 찌를 수 있는 무기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라면 팔을 뻗어서 상대를 잡을 수도 있는 거리다.

    두 번째 사제 역시 바로 직전에 죽은 사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버렸다.

    그제서야 변화가 일어났다.

    실전 경험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닌 모양인지 세 번째 사제는 양손 단검으로 무장을 바꿨고, 그 뒤에서는 비도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좀 떨어진 입구에 있는 사제는 쇠뇌를 장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곧이어 벌어진 전투는 갑판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전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상대할 적들이 차례대로 하나씩이라서 오히려 갑판보다 편할 정도였다.

    거기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근접해서 서로 잡고 찔러야 했기 때문에 내게는 최고의 전장이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적들의 팔목을 분지르고, 당겨서 어깨를 탈골 시키고, 손날로 목을 쳐서 마비시켰다.

    중간중간 칼질도 하고, 날아오는 투사체를 막기 위해 죽어버린 자들을 앞으로 집어던지기도 했다.

    물론 벽 뒤에 숨어서 나를 노리는 자들도 잊지 않았다.

    2개의 빼앗은 칼을 던져서 남은 2명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10미터가 조금 넘는 복도는 시체와 피로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하얗던 복도가 붉게 변했다.

    힘이 비슷하다면 기술이 승패를 가른다.

    기술이 뛰어나다면 웬만한 힘의 격차는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

    거기다 기술까지도 더 뛰어나다면 숫자로 누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곳은 숫자의 우위를 살릴 수도 없는 지형이다.

    이들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 결과가 이제 한 명밖에 안 남은 검은 옷의 사제였다.

    나는 객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마지막 사제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대부분의 사제들을 죽인 단검이었다.

    단검은 사제의 머리를 부수고 객실의 문까지 반쯤 박살내 버렸다.

    부서진 문 너머로 대사제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흰색옷의 사제들이 보였다.

    대사제의 수발을 들고, 문서를 정리하고, 비서 역할을 하는 측근들임이 분명했다.

    반쯤 부서진 문은 발길질 한 번에 단숨에 날아갔다.

    “세르케티의 대사제. 이제서야 당신을 만나게 되었군.”

    “당신은 누군가?”

    대사제에 어울리는 위엄있는 발성이었다.

    눈을 감고 들어도 권위가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아무 소용 없었다.

    내게는 똥만도 못했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 당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아직도 모를 수가 있을까? 세르케티의 신실한 종들을 이렇게 죽여 놓았는데!”

    대사제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는 듯 했다.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세르케티의 신실한 종이 아니라 당신의 종이겠지. 신비에 접한 자들을 제압해서 당신에게 바치는 자들. 세르케티가 그런 것을 지시했을 리가 없으니 당신의 종이 맞지 않을까?”

    내 말에 대사제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세르케티의 종이 곧 내 종이다. 세르케티가 나고 내가 세르케티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르케티이며, 센티나이며, 파우스툴라이고, 아나수스틴이고, 카바사리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나다.”

    “제대로 미친놈이었군.”

    나는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온갖 종교의 신성을 가져다가 읊고 있는 그는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사제의 어조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감고 말만 듣는다면 누구나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할 것 같았다.

    “신비를 완전히 하나로 묶어내면 나는 신으로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신이 죽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온전한 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사람을 죽이고 다녔나?”

    “필멸자여!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백 년도 못사는 존재가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벌레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냉소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케티의 하층부는 건실했지만 상층부는 미쳐있었다.

    상층부를 제거하겠다는 내 판단은 옳았다.

    “4백 년을 넘게 산 자들도 별거 없던데? 내 눈에는 당신도 다를 것이 없어 보여.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까지 비슷하네.”

    대사제가 말을 멈췄다.

    지금까지는 약간 미친놈 같았는데 이번에는 분노에 휩싸인 분위기였다.

    내가 한 말 중에서 뭔가가 저자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혹시 4백 년이라는 말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이?

    볼포트가 지금까지 날뛴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활동하면서 4백 살 이상이라니 말도 안 된다.

    원로원의 두 늙은이는 숨을 죽이고 숨어 살아서 4백 살이고.

    나는 즉시 찔러봤다.

    “당신 4백 살 안 되지? 아마 3백 살도 되지 않았을거야. 어쩌면 2백 살도 간당간당하지 않은가 싶은데? 설마 백 살은 넘었겠지? 그것도 아닌가? 그러면서 내게 필멸자가 어쩌고 한 거야? 정말 미친 놈이었군.”

    찔러보는 내 말에 대사제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오랫동안 윗자리에 앉아서 좋은 말만 듣고 지내서 그런지 감정을 숨기는 것에 서툴렀다.

    그의 안색을 보고 판단한 결과는 이백 살 미만 백 살 이상이었다.

    이러면 장수한 인간보다도 못한 나이다.

    스스로를 신이 될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자가 정통으로 약점을 찔리면 남은 것은 분노뿐이다.

    나는 대사제의 안색이 붉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경호 사제들은 모두 내게 죽은 후였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은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그를 대신해서 싸울 자는 이곳에 없다.

    나를 죽이고 싶다면 그가 직접 해야 한다.

    과연 그는 그렇게 했다.

    지금까지 신의 파편을 흡수해서 어딘지 모르게 인간이 아닌 것 같았던 자들과의 싸움은 의외로 단순했다.

    마치 무협에서 나오는 내공겨루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서로 몸을 잡고, 신의 파편에서 비롯된 기운이 오고 가다가 우세한 쪽이 이기는 것으로 끝났다.

    이기면 이긴 쪽에서 진 쪽의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고 말이다.

    그러나 대사제와의 싸움은 약간 달랐다.

    대사제는 한 손을 위로 들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흰옷의 사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고요 속에 살기가 흘렀다.

    나는 즉시 단검을 양손에 나누어 잡았다.

    몸속 곳곳에 숨겨온 6개의 단검 중 3, 4번 단검이었다.

    비도 역시 아직은 24개가 남아 있었다.

    내가 단검을 손에 쥐자 예고도 없이 대사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깨 위로 든 손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운 덩어리라고 할까?

    기운을 주먹만한 덩어리로 뭉쳐서 던지면 딱 이런 느낌이겠다 싶었다.

    기운 덩어리는 무차별로 연사하듯 내게 날아왔다.

    단검으로 기운 덩어리를 쳐 내려고 했지만 단검은 맞는 순간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마치 얇은 나무판자로 쏘아낸 쇠공을 막으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기운 덩어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몸뿐이었다.

    손으로 쳐내거나 막아야 했다.

    직접 맞으면 영혼이 타격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손으로 쳐낼 수 있었다.

    내가 쳐낸 기운 덩어리는 이곳저곳으로 날아가서 선체에 구멍을 숭숭 뚫어버렸다.

    뚫린 구멍에서는 햇빛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아래로 뚫린 구멍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중일 것이다.

    나는 아래로 뚫린 구멍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

    기운 덩어리를 되도록이면 아래로 쳐내기 시작한 것이다.

    “왜! 아직도 버티지?”

    대사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쳤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변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던 사제들의 머리를 잡았다.

    순간 머리를 잡힌 사제가 부스러졌다.

    그는 먼지로 화해 무너졌다.

    먼지는 회오리치듯 대사제를 감싸고 돌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다른 사제의 머리를 잡았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신비에 접한 자들은 검은 옷의 사제가 아니라 대사제 주변의 흰옷을 입은 사제들이었다.

    대사제는 마치 배터리처럼 그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24개의 비도와 2개의 단검을 연사하듯 던졌다.

    내 목표는 흰옷의 사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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