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학살 또는 전투
조직의 최상층부에 있는 사람은 방향을 제시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해야 할 일의 전부다.
실무적인 일은 아랫사람이 하자는 대로 승인을 해주면 된다.
현장 책임자가 해놓은 일에 쓸데없이 참견을 하기 시작하면 아이폰이 아재폰 되거나, 일정이 한없이 연기되는 대참사가 벌어지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대사제는 세르케티의 최고위직에 있는 사람답게 행동했다.
신뢰하는 젊은 비서장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의 결정을 대신한 것이다.
배를 언제 출항시키고, 누구를 데려가고. 누구를 남기고 하는 것은 대사제나 되는 존재가 신경 쓰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사제는 자신이 흡수한 신의 파편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을 잃고, 엉뚱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을 걷고 있는 중이라서 다른 곳으로 신경이 분산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대사제는 모든 것을 젊은 비서장에게 맡긴 후 세르케티의 선박 깊은 곳에 만들어져 있는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명상을 계속했다.
대사제로부터 모든 결정에 대한 위임을 받아온 젊은 비서장은 즉시 출항 준비에 나섰다.
육지에서 밤을 지내기 위해 상륙한 선원들은 포기하고 부족한 선원은 임대한 상선에서 끌어다가 채웠다.
물과 식량은 이미 낮에 다 보충한 후라서 더 이상 손을 볼 것도 없었다.
비서장은 출항 준비가 끝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출항해 버렸다.
뒤늦게 달려온 귀족의 사병들이 부두에서 시끄럽게 떠들기는 했지만, 의미없는 소란이었다.
대신 그들은 화재 때문에 부두에 남은 다른 배를 향해 몰려갔다.
조금씩 밤하늘이 밝아오고 멀리 지평선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비엘리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다 바다였다.
선장은 밤사이에 약간 틀어졌던 항로를 바로 잡고, 선원들이 아침을 먹는 모습을 보며 바람을 살폈다.
나쁘지 않은 바람이었다.
이 정도의 바람이 계속 불어준다면 예상보다 약간 빨리 쿠나 왕국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선장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항해사. 저거 보이나?”
“조각배군요. 돛까지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어설픈 사람이 모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멀리 나오는 것은 위험한데······ 아니, 사람이 없는대요?”
“그렇지? 조각배에 사람이 없지?”
그러나 좀 더 시간이 흘러서 조각배가 가까이 오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선장은 조난당한 사람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없어서 조난을 당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발견되었느니 운이 아주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야.”
“그렇습니다. 선장님. 다른 배에 발견되었다면 노예행이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섬에서는 언제나 일손이 부족하니까. 젊은 일꾼이라면 어디서든지 비싸게 사들일 거야.”
선장의 어조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만약 대사제님을 모시고 운행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용돈을 챙길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케티의 중요한 사제들과 호위 사제들이 수십 명이나 타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당장에 선장직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가 알기에 세르케티는 구호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선장은 가까이 온 조각배를 수거하고 표류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선원들에게 바다로 뛰어들라고 지시하려고 했다.
그때, 조각배에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젊은 남자, 햇볕에 타지 않은 하얀 피부, 제대로 갖춰 입은 가죽 갑옷.
뱃사람 노릇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온갖 종류의 인간군상을 대하게 된다.
경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선장은 젊은 남자를 보는 순간 무엇인가 위화감을 느꼈다.
저자는 절대로 표류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그를 멈춰 세웠다.
과연 그의 경험은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
세르케티의 선박은 대충 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백여 명.
그것은 여기서 죽어야 할 사람들의 숫자이기도 했다.
나는 이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대사제, 대사제를 보좌하는 고위 사제들, 그들의 손발이 되어서 사람을 나르고 죽이는 실행 인력까지.
모두 다.
선원들까지 말려드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들 역시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방관자와 조력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신의 파편과 관련된 일 때문만은 아니다.
이유의 절반 정도는 대사제가 저지르는 일에 대한 공범과 방조범이 이유가 되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세르케티의 가능성 때문이다.
세르케티의 종교적 포지션이 너무 좋아서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제국에서 처음으로 유의미한 종교 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 볼 것은 아니다.
일반 사제들은 내 기준에서도 신실한 종교인이었으니까.
그들은 영지민들에게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나로서는 고맙기까지 한 일이다.
그러나 최상층부는 다르다.
그들은 신의 파편을 모은답시고 세르케티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대사제는 자신이 세르케티, 그 자체가 되겠다고 저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세르케티가 이대로 방치된 채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꼬리가 잡히고 귀족과 크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세르케티는 앞으로도 쓸모있는 조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직의 최상층부는 완전히 날려버려야 했다.
나는 세르케티의 함선을 향해 갈고리 밧줄을 던졌다.
뱃전에 갈고리가 고정이 되는 순간 밧줄을 잡고 세르케티의 함선을 향해 위로 달렸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세 발짝 만에 뱃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나를 보는 선원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배는 세르케티의 대사제와 그분의 일행이 승선하고 있소. 우리는 상선도 전투함도 아니오.”
“그리고 대사제의 경호 사제들은 기사 못지 않지. 무엇인가 오해가 있다면 대화로 풉시다.”
내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고급 선원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그 옆의 선원은 아예 협박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양팔에 감겨 있던 비도집에서 연달아 비도를 뽑아서 던졌다.
모두 24개.
내가 가진 비도의 절반이 한순간에 갑판 위를 휩쓸었다.
갑판 위의 선원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경험을 쌓은 선원은 한 사람의 병사 몫은 충분히 해낸다.
하지만 방어구도 없이, 상반신에는 셔츠 하나 걸친 채 모여 있던 선원들로서는 갑자기 날아온 비도를 막을 만한 수단이 없었다.
그들은 몸으로 공격을 맞아야 했다.
선원 중 절반이 넘는 숫자가 죽거나 부상을 입고 갑판에 쓰러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남은 선원은 10여 명 남짓.
그 숫자로는 돛이 달린 대형 선박을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으로 일단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다.
다음은 대사제였다.
나는 뱃전 위에서 오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비도를 쳐내는 데 성공한 자도 몇 명 있었다.
공으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내게 협박을 했던 고급 선원도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는 부하 선원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비명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당장 저자를 죽이십시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그렇다면 내 비도를 쳐낸 자들은 역시 선원이 아니라 세르케티에 속한 자들임에 분명했다.
일반 사제는 아닐 것이고, 대사제를 지키는 경호 사제?
정신없이 울리는 종소리와 호각 소리를 배경으로 경호 사제들이 연달아 간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의 사제복은 공통적이었지만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등 뒤의 대도를 뽑아서 휘두르며 사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아래 전후좌우.
내가 공격을 볼 수 있는 방향이다.
내게는 두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는 전부가 아니었다.
마스터 요한이 가르친 오르벤 강체술을 꾸준히 수련하면서 얻은 감각과 신의 파편으로 생각되는 온갖 기운을 흡수하면서 얻는 느낌은 나를 무공의 고수로 만들어 주었다.
적어도 ‘보는 것’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다.
뒤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쇠뇌살을 슬쩍 어깨를 비트는 것만으로 피해 버렸다.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쇠뇌살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나를 노렸던 쇠뇌살은 정면에서 내게 달려들던 사제의 가슴에 박혔다.
나는 쇠뇌살을 맞고 비틀거리는 사제를 좌측으로 밀치며 우측의 사제들을 향해 대도를 크게 휘둘렀다 .
사람과 무기가 동시에 수수깡처럼 잘려 나갔다.
나를 노리고 왼쪽에서 찔러오던 창은 나 대신 쇠뇌살을 맞고 죽어가던 사제를 다시 한번 꿰뚫었다.
우측으로 휘두른 커다란 칼은 힘을 실은 채 그대로 한바퀴를 돌았다.
칼의 끝에 좌측에 있던 사제의 목이 걸렸다 .
좌측에 있던 창을 든 사제 역시 우측에 있던 사제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정신없이 쇠뇌의 도르래를 당기고 있는 사제를 향해 비도를 던졌다
*
한순간에 5명의 호위 사제가 죽어 나갔다.
이리저리 엉키면서 서로 죽이거나 젊은 남자 대신 무기를 맞는 등 온갖 추태를 보이며 죽어나간 것이다 .
호위 사제 개개인은 기사에 못지않은 무력을 가지고 있다.
대신전에서 어릴 때부터 전투의 전문가로 키워내는 살인 병기들이 호위 사제였다.
그런데 일반 병사들도 보이지 않을 추태를 보이며 한순간에 죽어 나간 것이다
선장은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은 선원이었다 .
전투라면 웬만한 용병 못지않게 겪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실력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해서 저런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
선장이 액운이 껴도 단단히 꼈다고 비탄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호위 사제들은 연달아 죽어나갔다.
선원들은 전투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갑판 곳곳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서 숨어들었다.
젊은 남자는 더 이상 호위 사제들이 갑판으로 올라오지 않자 이번에는 선실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에는 두 명의 호위 사제가 죽음을 각오한 표정으로 검을 쥔 채 입구를 막고 있었다.
선장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
실전에는 약한 자들이었다.
배운 대로 너무 정직하게 싸우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실전 없이 대련만으로 훈련한 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약점이다.
계단을 막고 있던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직선으로 달려드는 내게 칼을 내밀어 찌르려고 했다 .
그러나 나는 그들과 칼을 섞을 생각조차 없었다.
좁은 계단 입구에서 긴 칼을 가지고 무슨!
나는 그들이 내민 칼을 피하며 그대로 부딪혀 버렸다.
정면으로 부딪친 한 명은 계단 아래로 굴러버렸다.
경사도가 제법 있는 계단이라서 부상은 피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살짝 빗맞은 다른 하나는 오히려 끌어안으며 단검으로 목을 찔렀다.
내 갑옷을 스치고 지나간 그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
나는 저항을 잃고 늘어진 그를 계단 아래로 던져 버렸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계단 아래의 호위 사제는 큰 충격을 받고 다시 한번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한 손에 단검을 든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아래에 대사제가 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