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공성전이 끝나다.
남작군이 모조리 다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원래도 좁은 성벽 위였지만 병사들로 들어찬 지금은 훨씬 더 좁아 보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성벽에서 떨어지는 자가 한둘이 아닐듯싶었다.
그러나 숫자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남작군의 사기는 별로 높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겉으로 보아도 피곤함에 절어서 움직임이 굼뜬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나 건드리지 말아라 좀 쉬자는 말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하다.
며칠째 계속된 투석기의 공격으로 인해 제대로 쉬지 못했을 테니까.
거기다 조금 공격이 익숙해진다 싶으면 당장이라도 성벽을 오를 것처럼 사다리를 들고 몰려오니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선잠을 자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래도 전투에 익숙한 용병이라면 어떻게든 토막잠이라도 자면서 휴식을 취했을 테지만, 영지병에 치안대까지 무기를 들어본 자들은 다 끌어 모은 잡다한 병사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그발다 남작이 부하들의 휴식을 따로 챙긴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그발다 남작이 무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것뿐이다.
영지민이 평생 자신의 영지를 떠나지 않고 사는 세상이다.
그것은 귀족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귀족의 보고 들음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거기다 제국은 수백 년간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였으니, 지방의 영주는 통치에 대한 것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군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은 소홀히 하기 쉬웠다.
날씨나 종자의 상태, 토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검법이나 전술교범에 대해 토론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황도에 군사 아카데미 같은 것이 있어서 따로 교육을 시키는 것도 아니다.
결국 지방의 귀족은 집안의 기사에게서나 아니면 가정교사를 들여서 교육을 받아야 했고, 군에 대한 지식은 결투라든가 관습화된 영지전 같이 개인의 무력을 강조하는 쪽을 좀 더 자세히 배우게 된다.
실전 경험도 실제로 전투를 하는 것보다는 도적에 대한 토벌을 통해서 익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이정도로 공성전을 치루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아이그발다 남작이 꽤나 유능한 편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이런 자가 경험과 지식을 쌓으면 골치아파진다.
그러니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죽여야겠다.
나는 성벽 위의 적들을 일별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는 다리 위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대형 쇠뇌에서 발사한 쇠뇌살을 막아낸 나는 지체하지 않고 성벽 위로 뛰어들었다.
“죽어!”
내가 성벽 위에 두 발을 딛기가 무섭게 기합을 넣는 것처럼 소리를 치며 남작군의 병사 하나가 방패를 앞세우고 내게 쇄도해 들어왔다.
나를 밀어서 성벽 아래로 떨어뜨리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원래 성벽 위에 적이 올라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방패를 들고 있는 병사가 적을 밀어서 다시 성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게 안 되면 성벽 위에서 혼전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까지 상황이 악화되면 예비대의 투입이라도 있지 않은 한 성벽 위를 빼앗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게 방패를 들고 돌격해 온 병사는 사전에 부여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아니, 내가 아니더라도 그가 성벽 위에 올라간 우리편을 성벽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공성탑에서 가장 먼저 다리를 건넌 자들은 모두 기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개 병사의 저항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이다.
나는 나를 향해 부딪쳐온 방패를 가볍게 피하면서 오히려 방패를 든 병사를 밀어버렸다.
쉬운 일이었다.
달려오는 자를 막는 것이 아니라 힘을 보태서 달리는 방향으로 밀어 버리는 것이었으니까.
방패를 든 채 균형을 잃고 나를 지나쳐버린 병사는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10미터의 성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니 운이 좋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부상까지 피할 수는 없겠지만.
방패를 앞세우고 돌격해온 병사는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이미 성벽 아래로 밀어버린 병사말고도 한 명이 더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 옆에서 튀어나온 기사에 의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기사는 그의 왼쪽 팔로 병사의 방패를 막으면서 몸을 낮추더니 전쟁 망치를 휘둘러서 방패 아래에 노출된 병사의 발등을 부숴버렸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세웠고, 방패의 보호를 벗어난 머리는 투구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등처럼 되어 버렸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병사는 금방 누군가가 발로 밀어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 사이에 공성탑에서 성벽 위로 기사들이 연이어 건너와서 10명이 되었다.
그들 뒤로도 갑옷을 제대로 입은 용병들이 연달아 성벽 위로 건너왔다.
어디에 가도 하사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숙련된 용병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공성탑 다섯 군데에서 동시에 기사와 용병을 성벽 위에 쏟아 부었다.
기사가 무리지어 앞장을 서고 용병이 뒤를 받힌다.
기사가 흩어져서 병력을 통솔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공격이었다.
우리를 방패로 밀어내지 못한 남작군은 어쩔 수없이 혼전에 말려 들어갔다.
그러나 모두 합쳐봐야 10여 명에 불과한 남작군의 기사와 지쳐있는 병사로는 연합자치령의 군대를 밀어내기는커녕 도리어 자신들이 밀려날 판이었다.
반면에 성벽 위로 투입된 기사들은 자신들이 왜 대인전의 달인인지를 남작군을 상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 올라선 기사들은 남작군 사이에 뛰어들어서 남작군을 연달아 쓰러뜨리며 후속하는 용병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남작군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죽어 넘어지는 동료들을 보자 몸을 사리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성벽 위에는 아이그발다 남작의 병사보다 연합자치령의 병사들 숫자가 더 많아질 판이었다.
아무래도 남작군의 병사들은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았다.
번득이는 칼이 바람을 찢는 소리를 낼 때마다 반드시 한 명은 죽었다.
반면에 아무리 칼로 치고 도끼로도 치고 창으로 찔러도 판금갑옷을 입은 우리쪽 기사는 쉽게 죽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 후의 빈틈을 노려 병사들을 죽이곤 했다.
남작군의 병사들이 무력감과 두려움에 질려서 정신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투의 균형이 깨지려는 순간이었다.
파국을 막을 자는 결국 같은 기사뿐이다.
그러나 남작의 기사들은 성벽 위에 흩어져 있어서 이렇게 무리지어 밀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0여 명씩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사를 상대로 한두명의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괜히 앞에 나섰다가는 땅에 깔린 채 단검이 눈을 찌르는 것을 보게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나는 병사들 대신 연합자치령의 기사들을 막아선다면 용기가 대단하거나 실력이 대단한 자일 것이다.
여기 그런 자가 하나 튀어 나왔다.
일반적으로 시골 기사의 실력을 낮추어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접경 지대의 기사들 역시 비슷하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은 좀 더 대우가 좋은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골 기사 중에도 성실한 수련을 통해 규격 외의 기사가 되어버리는 자가 어쩌다 있다고 한다.
그런 자들 중 하나가 10명의 기사를 상대로 자신의 창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창끝에 갈고리가 달려있는 기형창이었다.
성벽 위의 좁은 공간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미처 뒤로 피하지 못한 남작군의 병사 하나가 창을 피하려다가 성벽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실력만은 진짜였다.
내 앞에서 남작군의 병사를 도끼로 때려잡고 있던 기사는 분위기가 넘어가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기형창을 휘두르는 기사를 향해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도끼를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그러나 남작령의 기사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작은 도끼를 쳐내고 반대로 기형창으로 찔러들어왔다.
연합자치령의 기사 역시 창촉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듯 갑옷을 믿고 도끼를 휘둘렀다.
아무리 판금갑옷이라고 해도 이런 공격이라면 어디가 깨져도 깨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남작령의 기사는 기형창의 창촉으로 도끼를 툭툭 치면서 도끼의 공격 방향을 틀어놓는 마법을 부렸다.
여기에 휘말린 기사가 포기를 못하고 가까이 가려고 할때 창에 달린 갈고리로 갑옷을 낚아채서 당기다가 옆으로 확 비틀어 버렸다.
그것으로 내 기사는 내가 보는 앞에서 성 아래로 던져졌다.
뭐 이런 놈이!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라서 반항이 심해도 그냥 두고 봤는데 기사 대 기사로 붙어서 희생자가 나왔으니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즉시 단창을 결합하며 반격에 나섰다.
휘청휘청 상대방의 창촉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내 얼굴을 노렸다.
반면에 나는 한순간에 남작령의 가사에 돌입하며 창으로 찔러갔다.
엇!
서로의 창이 엇갈려 맞붙은 채 연달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향해 한 칼 먹이려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요령과 힘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힘은 남작령의 기사와는 바할 바가 아니다.
맞붙은 상대의 기형창은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내게 휘둘렸다.
앗 하는 사이 기형창은 기사의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방어수단을 잃은 기사의 몸에는 내 창이 대신 박혀들어갔다.
그때였다.
“이 괴물같은 놈아!”
아이그발다 남작은 내가 자신의 가장 강한 기사까지 죽이는 모습을 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게 달려왔다.
한 손에는 펄션을, 다른 손에는 전투 망치를 든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만약 사람이 분노할수록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면 지금 이순간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날뛸 아이그발다 남작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죽여야 할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조립이 된 철창을 가지고 있는 내게 펄션이나 전투 망치는 너무 짧은 공격 거리를 가진 무기였다.
남작은 그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철창으로 가하는 견제 때문에 내게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권고하겠다. 항복하라. 남작.”
“웃기지 마! 가짜 귀족놈아!”
“아르보그 공작은 죽었다. 내 눈으로 봤지. 항복하면 연합자치령에 받아 주겠다.”
내 말에 아이그발다 남작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잠시 망설였다는 것이 그 자신에게도 충격이었는지 더 강경한 태도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사망확인서에 싸인을 해 버렸다.
아이그발다 남작은 그의 부하보다도 쉽게 죽어 버렸다.
그들의 영주가 죽었음에도 전투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영지 관리들과 영지군의 지휘자들이 영주가 죽었음에도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사들은 전원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후 그리고 병사들은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후에서야 항복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장 정리는 거의 일주일 가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