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승리의 그림자
따지고 들면 별것 아닌 승리였다.
아르보그 공작령의 주변부에 있는 평범한 남작령 하나를 점령했을 뿐이다.
특별한 전략이나 전술로 이긴 것도 아니다.
그저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그마치 10배의 병력으로 전투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20배의 병력으로 둘러쌌다.
이런 것을 전투라고 하면 지금까지 나와 함께 움직였던 용병들이 웃는다.
그러나 연합자치령의 귀족들에게는 이 승리의 의미가 그리 단순하게 다가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글렌 공작 파벌에 속했던 자들도,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에 속했던 자들도 연합자치령이 힘을 모아서 아르보고 공작의 세력에게 이겼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제국이 건재하던 시절, 8명의 선제후가 동일하게 공작 작위를 차지하고 있었다지만 그들이 모두 동일한 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귀족은 아무도 없다.
귀족들은 진정한 선제후라고 할 수 있는 4명의 공작 가문을 특별하게 생각했고, 실제로 그들만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나머지 4명의 공작과 함께하는 귀족들에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제도 없고, 선제후도 없는 지금.
근본없는 백작과 영지도 없던 남작이 끌어모은 세력으로 4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과 전투를 벌여서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귀족연합자치령에 참여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뭔가 마음에 묶여 있던 족쇄가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감정은 열렬한 전투 의지로 드러났다.
전장 정리 따위는 후속하는 부대에게 대충 맡기고 어서 다음 영지로 밀고 들어가자는 주장이 사방에서 분출했다.
전장 정리를 위해 눌러앉은 일주일이 너무 아깝다며 조속한 출진을 요구하는 자들이 하루에도 몇 무리씩 내게 몰려왔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귀족들의 주장을 물리쳤다.
대신 대부분 기사이기도 한 귀족들에게 기마 정찰에 나서 줄 것을 요구했다.
특히, 다음 전장이 될 블라바 영지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줄 것과 이곳에서 피난한 영지민들이 어디까지 피난을 했는지 알아봐 줄 것을 요청했다.
피가 끓는 귀족들은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먼저 정찰에 나섰고, 내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일부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병사들을 챙겼다.
사실 내 태도가 비정상적인 것은 조금만 전략을 알아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이룬 성과가 작은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제법 명성도 높아져서 뭔가 노리는 바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대신 그들은 설명을 바라는 노골적인 눈초리로 나를 괴롭혔다.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군대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에 박아넣게 된다.
지금처럼 서전에 승리했고, 상대방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빠르게 적을 향해 몰아치듯 치고 나가야 한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병력, 이를테면 신병 위주로 구성된 백인대라든가, 치안대 같은 병력을 점령지에 좀 떨구어놓고 최대한 빨리 전략적인 의미가 있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해야 한다.
빠르게 이동할수록 준비 안 된 적을 쉽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영지를 몇 곳 점령한 후 눌러앉아 있으면 어떻게 될까?
따로 생각할 것도 없다.
아르보그 공작 파벌의 귀족들은 반쯤 돌아 버릴 것이다.
아무리 불리하고 준비가 덜 됐어도 일단은 있는 병력이라도 이끌고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아르보그 공작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을까?
즉, 왕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영지도 없는 남작이 급조한 세력에게조차 패배해서 핵심적인 지역을 뺏기는 가문이 왕이 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아르보그 공작은 누가 되는건데?
이런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
연합자치령뿐 아니라 뱅트손도 손을 뻗을 것이고 지슬리는 복수를 부르짖으면 튀어나올 것이다.
이렇게까지 몰리면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이 어지간히 유능하지 않고서는 단순히 세력권을 유지하며 버티는 것조차 만만하지 않게 된다.
그와 같은 배를 탔던 귀족들은 그래도 운명을 같이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둥지를 알아봐야 할지 결정하는 처지에 몰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곳에 신속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 신참자로 다른 세력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 속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더 어렵다.
어쩌면 골수까지 뽑아먹히고 버려지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준비가 되었든 안되었든 상관없이 일단 싸우러 나올 수밖에 없다.
준비가 안 되었으니 패배할 가능성은 한없이 올라가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석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 가문이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르보그 공작 가문이 손에 쥔 병력 중 가장 정예병은 북쪽에서 지슬리 공작의 잔존 세력과 싸우고 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와 귀족, 가장 숙련된 용병과 정예 영지군, 수인족과 거인족까지 모조리 북쪽에 몰려 있는 것이다.
만약 지슬리 공작을 따르는 잔존 세력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욕심이 아니었다면 바르거와 함께 진작에 우리쪽으로 압박을 했을 병력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나중에 공격을 당하느니 차라리 먼저 빈집털이를 하겠다고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에게 공격을 시작한 참이다.
과연 거의 다 죽어버린 지슬리 공작 세력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답시고 우리를 끝까지 내버려 둘까?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영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설마 그럴 리가.
아르보그 공작군은 글렌 공작의 세력과 비슷한 규모였던 지슬리 공작의 세력을 순식간에 밀어버린 군세였다.
그것도 그들에게는 낯선 산맥에서 말이다.
그들이 공격의 방향을 바꿔서 우리에게 몰려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
얼마나 빨리 전선에 나타날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지형과 아르보그 공작군의 능력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
그러나 우리가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불리한 입장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명백했다.
낯선 지형에서 길게 늘어진 보급선이라니 악몽이 따로 없다.
청야 전술로 물도 식량도 구하기 힘든 땅에서 보급선이 끊기면 전투를 하기도 전에 패배한다.
전투를 벌일 필요도 없이 우리를 포위하는 것만으로 전멸시킬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꼴로 쫓겨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알면서도 한발한발 전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면적인 군사적 승리는 어렵겠지만 비기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고 어쩌면 정치적인 승리는 가능하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에 벌어진 블라바 남작령에서의 전투 역시 아이그발다 남작령에서의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주성의 크기도, 남아 있던 병력의 숫자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차이가 난 것은 영주의 존재 유무 정도였다.
아이그발다 남작은 자신의 영지에 남아서 독전을 하다가 결국 내게 죽어버렸지만 블라바 남작은 자신의 가신에게 영주성을 맡기고 후퇴해 버렸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남은 자들에게 회유를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블라바 남작군은 적진에 버려진 것 치고는 사기도 멀쩡하고 제법 싸우는 법도 알아서 아이그발다 남작령을 점령하는 것보다 배는 더 힘들 정도였다.
도대체 왜 이리 열심히 싸우는지 궁금해하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시간을 끄는 만큼 병사들의 가족에게 면세 혜택을 주겠다는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루를 버티면 1년 면세라나.
이들이 기를 쓰고 버틸만한 이유로 충분하기는 했다.
아르보그 공작군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영지를 더 방어하며 시간을 끈 이후에는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단 물러서기 시작한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기존의 영역을 포기하며 계속 후퇴를 했다.
영주가 영지를 포기하고 후퇴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제가 명령을 해도 따르기 힘들다고 뻗댈 자들이 하나둘이 아닐텐데 벌써 5개의 영지가 과감하게 청야전술을 펼치며 후퇴를 해 버렸다.
아르보그 공작이 죽었는데도 이런 일사불란함이라니.
아직 죽은 아르보그 공작을 대신할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이 추대되었다는 소문도 없었는데?
이것은 아르보그 공작을 대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너무 노골적인 유인책을 쓰다니 함정에 빠져주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싸우고 지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싸우기도 전에 열심히 도망만 치면 추격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내 의지를 다른 방면으로 진군하고 있던 아돈슨에게 전달했다.
아돈슨 역시 나 못지 않은 빠르기로 적진을 돌파하고 있었다.
군사적 재능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의 휘하에는 글렌 공작을 따르던 전문가 집단이 하나 가득이니 내가 전달하는 말을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된 승리와 빠른 진군에 고무된 때문인지 내가 우려하는 것을 다 이해한다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그들이 진군하는 바로 코앞에 아르보그 공작령의 중요 도시 중 하나가 있는 것이 화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세금으로 걷는 곡물이 집중되는 창고가 있는 도시였다.
내가 보급 문제를 계속해서 강조하던 것이 이럴 때 독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둘로 나누어진 군대의 경쟁심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거느린 병력의 대부분은 칼마르 출신과 막시밀리안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에 아돈슨의 병력의 대부분은 글렌 공작에 속했던 자들이다.
이런 병력 구성에서는 경쟁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경쟁심이라고 표현했지만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실 이것은 장래를 내다본 정치투쟁이기도 하다.
누가 연합자치령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이번 전투의 결과가 답변을 대신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정찰을 더욱 강화하면서 아예 진채를 세우기 시작했다.
과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내 불안함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피와 먼지로 엉망이 된 기사 5명이 병영으로 돌아왔다.
기사뿐 아니라 말도 상처를 입었는지 피가 흘렀다가 마른 딱지가 보였다.
심지어 말 한마리에는 아직도 화살이 꽂혀 있었다.
장거리 정찰에 나섰던 기사들이었다.
내게 와서 보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괜찮은 기사는 그들 중 2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부상이 심해서 우선 몸부터 돌봐야 했다.
돌아오지 못한 병사도 10여 명에 달했다.
“아르보그 공작령의 접경 지대에서 상당한 규모의 적군을 발견했습니다.”
여기부터 따지면 남작령 두 개 정도를 가로 질러 가야 할 정도의 거리다.
빠르게 행군한다면 4일 정도, 기마부대는 내일이라도 들이닥칠 수 있다.
“상당한 규모라고?
“외곽뿐 아니라 안쪽으로도 천막이 늘어선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확인한 숫자만 해도 1만 명이 넘습니다.”
“거인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인족으로 추측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숫자가 적다.
적어도 3만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