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아주 쉬운 공성전
공격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 공격할 때가 된 것이다.
내 명령에 따라 사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사이에 새로 도착한 오천 명의 병력에게는 전투 대기를 지시했다.
그동안의 사전 작업에도 불구하고 아이그발다 남작의 병사들이 너무 잘 싸워서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할 가능성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공격군의 피해가 너무 커지면 바로 교대해서 계속 공격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절대로 적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심산이었다.
만약 여기서 어설프게 발목이 잡히면 골치 아파질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원래 공성전이라는 것은 지루한 전투다.
기본적으로 몇 개월 정도는 걸린다고 봐야 한다.
보통 1년이고 오래 걸리면 3년을 본다는 말까지 있다.
성채를 포위한 병사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땅을 개간해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준비하는 것일 정도다.
제대로 준비한 수비 측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최소 3배의 병력은 필요하고 여유있게 10배의 병력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조차 있을 정도다.
심지어 그렇게 많은 병력으로 공격을 하고도 결국 협상으로 끝내는 경우가 상당하다.
공성전이라는 것은 공격 측에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공성전을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다.
방법도 이미 준비해 두었다.
공성탑과 기사.
그리고 압도적인 수적 우위.
내게는 연합자치령이 아르보그 공작령을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눌렀다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성에서 버티기 보다는 항복하는 것이 더 낫다는 평판이 돈다면 더욱 좋겠다.
정치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빠르게 적을 밀어내고 적진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과 우리 편이 약하게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만약 연합자치령의 군대가 첫 전투부터 약세를 보인다면 다른 생각을 할 귀족이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에 속했다가 연합자치령으로 귀순해온 귀족들은 무조건 이탈한다고 봐야 했다.
어쩌면 나조차도 다른 구멍을 뚫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 지휘부의 막사를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 중 일부는 여전히 연합자치령의 미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티를 내곤 했다.
눈치 없이 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낸다면 귀족이 아니다.
아주 별종이 아니고서야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정치적인 안배가 숨어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그런 행동은 좀 더 나은 대우를 하던가 아니면 뛰어난 실력을 보이라는 요구라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아르보그 공작에게 충성하는 귀족의 성채를 단 며칠만에 점령하는 정도의 실력 행사는 해줘야 싱숭생숭한 귀족들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아슨 경. 지휘를 부탁합니다.”
“말려봐야 듣지 않으시겠지요. 윌리엄 백작 각하. 용맹을 발휘하시되 혼자 몸이 아니라는 것은 명심해 주십시오.”
언제나처럼 엘리아슨에게 지휘를 맡기고 최전방으로 나갔다.
우리의 이동에 맞추어 아이그발다 남작군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지금까지와 달리 진짜로 공격해 올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이 확 드는 모양이다.
어떤 식으로 숨기려고 해도 4천 명이나 되는 병력의 이동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도 성벽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안 들키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과한 희망이다.
과연 지금까지와 달리 성벽 위에 배치된 남작군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예비대를 제외한다면 모든 병력이 성벽 위에 올라온 것 같았다.
그러나 확실히 전보다 기세가 죽어버리기는 했다.
성가퀴에 달라 붙어 있는 병사들도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고, 창을 든 자에게서도, 물을 끓이는 자에게서도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병력의 차이가 가져오는 두려움 때문인 모양이다.
몇 번씩 성벽 가까이 밀고 갔던 거대한 방패의 숫자도 두 배로 늘었다.
그 뒤에 붙어 있는 병력의 규모와 질도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공성탑이 등장했다는 것이 남작군에게 공포였을 것이다.
남작군이 수십 배의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성벽에서 나온다.
아무리 공격측의 숫자가 많아도 10미터가 넘는 벽을 타고 올라가려면 공격로가 사다리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벽 위에서 온갖 흉악한 수단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무방비의 병사들을 공격하니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라고 해도 어이없게 죽어나가는 것이 공성전이다.
기사조차도 갓 징병된 병사가 던진 돌덩이에 맞아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다.
그러나 성벽과 같은 높이를 가진 이동식 망루인 공성탑은 성벽이 가지는 이점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공성탑을 본 남작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시간을 끌어서 그나마 기세를 올리려는 남작군에게 미묘한 어긋남을 선사해 주었다.
사람의 신경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기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적의 공격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잔뜩 긴장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적이 안 오면 어떻게 될까?
지쳐서 늘어지게 된다.
심하게는 자포자기가 되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굴기도 한다.
나는 공포에 질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방어 준비를 하다가 다시 기세가 죽어버리는 남작군을 보며 승리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음을 확신했다.
시간을 끌면서 여유있게 구는 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공성전은 물론 이렇게 많은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 자체를 처음 경험하는 병사들도 많아서 공격군이 제자리에 위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물론, 몇 번 싸우다 보면 살아남은 자들은 정예병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가 문제다.
처음부터 아르보그 공작령의 정예병과 싸워야 했다면 이렇게 여유있게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인 공성탑은 모두 5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성탑마다 백인대를 두 개씩 붙여줬다.
하나는 공성탑의 이동과 방어를 맡고, 다른 하나는 적을 향한 공격을 맡는다.
이 정도까지만 해도 이렇게 작은 성을 상대로는 과하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격은 공성탑만으로 나는 것이 아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바퀴달린 방패 뒤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이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사다리를 들고 달려야 한다.
아마 사상자의 대부분은 이쪽에서 발생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공성탑과 달리 사다리를 타고 성위로 올라갈 때 무방비 상태가 될 테니까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이려면 공성탑에서 확실히 어그로를 끌어주어야 한다.
정오가 지나서야 공격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나고, 깃발을 흔드는 기수의 모습이 보였다.
선두는 공성탑이었다.
“밀어라!”
공성탑을 담당하고 있는 용병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공성탑에 달라붙은 40여 명의 용병들은 박자에 맞추어 공성탑을 밀기 시작했다.
공성탑을 밀고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성벽 위에서는 화살이 계속 날아왔다.
처음에는 불화살을 쏘더니 별효과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나중에는 일반 화살만 날아왔다.
그러나 공성탑을 괜히 공격의 선두에 세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성탑을 웬만한 공격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었다.
10미터가 넘을 정도로 높게 만들어져 있지만 바닥을 길고 넓게 만들어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커다란 나무바퀴도 5쌍이나 붙어 있어서 어지간히 재수가 없지 않은 이상 이동하다가 바퀴축이 부러져서 주저앉거나, 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성탑의 정면과 좌우는 나무판와 가죽을 이용해서 막아버렸고, 지붕에는 사수를 위한 장소를 마련해 놓았다.
지붕에 올라간 3명의 사수는 벌써부터 성벽 위로 연신 화살을 날리는 중이었다.
이 정도라면 대형 투석기의 바위나 불항아리에 정통으로 직격당하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부서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다.
잠시 후 투석기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최대한 빨리 많은 공격을 가하라는 지시에 따라 돌탄환과 돌멩이를 쏟아 붓듯이 퍼부었다.
성벽 위의 남작군이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공성탑 위의 사수들과 투석기의 공격은 제법 효과가 있어서 공성탑을 향한 공격이 눈에 띄게 수그러들 정도였다.
공성탑이 중간에 주저앉지 않고 성벽에 도착할 가능성 더 커졌다.
일단 공성탑이 성벽과 잇대어 다리를 놓게 되면 기사와 자원한 용병들이 가장 먼저 남작의 성채로 뛰어들 것이다.
특히, 공성탑마다 10명씩 대기시킨 기사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
화살이 닿을만한 거리는 달리면 순식간에 도달할 정도로 짧다면 짧은 거리겠지만 공성탑을 밀면서 오기에는 그리 쉬운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성탑을 성벽 위에 갖다대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사다리를 든 병사들 역시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공성탑에서 성벽 위로 기사와 숙련된 용병을 쏟아내는 동안 일반 병사들을 성벽 위로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성벽 위의 남작군은 공성탑이 가까이 다가오자 공성탑을 밀고 있는 용병들을 향해 공격을 집중했다.
성벽 아래에서 움직이는 병사들에게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서 연합자치령의 기사들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남작군의 병사들은 공성탑을 움직이는 병사들을 향해 머리통만한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았다.
2명이 도르래를 돌려야 겨우 쇠뇌살을 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쇠뇌 역시 공성탑을 노렸다.
팔뚝만 한 굵기의 화살이 공성탑을 향해 날아갔다.
공성탑을 둘러놓은 판자는 깨졌지만 헐렁하게 널어놓은 가죽은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점점 다가오는 성벽을 보며 분리한 철창을 두 손에 나누어 잡았다.
가장 선두에 서기로 되어 있는 덩치 큰 기사는 자신의 몸을 다 가릴 수 있는 커다란 방패를 잡았다.
그는 덧문 바로 앞에 서서 문만 열리면 앞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기사들 다음에는 숙련된 선임 용병들이었다.
나는 모두 150명에 달하는 병력을 성벽 위에 쏟아낼 계획이었다.
공성탑 앞에 튀어나와 있는 짧은 나무 다리가 성벽에 닿는 순간 공성탑의 앞을 막고 있는 덧문을 열어 재꼈다.
순식간에 화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가장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기사는 커다란 방패에 의지해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를 포함한 기사들 역시 늦지 않게 그를 따라 짧은 다리를 건너기 위해 움직였다.
잠시동안 미친 것처럼 화살이 날아왔지만 대부분 방패와 판금갑옷에 막혀서 아무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날아온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니 대형 쇠뇌가 다리 위의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팔뚝 굵기의 쇠뇌살을 쏘아낸 바로 그 대형 쇠뇌였다.
쇠뇌 사수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싶은 그 순간 쇠뇌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하면 안되는 공격이었다.
만약 내가 피해버리면 나 대신 두 명이 저 쇠뇌살에 맞고 10미터 아래로 추락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낮추면서 단창으로 쇠뇌살을 때렸다.
왜 대형 쇠뇌가 공성무기로 분류되는지 실감할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엄청난 충격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래도 쇠뇌살은 허공으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미친 듯이 대형 쇠뇌의 도르래를 돌리는 두 명의 쇠뇌 사수는 쇠뇌살을 쇠뇌에 걸지도 못했다.
나는 그들의 이마에 비도를 한 방씩 박아주고 양손의 단창을 들고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