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공성전
아르보그 공작 가문은 황제를 배출한 적도 있는 유서 있는 가문이다.
이름만 높은 것이 아니라 세력도 막강해서 한때는 막시밀리안 공작가를 거의 장악할 뻔 하기도 했다.
불과 1년까지만 해도 지휘부의 막사에 있는 귀족들의 일부는 몸은 막시밀리안 공작의 휘하에 두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르보그 공작의 명령에 따르던 자들이었다.
내가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에 속했던 귀족들을 예의주시하며 계속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는 것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만약 아르보그 공작이 에시스칼리 산의 동굴로 가지 않는 대신 바르거의 구원 요청에 응했다면 지금의 귀족연합자치령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우리는 공격쪽이 아니라 수비쪽이었을 것이고, 꽤나 악전고투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보그 공작은 에스칼리 산의 동굴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물론 나는 그가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가 부상을 입고 죽어가다가 빛 속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직접 봤으니까.
어쨌든 그의 행방불명으로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에 있는 자들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행방불명이라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모를리가 없으니 이후의 상황전개를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의 연속은 귀족연합자치령이 살아남는 것을 넘어 무서운 기세로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우리는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에 속한 자들을 향해 북벌을 시작했다.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 외곽은 대개 남작급의 귀족들이 영주로 있는 중소규모의 영지들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강에 접한 몇몇 도시는 자유시의 권리를 사들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영지였다.
지금 연합자치령의 군대가 진군하는 영지 역시 다르지 않다.
기사는 종자를 포함해서 10~20명 정도, 영지군은 치안대까지 합쳐도 오백 명을 넘기 힘들다.
그래도 영주성은 봐줄만해서 규모는 작지만 성채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2만에 달하는 병력을 감당할만한 규모는 아니다.
일찌감치 백기를 내걸고 항복을 선언하든가 아니면 도망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남작은 항전을 결의하고, 성문을 닫아걸었다.
나는 선발대가 남작의 성채에 도착하자마자 전령을 보냈다.
관습에 따라 항복을 권유하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자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백기를 들고 달려간 기사는 성문 앞에 도착한 후 위에서 내려 준 바구니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니 남작이 제대로 싸울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문을 아예 열지도 못하게 봉해 버린 것이다.
아마 성문 뒤로 나무를 덧대어 못질을 하고, 돌을 쌓아 올려서 벽처럼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성문을 열고 반격을 하러 나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채를 지키며 버티겠다는 의사표시다.
전령으로 보낸 기사는 그리 오래지 않아서 돌아왔다.
그는 테이나 남작의 장남으로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뛰어나다는 평판 때문에 계속 내 직속으로 굴리는 중이었다.
“아이그발다 남작은 뭐라고 하던가? 안마트 경.”
“항복은 없다고 합니다. 명예롭게 저항하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제안에 대해서는?”
“윌리엄 공의 자비로운 제안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떠날 자들은 이미 다 떠났으니 필요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과연 싸우기로 결심한 자의 전형적인 답변이었다.
심지어 후계자를 포함한 가족도 이미 빼돌린 모양이다.
“안마트 경. 경이 보기에 그쪽 분위기는 어떤가?”
“숫자는 적지만 사기는 높아 보였습니다. 병사들의 무장도 충실한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 내에 일반인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내에 일반인이 피난을 와 있지 않다는 것은 영지민에 대한 피난 역시 진작에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르보그 공작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전쟁 준비는 멀쩡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서로 자신이 공작위를 이어야 한다면서 다투는 후계자 무리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전쟁이 좀 길어질 모양이다.
“노렌 경. 투석기 조립이 끝나는대로 공격을 하라고 하게.”
“투석기 조립은 저녁이면 다 끝날 것 같습니다. 야간 공격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한 시간에 5~10발 정도면 될 것 같군. 적을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니까 급하게 쏠 필요는 없네. 그리고 밤이니까 돌탄환보다는 불항아리로 공격하는 것이 좋겠어. 투석기를 담당하는 병사들은 번갈아 가면서 재우도록 하게. 내일도 하루 종일 쏘아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담당 하사관에게 명령을 전달하고 공격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한 후 복귀하겠습니다.”
삼일 정도는 계속 공격을 하면서 괴롭힐 계획이었다.
투석기로 불항아리도 쏘고, 돌탄환도 쏘고, 가끔 사다리를 들고 성벽을 올라갈 것처럼 몰려갔다고 돌아오기도 할 생각이다.
옆에 불덩이가 떨어져도 피곤에 지쳐서 조는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내 목표다.
“엘리아슨 경. 기마 정찰대를 다음 영지까지 보내서 적정을 살피도록 하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찰을 반복하도록. 그리고 백인대 몇 개를 보내서 아이그발다 남작령의 마을들을 조사하도록 해 주게. 아무래도 영지민의 피난이 빨랐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알겠습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아직 2만에 달하는 병력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은 아니다.
5천 정도는 성채 주변에 주둔시켰고, 5천은 지금도 오는 중이다.
심지어 1만이 조금 안 되는 병력은 아직 아이그발다 남작령에 발을 딛지도 못한 상태였다.
저녁, 어스름할 무렵이 되자 투석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규칙적으로 날아가는 불붙은 항아리가 성내에 떨어지면서 화재를 일으켰다.
항아리가 떨어질 때마다 불길이 확 오르고 성벽 위의 병사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작은 불이 큰 불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병사들이 잠도 자지 못하고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물을 가져다 붓고 있는 덕분일 것이다.
이 정도면 야간의 기습으로 반격을 걸어오는 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예상대로 다음 날 아침까지 적군의 역습은 없었다.
그러나 몇백 명 되지도 않는 아이그발다 남작군의 야습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가 발생했다.
아니, 큰 문제를 발견했다.
아침 배식이 있기 전부터 내게 달려온 엘리아슨은 남작령의 여러 마을을 조사한 내용을 보고해 왔다.
그의 옆에는 직접 백인대를 이끌고 조사를 했던 비오네슨이 긴장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지민이 없다고?”
“그렇습니다. 노인들은 좀 남아있습니다만, 아이그발다 남작의 영지민 대부분은 이웃 영지로 피난을 떠났다고 합니다.”
“식량은? 도구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설마 우물도 메웠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물도 다 메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파 보니까 그냥 메운 것도 아니고 가축의 사체를 넣고 메워서 복구를 해도 당장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비오네슨은 우물을 파 보았더니 안에서 가축의 시체가 나왔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한민족의 필살기를 이런 곳에서 보다니.
미치겠네.
“청야전술이군.”
“예?”
“식량을 태워서라도 없애고 물도 구하지 못하게 해서 적을 괴롭히는 전술이다. 징발도 약탈도 하지 못하니까 보급로가 아주 중요해진다.”
아르보그 공작령에서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알겠다.
일단은 우리를 상대로 시간을 끌면서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보급로를 끊어 버릴 작정인 것 같다.
시간을 끄는 것은 영지에 남아있는 영지군과 성채를 의지해서 달성할 것이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것은 그들의 정예병이 돌아오면 시도할 것이다.
지금 아르보그 공작령의 정예병 대부분은 지슬리 공작령에 가 있다.
산을 넘으면 산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는 지슬리 공작령 특유의 끔찍한 지형 덕분에 단단히 발목이 잡혔다는 첩보를 계속 듣고 있다.
그리고 얼마 안 남은 지슬리 공작의 군대를 전멸시키지 못하고 계속 피해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첩보는 이제 첩보라기보다는 공공재에 가까운 소문이 되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이 우리가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아르보그 공작령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이유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런데 첫 상대인 아이그발다 남작이 작정하고 시간을 끌겠다고 나오는 것을 보니 지슬리 공작령에 가 있는 정예병을 후퇴시키기는 할 모양이다.
“벌써부터 걱정하실 것은 없다고 봅니다. 이제 첫번째 전투이고, 아직은 보급로라고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병력의 일부를 돌려서 보급로에 더 배치를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엘리아슨은 청야전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금방 정석적인 대처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야 하겠지. 그리고 아무래도 별동대를 운영해야겠어. 이대로 간다면 청야전술에 휘말려서 부담이 너무 커지게 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청야전술을 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네. 영지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거야. 그렇다면 기사가 포함된 기마대를 먼저 보내서 위협만 해도 제대로 된 청야전술은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영지민들의 반발에 약간 힘을 실어주면 더 좋고.”
결국 점심이 되기 전에 전원 기사와 종자로 구성된 30명짜리 기사단 두 개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그사이에도 투석기는 계속 돌탄환과 불항아리를 쏘아대며 남작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성벽 위의 남작군은 전보다 확실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느새 투석기의 공격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천인대 2개를 준비시키게. 적을 쉬게 놔둘 수는 없지.”
바퀴가 달린 커다란 방패를 앞세운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성벽 위의 남작군도 지금까지의 여유를 버리고 성가퀴에 달라붙었다.
활과 쇠뇌가 보이고, 긴 창을 든 병사와 뜨거운 물을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는 병사도 보였다.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은 바퀴달린 커다란 방패를 밀면서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간간히 화살이 날아오기는 했지만 사정거리 밖에서 날아온 화살은 힘을 잃고 중간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긴장한 남작군의 병사들이 실수로 발사한 모양이다.
결국 바퀴달린 거대한 방패는 적의 화살이 도달하기 바로 직전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돌격을 할 것처럼 사다리를 앞으로 끌어냈다.
양쪽 병사들이 긴장이 손에 잡힐 것처럼 팽팽해졌다.
그러나 나는 공격 명령을 내릴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내 공격 명령은 오로지 투석기에게만 향했다.
“투석기의 탄환을 돌맹이로 바꾸고 발사 속도를 높이라고 하게. 목표는 성벽 위야.”
주먹만한 돌맹이 수십 개를 한꺼번에 투석기에 올려서 쏘아버리면 산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죽이기는 어렵지만 부상은 입힐 수 있고, 타격 범위가 넒어져서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에게는 좀 더 위협적일 수도 있다.
과연 성벽 위에 촘촘하게 서서 방어 준비를 하던 남작군은 쏟아지는 돌덩이에 맞아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재수없는 자는 얼굴에 맞아서 뼈나 이가 부러졌고, 심지어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조차 나왔다.
오후 내내 당장이라도 성벽으로 돌격할 것처럼 하다가 뒤로 병사를 물리고, 다시 전진시키기를 반복하다가 저녁이 되어서 후퇴 시켰다.
밤에는 다시 불항아리를 쏘면서, 천인대 하나에게 횃불을 들리고 다시 공격할 것처럼 성벽으로 향하다가 뒤로 병력을 물렸다.
그렇게 이틀을 하니까 남작군의 병사들이 피곤에 지쳐서 반쯤 맛이 가버린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