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8화 (38/248)

38. 공적이 더 필요하다.

모건은 저택의 가장 큰 방, 서재에서 가족과 함께 있었다.

서재의 입구와 내부는 경비대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아렉슨 경은 말없이 그의 옛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 언쟁이 오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여러분. 예상보다 사용인들의 충성심이 뛰어나서 말이죠. 모건 경이 좋은 고용주였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제가 알아야 할 것은 대충 듣고 온 것 같습니다."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말하며 모건의 가족들을 살펴보았다.

부인과 아들 하나, 딸 하나.

모두 당황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건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격일텐데?

역시 권력자로 오래 묵은 자 다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모건 경. 백작님의 감찰관으로 임명된 윌리엄이라고 합니다. 백작님의 영지를 청소하는 중입니다. 진작에 영지를 청소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1년이나 넘게 미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걱정을 좀 했는데 생각보다는 깨끗한 편이라서 일을 많이 덜었습니다."

"내가 무능했다는 비난은 달게 받겠네. 그러나 반역 혐의라니. 나는 평생을 백작님의 가신으로 살아온 사람이야."

눈을 감고 들으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충직한 사람의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미니맵으로 여러번 검토한 사람이었다.

정황증거 역시 그랬다.

이 사람은 반역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게 대충 처리하기에는 이 사람이 상당한 권력자다.

일반 권력자도 아니고 경비대라는 무력을 쥔 기관의 전직 장이다.

경비대가 불만을 갖는 것은 곤란했다.

정치적 숙청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아하. 충성스러운 가신 흉내를 내시겠다? 그렇게 하기에는 당신의 실체가 많이 까발라져서 힘들텐데. 게다가 모건, 당신 같은 사람들은 가끔 아랫 사람들을 말하는 가구 취급을 할 때가 있더군. 특히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해진 하녀 같은 사람 말이지. 그런데 글도 모르고, 반항도 안 하고, 시키는 것은 잘 하는 하녀라고 해도 눈하고 귀는 있단 말이지. 과연  얼마나 많을 것을 보고 들었을까?"

그러나 모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들쑤셔도 대번에 티를 내면서 제풀에 무너졌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과연 한 때 백작령의 치안권을 쥐고 흔들던 사람다웠다.

"한 달에 한 번 방문한다는 신사분은 글렌 공작쪽 사람일테고."

"헛소리!"

"맏딸이 글렌 공작쪽 귀족과 결혼한지 이제 3년 조금 넘었나?"

"그런 터무니없는 이유로 나를 모함하지 말게. 그런 식이면 칼마르 유력자의 절반은 걸려 들어!"

"그래서 안심하고 계셨나?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전투망치를 꺼내서 손에 쥔 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전투망치에 쏠린다.

이럴 줄 알고 전투망치에 붉은 색 염료를 조금 발라놓았다.

손질을 했음에도 채 지우지 못한 피가 있다니!

내가 좀 막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휴고 경. 이 책상. 안에 내용물을 다 꺼내서 따로 놓아주십시오."

"예. 감찰관님."

경비대의 기사 중 안면이 있는 기사가 있었다.

항구에서 날뛸 때 통성명을 했던 휴고다.

그는 내 지시에 따라 책상을 싹 비워버렸다.

쾅! 퍽! 쾅!

그리고 나는 전투망치로 책상을 두들겨 부쉈다.

"책상에 비밀 서랍을 만들어봐야 책상 자체를 박살을 내 버리면 비밀 서랍도 튕겨져 나오기 마련이지. 이렇게."

책상 다리와 책상판에 숨겨져 있던 공간에서 상자가 2개 튀어나왔다.

상자 안에는 문서와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모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무례하군.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서신일 뿐이야. 보석은 내 개인 재산이고. 그게 무슨 증거가 된단 말인가!"

"내가 이것을 증거라고 했던가? 어떤 미친 놈이 생명이 걸린 문서를 책상에 숨기나? 누가 들고 나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심지어 이렇게 다짜고짜 망치질부터 하는 놈도 있는데?"

"아렉슨! 아직도 현실을 부정할 건가? 저 쌩양아치같은 놈이 백작님의 호의를 뒷배로 충신을 겁박하는 것이 안 보이나? 다 같이 가서 말씀드려야 하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해."

모건은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외쳤지만 내 망치가 서재의 벽을 톡톡 치면서 움직이자, 눈빛이 변했다.

창문에서 봤을 때 그림자가 이 쪽으로 생기니까, 하녀의 말대로라면 아마 이쪽 어디쯤?

오! 모건의 반응도 다르군.

나는 벽에 귀를 대고 살살 두드리기 시작했다.

빙고!

찾았다!

소리가 달라지는 곳을 발견했다.

나는 전투망치로 그곳을 가격했다.

벽돌로 된 벽이 부서지면서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작은 금고가 있었다.

모건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겠군. 모건? 뭔가 할 말이라도?"

"나는 칼마르를 위해 일해왔다. 내 진심은 변한 적이 없어!"

"확신을 가진 바보가 가장 위험한 법이지. 이용해 먹기 좋거든. 아렉슨 경. 백작님께서 마지막으로 직접 심문하시겠다고 하니까 이 자를 부탁드리겠습니다. 2조장! 금고는 내가 직접 가지고 갈거니까 뒷처리를 하도록."

감찰관으로 내가 할 일이 끝났다.

며칠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날뛰어 보았다.

마지막에는 전직 경비대장이라는 거물을 반역죄로 잡아넣는 대형 사건까지 터트렸으니 이제 칼마르 시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제 영주성으로 출퇴근하면서 백작 주위에 계속 얼굴을 내밀면 된다. 그러면서 소문을 좀 내고,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정식으로 약혼 발표까지.

결사 반대하며 드러누울 가까운 친족이 없으니 이런 억지같은 방식이라도 비밀을 아는 가신들의 도움을 좀 받으면서 밀어붙이면 되기는 될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공적이 부족하지 않을까?

감찰관으로 일한 것이 내 명성을 위해서는 확실히 좋았다.

심지어 유력자 중 일부는 나를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정확히는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여백작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지만.

가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조용히 통치 수업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유력한 가신 하나를 반역죄로 숙청해 버렸다.

자신에게 권력이 있고, 휘두를 줄 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겠나.

그래서 덩달아 나까지 악명을 얻었다.

하지만 악명이든 명성이든 그것이 곧 공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사람들이 엄지 손을 척하고 들어올릴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뭔가 근사한 것이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근사한 것 하나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

"외곽 마을 2군데가 약탈을 당했고, 사상자가 30명이 넘습니다. 조직적으로 불을 질러서 방아간과 창고를 포함하여 마을의 절반 정도가 불에 탔다고 합니다."

"패트슨 남작이 미쳤나?"

조사를 나갔던 기사의 보고에 마스터 요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린드스톰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패트슨 남작의 성격상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상단을 터는 것과 상대 영지의 마을을 태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상대 영지의 마을을 공격하는 것은 영지전을 하자는 선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음흉한 너구리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이렇게 막 나가는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시의회 의장인 예센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일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패트슨 남작은 백작님께서 그의 청혼을 거절한 이후 계속 우리 영지에 시비를 걸고 있었습니다. 망루를 세웠다가 우리에게 토벌당한 카알도 원래는 그의 기사였고, 파웰 상단은 아예 대놓고 공격 했지요. 조만간 뭐가 터져도 터질 것이라고 모두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린드스톰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패트슨 남작은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에 속합니다. 지금 글렌 공작과 손을 잡았던 자들을 숙청하고 있는 중인데 막시밀리안 공작이 관망도 하지 않고 이렇게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막시밀리안 공작과 관계없이 패트슨 남작 개인의 행동이라면 말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목표 역시 다들 알고 있지요. 결국 패트슨 남작은 우리와의 전투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요?"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중재도 요청하지 않고 말입니까?"

예센의 주장에 린드스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예센은 상황이 변했음을 지적했다.

"글렌 공작이 칼마르 시에 지나칠 정도로 관여한 증거가 드러난 이상 칼마르 시가 글렌 공작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이제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막시밀리안 공작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유리한 중재안을 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겁니다. 칼마르 시가 그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러나 패트슨 남작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요. 어쩌면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저질러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둘의 논쟁의 듣다가 끼어들었다.

"두 분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결국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패트슨 남작은 우리와 본격적으로 붙어볼 생각이라는 뜻이군요. 그리고 그가 속한 파벌에서의 지원은 없을 가능성이 높겠구요."

"그렇습니다. 백작님."

리네아 여백작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원래는 칼마르의 병사들이 패트슨 남작의 영지를 습격해서 우리의 의지를 보이고 패트슨 남작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려고 했는데, 필요가 없어졌네요?"

"그렇습니다. 한 대 맞고, 한 대 때린 후라면 협상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연달아 두 대를 맞은 후라면 협상을 할 수 없습니다. 협상은 물건너 갔습니다."

마스터 요한 역시 여백작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 쪽 구석에 백작과 가신들이 나누는 말을 듣던 나는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울 만한 근사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나는 백작과 그녀의 가신들이 용병의 모집에 대해 다시 채근하고, 보급을 위해 재정적 지출을 의결하는 동안 계획을 점검해 봤다.

가능할까?

무리를 한다면 할 수는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논의에 끼어들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용병의 모집과 훈련이 모두 끝난 후가 되겠습니다만, 그 전에 패트슨 남작을 잡아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리엄 경. 이미 언급했지만 의미가 없습니다. 외곽의 마을 몇 개를 파괴해 봐야 대세에는 전혀 영향이 없습니다. 오히려 영지군과 영지의 재원을 낭비하게 될 겁니다."

시장이자 재정관인 멜러는 착오가 난 창고를 메우는 일에 심력과 재산을 쏟고 있어서 그런지 돈문제에 예민하게 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내 제안을 잘못 이해 하고 있었다.

"제 말은 패트슨 남작령을 공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패트슨 남작을 목표로 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리에 일어나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효율성으로 가득 차 있던 지구의 회의실과 달리 이 세계의 회의실은 예술과 귀족 특유의 사치가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한 쪽에 청동으로 만든 사람 크기의 장식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나는 청동 장식으로 가서 한 손으로 잡고 들었다.

그리고 몇 걸음을 걸었다.

"보시는 것처럼 저는 힘이 아주 센 편입니다. 기사로의 실력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만약 탈출할 때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그리고 행운이 따라준다면 패트슨 남작을 잘 묶어서 들쳐업고 달려서 이 곳 칼마르 까지 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 사람들은 뭔가 아주 이상한 것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패트슨 남작을 납치하자는 말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리네아 여백작의 반응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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