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9화 (39/248)
  • 39. 참수 작전은 어떠신가요?

    리네아 여백작은 뭔가 상식이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그랬다.

    처음에는 아직 젊지만 실력은 좋은 용병 기사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 마스터 요한과 맞먹는 실력자임이 드러났다.

    늙은 가신들을 다루는 것은 자신도 버거운 일인데 며칠 만에 하나는 아예 목을 날렸고 다른 사람들도 쥐고 흔든다.

    이런 자의 어디에서 시골 장원 출신에 갓 도시로 나온 기사 지망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여러 개인 교사를 두고 학습을 했고,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에도 경험을 쌓아왔다. 그런데 이 젊은 기사의 능력이 자신에 못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버로스 가의 가정 교육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게다가 지금은 패트슨 남작을 납치하자고 말한다.

    그게 가능한지를 떠나서 저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만 했다.

    뭔가 자신과는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마치 다른 나라에서 살다와서 낯선 말과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랄까?

    그리고 그는 감찰을 마치고 보고를 하는 도중에 식량과 무기의 비축을 역설했다.

    용병의 추가 모집 뿐 아니라 영지민을 상대로 한 전면적인 모병 계획을 세워야 하고, 칼마르 시 외곽의 농촌이 약탈에 휩쓸릴 가능성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가 바라보고 있는 미래는 무엇일까?

    어떤 지옥을 예상하길래 이렇게까지 과격한 주장을 하는 걸까?

    선제후들간의 신경전이 정말 전면적인 내전으로 폭발할까?

    리네아 여백작의 머리에는 여러 의문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집중해야 할 문제는 하나였다.

    "윌리엄 경.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네. 탈출로만 잘 짠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는 안 됩니다. 같이 움직일 기사가 몇 명, 길잡이도 2명 이상, 영지의 경계선에서 추격대를 견제할 병사 역시 필요합니다."

    "마스터 요한?"

    "준비는 하루이틀이면 됩니다. 그러나 백작님. 이런 식으로 상대 영주를 잡아오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상대방도 할 수 있습니다."

    *

    조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나 현대 한국에 살았던 사람이나 지식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지혜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던데, 그 말이 이곳에서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참수작전.

    상대방의 대가리를 따버리는 전쟁의 한 방식이다.

    예방전쟁으로 써 먹기도 좋고, 협박용으로 써 먹기도 좋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일수록 효과적이다.

    이 곳은 행정이 낙후되었고 지배자는 소수니까 참수작전의 효과는 확실하다.

    만약 패트슨 남작을 잡아온다면 영지전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칼마르 백작가의 여력을 좀 더 보존할 수 있다.

    그리고 쓸만한 용병을 좀 더 모을 시간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참수작전에는 문제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내부에 협조자가 없으면 성공할 확률이 확 낮아진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너도나도 참수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우리쪽 통치자의 안전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지금 마스터 요한의 지적은 두 번째, 바로 백작의 안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백작님의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피했으면 합니다. 계약한 용병대장의 실력은 믿을 만합니다. 전투는 용병들에게 맡겨주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패트슨 남작이 어디에 있을 줄 알고 납치해온다는 겁니까? 무리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윌리엄 경은 우리에게 귀중한 전력입니다."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 공은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말하는 가신들의 주장을 듣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보니까 예쁘기는 한데 가까이 하기에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백작이니까.

    나이로 보면 갓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이지만 눈빛으로 대답을 강요하는 모습이 타고난 지배계급다웠다.

    "흠흠. 일리있으신 말씀들입니다만."

    서두가 '~다만'이다.

    너희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신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왜 위험스럽게 백작을 전쟁의 일선에 내세우냐는 비난의 눈빛이 날아와서 콕콕 찍어댔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가 며칠 간 칼마르 시를 중심으로 감찰을 했습니다."

    역시 감찰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시선이 휙 돌아간다.

    다음 타겟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문제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백작님께 대한 충성심은 확고했고, 시는 부유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더군요. 전쟁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습니다."

    다들 이게 무슨 소리? 라는 물음표가 투두둑 머리 위에 뜨는 느낌이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두 세대가 넘게 총력전 태세를 유지해 온 국가 출신 입장에서 평가하자면,

    그리고 조만간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칼마르 시의 전쟁 준비는 매우 미흡했다.

    "식량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멜러 경이 관리를 잘 해서 당분간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흉년에 대비해서 비축량을 평소보다 많이 늘려야 할 필요는 있어 보였습니다. 문제는 무기입니다. 칼, 창, 둔기류 일체, 활과 쇠뇌, 방패, 갑옷, 투구 다 부족합니다. 창고에 보관하는 양은 영지군이나 쓸 정도 뿐입니다. 만약 모병을 해야 한다면 줄 수 있는 무기가 없습니다. 게다가 화살은 비축량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영지군에서 쓸 수 있는 양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동시에 사용할 말과 마차는 징발한다고 해도 무기는 징발이 어렵습니다. 미리 제작해서 비축해야 합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무기를 제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무기 장인의 수도 부족하고 다른 장인들에게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무기부터 만들라고 하기에는 다들 계약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곤란합니다. 그래서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쪽보다는 적은 숫자로 먼저 적의 머리를 치는 것을 우선했으면 합니다."

    군사쪽 일에 잘 알지 못하는 가신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무기는 각자 알아서들 가지고 오는 것 아니었나? 다들 그렇게 하던데."

    "모병? 용병대장과 계약했으니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징발은 무슨 소리인가? 말과 마차라니?"

    그러자 리네아 백작이 끼어들었다.

    "잠깐. 윌리엄 경. 이 일은 마스터 요한과 먼저 의논해야 할 일이야. 합의되지 않은 발언은 삼가했으면 하네."

    "죄송합니다. 백작님. 설명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마스터 요한과 구체적인 내용을 의논한 후 마스터 요한을 통해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게. 마스터 요한. 다시 한 번 검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뜨악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마스터 요한이 내게 한 번 인상을 쓰더니 백작에게 알겠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저 양반에게 우호감정 마이너스 1스택이 쌓였다.

    저걸 풀어주려면 대련이라도 해야 하나.

    "말이 중간에 좀 샜군. 경들에게도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군무에 대한 일은 마스터 요한이 책임자니까 그를 설득하는 것이 곧 나를 설득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리고 윌리엄 경."

    "예. 백작님."

    "명령이 내려지면 패트슨 남작이 어디에 있던지 잡아내는 일은 문제 없지요?"

    "물론입니다. 탈출해오는 것은 변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성에 있다면 찾아내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제게는 미니맵이 있거든요.

    그러나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패트슨 남작령에 칼마르 백작이 박아넣은 협조자가 있다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감탄하면서도 두려워하겠지.

    막상 리네아 백작은 내 능력을 믿어주는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문제는 내 안전 뿐이군요.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난 내 경호기사들을 믿습니다. 내 기사들이 나를 지키는 한 나는 완벽하게 안전합니다. 그래도 경들이 그렇게 걱정을 하니 마스터 요한에 버금가는 실력자를 영주성에 머무르도록 하겠습니다."

    칼마르에 마스터 요한에 버금가는 실력자가 또 있었나?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지?

    "윌리엄 경. 경은 지금 숙소가 어떻게 되나? 아직 집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백작님. 마틴의 여관에 묵고 있습니다. 혼자 몸이라서 여관도 묵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영주성의 방 하나를 내줄테니 경의 숙소를 영주성으로 옮기도록 하라. 관리는 하녀들이 해 줄 테니까 따로 신경쓸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게 나였습니까?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

    배석했던 가신들 중 몇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시의회의 감사로 있는 미켈슨이 놀란 가신들을 대표해서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본래 영주성에는 함부로 사람을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백작님께서 아직 미혼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경은 내 안전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내 체면이 더 중요한가?"

    "물론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가 백작님의 안전에 대해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다만 어떤 경우에는 체면도 안전 못지 않게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백작님의 처한 상황을 보면 구설수는 피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미켈슨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문위원인 린드스톰은 리네아 백작의 손을 들어주었다.

    "구설수가 걸리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떳떳한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윌리엄 경은 평범한 기사 몇 명은 우습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있는 기사입니다. 그런 그가 영주성에 머무른다면 백작님의 안전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미켈슨은 마스터 요한과 시녀장인 사라가 입을 다물고 있고 자문위원회의 의장인 린드스톰이 찬성하고 나오자 속에서 나오려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젠장. 윌리엄 경이 그렇게 실력이 있다니까 백작님의 안전이 더 걱정 되는구만.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서 미인 옆에 있는 젊은 기사 놈을 믿나?

    나는 못 믿겠다!

    속으로 한바탕 퍼부은 그는 한숨을 쉬며 윌리엄 대신 시녀장 사라를 믿기로 했다.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여관방에 있는 내 물건을 정리하니 이삿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얼마 없었다.

    그냥 몇 개의 상자가 다였다.

    영지성에서 나온 시종에게 상자를 부탁하고, 마스터 요한이 기다리고 있는 병영으로 향했다.

    마스터 요한은 나를 위해 몇 명의 기사를 대기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곧장 패트슨의 영지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탈출을 위해 영지의 경계에서 대기할 영지병들은 뒤이어 올 것이고, 패트슨의 영지에서 길을 안내할 길잡이들은 영지 외곽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길잡이들을 앞세우고 3명의 기사와 함께 패트슨 남작령을 가로지른 후 패트슨 남작의 저택을 덮칠 예정이었다.

    적은 숫자로 위험한 일을 하기에 여유를 두고 상대를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지나치게 많이 죽이는 일은 없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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