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감찰관은 겨룬다.
슬쩍 눈치를 보니까 이 단단한 기사 말고도 내게 볼 일이 있는 기사가 여럿이었다.
모두 여백작을 경애하는 착하고 순진한 기사들이다.
그리고 모두 나를 때려주고 싶어하는 심통난 남자들이고.
명분은 그럴듯했다.
실력이 의심스러운 감찰관이 기사들의 실력을 판단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니 뭐라고 할 수 없지.
이것을 권위로 누르면 나만 병신이 되는 거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자들을 다 때려눕히는 것도 별로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줘야 한다.
실력으로 설득해서 내 말에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몸으로 하는 설득이라면 이제는 내가 일가견이 있지.
"경은 누군가?"
내 하대에 단단한 기사는 언뜻 화난 기색을 얼굴에 내비쳤다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불퉁하게 말했다.
"알레이 버크. 기사단의 기수를 맡고 있소."
기사단의 기수라면 실력이나 품성면에서 남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겠다. 주변의 평판도 좋을테고.
그래서 1번타자로 나선 모양이었다.
"버크 경. 과연 경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실력을 보지. 들어와 보게."
나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
뭐 이런 무례한 자가!
버크는 자신의 분노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감찰관이고 백작님이 직접 발탁해서 임명한 자라고 해서 일단은 두고 보자라는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더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자였다.
손을 앞으로 펴고 손가락을 위로 까딱거리는 저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빡치는 감정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버크는 숨을 고르며 자신이 애용하는 장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무기를 드시오."
"구태여 무기가 필요할까?"
"나를 뭘로 보는 거요? 나는 무기를 들지 않은 결투 상대를 공격할 정도로 명예를 모르는 자가 아니오."
"이게 결투였나? 이것은 그냥 지도대련같은 걸세. 버크 경. 신경쓰지 말고 공격해 보게."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사양하지 않겠소."
버크는 자신이 든 장검을 크게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정직한 공격이었다.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빗 맞아도 큰 부상을 입을 것이고,
제대로 맞으면 반드시 죽을 그런 공격이었다.
장검의 궤적에 윌리엄이 닿았다.
순간 윌리엄이 둘 사이의 간격을 빼앗았다.
약간 앞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력한 공격거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장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장검의 손잡이에 세개의 손이 얽혔다.
움직이지 않아!
당혹감이 버크를 덥쳤다.
버크는 윌리엄에게 잡힌 장검을 움직일 수 없었다.
허공에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윌리엄의 오른손이 버크의 멱살을 잡았다.
정확히는 목을 보호하는 흉갑의 웃부분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메쳐 버렸다.
버크는 윌리엄에게 잡혔다고 느낀 바로 다음 순간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잠깐 기절을 했었는지 동료들이 달라붙어서 흉갑을 벗기고 있었다.
"잠깐, 나 멀쩡해. 저리 비켜."
버크는 당혹감을 숨기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격통을 느꼈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였다.
"뼈는 멀쩡하겠지만 타박상으로 근육이 꽤나 상했을 걸. 그래도 며칠 잘 먹고 푹 쉬면 괜찮을 테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네."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으쓱거리는 티도 안 나고, 비웃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지도 대련 한 판 해주고 몸조리 잘하라고 토닥이는 딱 그정도의 느낌이었다.
버크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 젊은 기사가 그냥 친분으로 백작에게 발탁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자는 생각보다 더 무시무시한 자일지도 몰랐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동료기사들은 갖다대나마나였다.
동료 기사들 중 자신을 이렇게 어린애 다루듯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없지 않은가 말이다.
"버크 경이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어."
"도대체 어떻게 장검을 내려치는 와중에 끼어들어가서 잡은 거야? 자네는 봤나? 버크 경이 그렇게 간단히 접근하게 둘 사람이 아닌데."
"빨라. 너무 빨라."
영지의 기사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주 단순한 기술이었다.
상대방의 검을 막거나 잡은 후 다가가서 적을 잡고 메친다.
기사라면 누구나 구사할 수 있다.
삶과 죽음 사이의 가느다란 실 위에서 곡예를 벌여야 하는 실전에서 과감하게 쓸 수 있느냐는 별개로 기술 자체는 다 알고 있고 할 줄 아는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맞붙어서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나는 그 순간,
윌리엄의 움직임을 놓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장검의 손잡이가 윌리엄에게 장악당했고, 순식간에 버크의 몸통이 한바퀴 돌아서 땅에 내동댕이 쳐졌다.
손이 눈보다 빠르다는 속설에 걸맞게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결투가 진행되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가까이에서 상대하면 손도 못 써보고 패배한다.
윌리엄은 기사들이 소문을 듣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 3명을 한 순간에 쓰러뜨렸다는 소문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나기에는 기사들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실력이 부족해도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했다.
얼마나 잘 지느냐도 중요한 포인트다.
지금처럼 너무 일방적이라서 우스울 정도로 지는 것만은 절대로 안 되었다.
그래서 그들 중 가장 기대를 받는 자가 나섰다.
"켈리 존슨이오."
상대가 접근전에 강한 자라면 멀리서 공격하면 그만이었다.
존슨은 짧은 도끼창을 들고 나섰다.
짧다고는 하지만 창은 창이라서 길이가 거의 성인 남자 정도는 되었다.
"내 특기가 창이라서, 이해를 부탁드리오."
*
양해를 구하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답변을 하기도 전에 창이 먼저 나온다.
창 끝에 달린 날카로운 창촉이 약점을 노리고 연달아 찔러왔다.
마치 동시에 두세군데를 찌르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창촉의 움직임을 피하며 뒤로 움직였다.
아까처럼 함부로 앞으로 접근했다가는 당기는 창에 달린 부리에 베일 수도 있고, 도끼나 창대에 맞을 수 도 있다.
접근이 까다로운 무기였다.
그러나 도끼창도 창은 창이다.
멀리 있는 적을 찌르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나를 향해 찔러온 창촉을 옆으로 쳐 내는 순간, 기사들의 견제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창촉을 바깥 방향으로 쳐서 창촉의 방향이 잠깐 내게서 틀어진 순간 나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움직이며 상대를 잡아갔다.
켈리는 창이 특기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는지 내 움직임에 따라 뒤로 물러서며 창을 돌려 창대로 나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더 빨랐다.
나는 창대를 잡고 있는 두 손 사이를 가격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상대에게 바짝 붙으면서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때렸다.
창이 두 조각으로 부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켈리는 내 품에 안긴 채 정신을 잃고 그대로 늘어졌다.
나는 두 조각으로 부러진 창 옆에 켈리를 눕혀 주었다.
켈리의 창이 부러지고 켈리 본인은 관자놀이를 맞고 기절해서 바닥에 누운 순간 모두가 동의했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만으로는 품위있게 지기도 힘들겠다.
한꺼번에 다 같이 달려든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불안해진 어린이가 부모를 찾듯 기사들의 시선이 불현듯 마스터 요한에게 모였다.
"흠. 빠르군. 힘도 세고. 그런데 힘이 세다고 기본을 너무 무시하는데? 그렇게 팔 힘을 위주로 해서 우격다짐식으로 메다 꽂는 것은 별로 효율적이지가 않아. 그래도 도끼창에 대응하는 것은 멋있었네."
"글쎄요. 마스터 요한. 저는 힘이 세다는 것 자체가 기술이고 실력이라고 봅니다."
"자네가 얼마나 힘이 센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네. 그리고 그 한계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치를 밑돌지. 인간이 아무리 힘이 세도 오우거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거인족은? 심지어 북부의 황야에서 사는 오크족조차 인간보다 힘이 세. 그래서 인간은 한계 내에서의 최대 효율을 추구해야 하네. 그리고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인간이 이 대륙에서 번성하고 있는 것이지."
"일리있는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합니다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죠."
그리고 그 차이는 효율적인 움직임만으로는 따라잡기에 충분하지 않아요.
당장 마스터 요한 당신부터가 소문대로라면 오크 정도는 식후 운동거리도 안 될테고, 오우거조차 어떨까 싶을 정도 아닙니까?
다 같은 인간 카테고리에 묶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에는 규격 외의 인간들이 너무 흔하더군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라. 맞는 말이지. 그러나 움직임의 효율을 극대화하여 더 강한 자를 꺾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라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무술 철학을 듣기 보다 그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자들은 모두 기사급의 실력자들 뿐이었다.
적어도 칼마르 시와 그 일대에서 가장 강한 자, 지역 챔피언쯤 되는 자는 없었다.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역시 무기는 들지 않을 셈인가?"
"글쎄요. 손속의 여유를 둘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마스터 요한을 상대로 무기를 들면 누군가가 크게 다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
마스터 요한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풀어서 옆에 있던 기사에게 건냈다.
그리고 빈 몸으로 편하게 내 앞으로 왔다.
이렇게 싸우게 될 것이라고 예측이라고 한 것처럼 그와 나, 둘 다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았다.
"그러니까 몸으로 한 번 해 보도록 하지."
주먹이 날아왔다.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대고 두 주먹을 휘두른다.
시속 100Km.
따지고 보면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부터가 주먹 속도의 2~3배는 되니까.
그러나 주먹은 바로 코 앞에서 날아온다.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주먹을 피했다.
바로 코 앞에서 연이어 날아오는 주먹이지만 나는 두려움도 곤란함도 없었다.
보는 것도 , 피하는 것도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스터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 요한 역시 내가 던지는 주먹을 여유있게 피해냈다.
우리는 동시에 멈췄다.
"역시 자네는 다 보는군."
"마스터 요한도 다 보시는 것 같군요."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움직인다.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다.
당장 십수년간 수련을 거듭해온 영지의 기사들이 내 움직임을 놓치고 허무하게 공격을 허용한 것을 보면 이것은 그리 간단하게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특별한 수련을 하지 않았음에도 상태창을 얻은 후 이것이 가능해졌다.
[체력 : MAX] 의 영향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보는 것이 의미가 없게 해주지."
마스터 요한의 기세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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