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3화 (33/248)

33. 감찰관은 병영으로 간다.

마스터 요한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그 놈이 내일 병영에 방문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갔다니까. 느물거리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놈인데 백작님은 구태여 그 놈을 쓰겠다고 하시니 원."

"우리 아기씨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괜찮으시니까 믿어보세요. 사형."

사라는 뜨거운 찻잔을 들고 가볍게 향을 즐기며 마스터 요한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그러나 마스터 요한은 오히려 눈빛을 번득이며 이마를 찌푸렸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야. 다들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 압박하는데도 자기 할 말 다하고 우리를 눈 아래로 내려보더라니까. 저런 놈이 이제 갓 도시로 나온 시골 출신 애송이라고 한다면 누가 믿겠나? 우리 애들이 저 놈 수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가. 전장에서 굴러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을 이끌어 본 적도 없는데 저 정도라면 저건 타고나는 거야. 나중에 어떤 걸물이 될지 궁금하기는 해. 그런데 저 놈 저거 설마 우리 백작님께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기씨 눈 높소."

"그러니까 더 문제지. 저런 놈 흔하지 않다니까."

"사형은 적당히 좀 하세요. 우리 아기씨가 애요?"

사라는 평소와 달리 호들갑을 떠는 사형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만큼 윌리엄의 등장이 마스터 요한에게도 충격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마스터 요한 역시 리네아 여백작의 계획을 알고 있는 몇 명의 사람 중 하나이기에 더욱 걱정이 되는 면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사라 누이. 자네 말대로라면 윌리엄이라는 놈은 실력도 가늠이 안 될 정도라는데 걱정하는 것도 안되나? 그냥 싸움 잘하고 머리 나쁜 녀석이면 적당히 쓰고 재물이라도 두둑하게 안겨주면 끝나. 돈이 싫다면 작위라도 하나 던져주면 돼. 하지만 저 놈은 머리 돌아가는 것도 보통이 아니잖은가. 몇 시간만에 도망친 용병들을 잡아오는 것 좀 봐. 경비대가 완전히 뒤집어 졌더라니까."

"걱정이 되면 내일 병영에 올 때 상대를 잘 하시면 되지요. 사형이 평소에 잘 하시는 것 있지 않습니까?"

"젊은애들 박살 내고 술 먹이면서 다독거리는 것도 다 통하는 놈한테나 하는 것이지. 저 정도 사이즈면 코웃음 치고 말거야. 게다가 자네가 실력으로 가늠이 안된다고 하니 나도 어디까지 손을 써야 하나 애매한 것이지.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영지에서 실력으로 따지자면 나 다음이 자네 아닌가."

사라는 차를 한모금 입에 머금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하지만 이름값은 남았던터라 무난하게 칼마르 백작가에 자리잡은 부친이 각종 무술을 집대성하면서 키운 제자가 둘이다.

자신과 사형인 요한.

자신은 여자인데다가 자질이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사형은 타고난 무골이었다.

스승보다 더 뛰어난 제자의 살아 있는 표본이 바로 사형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사형은 아예 무술의 유파를 개방하고 쓸만한 인재들을 키워왔다.

심지어 리네아 여백작은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부터 사형에게 무술을 배웠다.

리네아 여백작이 창졸지간에 백작위를 이어받을 상황이 되었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덕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 같은 유파의 형제들이니까.

사라는 차를 삼켰다.

"사형. 조심하세요. 윌리엄이라는 젊은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지난 번에도 자네가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입을 다물어서 제자들에게 물으니까 오히려 일방적으로 두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거야 그 년들이 보는 눈이 없으니 그렇게 보이는 거지요."

요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라 누이. 뭐 이상한 것이라도 있었나?"

"기사 한둘 정도 잡을 실력이라면 막겠지 싶어서 사복검으로 질렀는데 가죽 완갑을 긁히는 정도로 막아냈어요. 그것도 여유있게."

"힘이 그렇게 세다고 하더니 기술도 훌륭하네. 사복검이 다루기도 어렵지만 막기는 더 어렵지."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기술이 훌륭한 정도가 아니에요. 아기씨가 앞에 있고 하니까 봐준 것이 틀림없어요. 곧장 화를 내면서 살기를 풍기는데 마치 아버지께서 앞에 계신 것 같은 압력을 느낄 정도였지요."

"뭐? 스승님을 연상시킬 정도였다고?"

마스터 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싸울 의향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곧장 사복검의 당김줄을 풀었다니까요. 만약 밖에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아기씨를 탈출시키고 제가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다행히 아기씨가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채고 곧장 의뢰를 하셨기에 망정이지 처음 계획대로 찍어 누르려고 했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정말 수상하군. 윌리엄의 선친이었던 버로스 경은 조사에 의하면 그냥 실력이 좀 뛰어난 기사였던 모양인데 막상 본인은 사라, 자네를 뛰어넘을 정도의 실력이라······ 무슨 신비라도 접한 자가 아닐까? 마치 나처럼?"

"신비라는 것이 대개 재미는 있지만 막상 쓸모는 애매한 것인데, 사형같은 경우도 있으니 모르는 일이기는 하네요."

사라의 말에 마스터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고민하고 있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모든 일은 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머리를 쓰는 것은 그 다음의 선택이다.

"내일 병영에 오면 내 잘 알아보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기사 집안에서 자란 자 답지않게 상인처럼 굴기는 하지만 그 혈통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알겠네. 어차피 한 배를 탄 사람이니 내가 그를 강제로 억압하는 일은 없을 거네."

마스터 요한은 다 식은 차를 단숨에 마시고 자리를 떠났다.

내일 방문할 윌리엄을 위해 준비할 일이 많았다.

특히, 흥분해서 결투를 준비하고 있을 기사들을 생각하면 실력있는 의사를 몇 명 미리 섭외해 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니, 백작님은 연극을 하셔도 좀 적당히 하시지. 그렇게 진짜처럼 하시면서 기사들을 미치게 만드시다니.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마스터 요한은 처음처럼 툴툴거리며 영주성을 나섰다.

* * *

칼마르 시와 그 주변이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 공의 영지다.

당연히 영지군은 칼마르 시 뿐 아니라 주변의 농촌과 산촌에서도 뽑혀 온다.

뽑혀 온다고 해서 따로 징병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전통과 관례에 따라 영지군으로 봉사할 사람이 일정 기간 칼마르 시로 오는 것이다.

누구는 면세를 조건으로 하사관으로 2달간 복무,

누구는 소작지를 받고 기수로 3달간 복무,

누구는 마을의 땔감을 공급하는 조건으로 선임 병사로 2달 반 동안 복무,

누구는 숲에서 일정 수량의 사냥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원정을 포함하여 정찰병으로 3달간 복무.

사람마다 조건도 시기도 기간도 다 다르다.

이게 왜 이렇게 지랄이 나냐 하면 그때그때 조건이나 특권을 걸고 영지병을 모병하는데, 그 특권이 그대로 부친에서 아들에게로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2, 3백년쯤 내려오면 완벽한 혼란, 그 자체가 된다.

영지병의 명부에는 2천 명이 넘는 인원이 있는데, 봉사 시기와 기간이 제각각이니 통일적인 움직임이나 훈련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영내에 대기하는 인원은 20%를 넘지 않고 말이다.

그렇다면 반발을 무릅쓰고 모든 조건과 특혜를 폐지한 후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영지군을 편성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거다.

현대인이라면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봤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렇게 급료병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없어서.

군대라는 것이 돈 먹는 하마나 다름이 없다.

전쟁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비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농업이 기반이 이 세상에서는 몇몇 상업도시를 제외하면 급료병을 1년 내내 유지할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 상식이다.

만약 전투가 발생하면 봉사기간이 남은 영지군을 소집하고, 돈을 들여서 계약직 용병을 고용하고, 관리와 가신의 중간 어디쯤 있는 기사들을 동원하는 것이 정석이다.

다들 그렇게 한다.

그래서 내가 영지군의 병영을 방문했을 때는 150여 명의 영지병이 병영에 대기하는 영지군의 전부였다. 물론 나를 기다리고 있던 30여 명의 기사들을 제외한 숫자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태도로 보여줬다.

그러나 나는 영지군을 뒤집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제의 붉은 점 3개 중 1개는 경비대의 간부에게 그리고 2개는 시의회의 의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머리에는 상태창의 보증을 믿고 영지군을 리네아 여백작의 충성스러운 수족으로 입력해 둔 후였다.

그래서 영지군의 무장과 보급품의 상태를 점검하고 전쟁시 얼마나 빠르게 전원을 소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점검하기만 했다.

그것이 마스터 요한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윌리엄 경. 경은 반역자 조사를 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나?"

"반역자가 없는데 무슨 반역자를 조사합니까? 백작님께서도 영지군은 믿을 수 있는 신하들이니 가서 격려하라고 하셨는데요."

"아니, 어제와 말이 다른 것 같은데? 그보다 그러면 여기는 왜 온 건가? 어제는 당장에 반역자를 때려잡으러 갈 것 처럼 하고 말이지."

"감찰관의 임무라는 것이 원래는 해당 기관의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전반적으로 감찰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분에 충실하는 중이지요. 영지군의 정예함도, 기사들의 능력도 모두 제대로 파악해서 백작님께 보고 드릴 겁니다. 게다가 조만간 영지군의 실력을 발휘할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우리 칼마르의 기사들이 얼마나 유능한지 알려줄 일이 있지."

마스터 요한은 반역자와 영지군이 관련이 없다는 확언을 받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인상을 쓰고 나를 보던 그는 이제 웃는 낯으로 어깨까지 두드리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칼마르 최고의 실력자라는 평판과 어울리지 않게 붙임성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유있는 마스터 요한의 모습과 달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분위기는 별로 좋지 못했다.

영지군에 대한 신뢰를 천명한 백작의 전언을 들은 후로는 오히려 더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억지로 참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온다고나 할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백작의 '친애하는 자'이니까.

18살.

어리고 미혼이고 미인인 여백작이다.

기사들이 가상의 연애 대상으로 이상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혹시 로또라도 터지면 팔자 고치는 것이고.

그런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시골 촌놈이 자신들의 우상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미울까.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유명한 사람이 무는 세금과 같은 것이라고 하던데 여기서 나는 꽤나 무거운 세금을 내야 할 모양이다.

"윌리엄 경. 경이 서류를 검토하고 무기를 점검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기사들의 실력까지 점검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경이 감찰관이라고 해도 그만한 실력이 되어야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보다 좀 더 단단하게 생긴 기사 하나가 마스터 요한과 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첫 번째 세금 징수자가 나타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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