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2화 (32/248)
  • 32. 친애하는 자.

    빌드업이라는 단어가 있다.

    원래는 축구 용어였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일반인들도 흔히 쓰게 된 단어다.

    어떤 일을 진행하기 위해 미리 선행해서 준비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비슷한 단어로는 사전작업, 기초작업, 밑작업 따위가 있다.

    당연하겠지만 빌드업을 제대로 짜기만 한다면,

    될 일은 순조롭게 되겠고,

    안 될 일조차 되게 만들 수 있다.

    상상 못할 기책을 쓰든,

    대놓고 돈을 쓰든,

    눈 앞에서 주먹을 흔들든,

    권력으로 찍어 누르든

    관련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만 만들면 뭔가 이상해도 일은 진행되니까.

    설사 나중에 '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며 판이 뒤집히고 줄줄이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한이 있어도 일단 진행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리네아 여백작은 그 빌드업을 할 필요가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내가 툭 튀어나와서 리네아 여백작의 약혼자가 된다면 리네아 여백작의 권위가 '조금' 손상되는 정도가 아니라 와장창 손상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여백작이 사랑에 빠져서 감정을 슬쩍 드러내는 일은 충성스러운 가신 답게 한쪽 눈을 감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이성을 잃고 공적인 일까지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대놓고 반기를 드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등장하고 리네아 여백작의 근처에서 얼쩡대는 시간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내가 어그로도 끌어주고 리네아 여백작이 기름도 부어주고 하면서 연극을 좀 하면, 가신들이나 주변의 귀족들이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아챘다고 확신할 것이다.

    저 놈이 리네아 여백작을 움직이는 키구나.

    저걸 이용해야 겠다.

    또는

    없애야 겠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리네아 여백작은 자기가 할 일을 하고 나는 작위와 영지를 손에 넣는다라.

    좋네.

    좋은 계획이야.

    내가 끝까지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그거 만만하지 않다는 것,

    나도 안다.

    만약 내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의뢰를 받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해도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말이다.

    내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나를 호위하는 사람이,

    내 명령을 이행하는 부하들이

    적인지 우리편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그거 잠이나 제대로 자겠느냐는 말이다.

    선불로 작위와 영지를 받아도 내가 누리기 전에 죽으면 남 좋은 일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치트키가 있다.

    상태창.

    상태창에 있는 미니맵으로 적의를 가진 자를 구분할 수 있다.

    뭔가 성능이 이상할 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적의를 가진 자를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어디냐.

    그래서 여백작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다.

    쉽게 죽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이런 반응이라니!

    나는 반투명한 미니맵을 보고 다시 눈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백작의 개인적인 가신들.

    시의회의 의원들.

    자문위원들 몇 명.

    군부와 경비대의 관련자가 또 몇 명.

    모두 칼마르 시의 핵심 관계자들이고, 하나하나가 칼마르 시를 구성하는 여러 이익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빨간색으로 깜박이는 점들이 1/3은 되어 보인다.

    물론 빨간색으로 표시된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반역자는 아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빨간색으로 깜박이던 점은 3개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반역자라고 의심할 만한 자는 3명인 셈이다.

    단지 내가 어그로를 좀 끌었더니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열이 받은 자들이 속출했을 뿐이다.

    "아, 그러니까 윌리엄···경?"

    "아직 경이라고 불릴 만한 신분은 아닙니다만 조만간 백작님께 정식으로 서임을 받을 예정이니 편하신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스렌센 경."

    "그래요. 윌리엄 경. 확실히 해 주십시오. 여기는 공적인 자리입니다. 경은 지금 경비대와 영지군에 다른 세력과 손을 잡은 자가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 맞습니까?"

    "감찰관의 입장에서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아마 깜박이는 빨간 점의 색이 변할 수 있다면 그냥 빨간 정도가 아니라 씨뻘겋게 변하는 사람이 여럿이겠다.

    얼굴에 열이 뻗쳐서 분을 못이기는 것이 역력히 보이는 자가 여럿 이었다.

    모두 경비대와 영지군의 간부들이었다.

    "가능성의 영역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제가 백작님께 감찰관으로 임명받은 것입니다. 가능성이 단지 가능성으로만 끝날지, 그것을 제가 알아볼 예정입니다."

    내 대답의 앞에

    '물론 나는 다른 사람들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떨어지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립서비스는 필요했다.

    비록 앞뒤가 안 맞는 말일망정.

    "물론 제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뭔가 오해가 있지 않았을까, 뭔가 사소한 착오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윌리엄 경. 음······ 윌리엄 경."

    여백작이 있는 자리다.

    여백작은 나를 감찰관으로 임명했고, 나는 감찰관으로서의 포부를 밝혔을 뿐이다.

    그러니 대놓고 나를 들이박기가 저어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막 나가는 일이 여백작의 의향에 따른 것이라면 진짜 심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백작이 자신의 신하들을 의심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의심할만한 일은 당연히 있다.

    사고사로 죽은 전 백작.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지.

    *

    눈치가 빠른 자들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전 백작이 사고사로 죽은 일은 갑자기 백작위를 떠맡아야 했을 리네아 여백작에게도 재난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엄청난 사고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여파가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몰랐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끝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계승자가 정상적인 경우의 일이다.

    계승자인 여백작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미숙했다.

    가신들의 보좌가 필요한 때이지 권력 강화를 위해 정치적 숙청을 할 때가 아니었다.

    비록 정통성에 흠집이 없다고는 하지만 대귀족간의 암투는 티끌만한 흠집조차 한껏 과장하여 사람을 이상한 자로 모함하는 법이지 않은가.

    황제가 제위에 없는 세월이 벌써 10년이다.

    그래서 이런 시기에는 자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위로는 여백작부터 아래로는 말단 관리까지 공유했다.

    그런데 1년 만에 그 암묵적인 합의가 깨지는 모양이었다.

    여백작이 통치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일까?

    밑도끝도 없이 튀어나와서 감찰관으로 임명된 자는 아직 기사 서임조차 받지 못한 애송이였다.

    시의회의 의뢰를 받은지 몇 시간만에 경비대조차 찾지 못한 용병들을 잡아 낸 것을 보면 능력은 출중한 자임에 틀림없다.

    개인의 무용도 평범하지 않아서 기사 몇 명은 능히 감당할만하다는 소문도 있다.

    그래도 칼마르 시에 정착을 한 것이 얼마 되지 않는, 사실상의 외지인이다.

    외지인.

    그래.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다.

    칼마르 시와는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와 어떻게 하면 연줄을 만들지도 막연하다.

    완전히 백작의 사람인지 아니면 뭔가 타협할 만한 여지가 있는지조차 불명확하다.

    무엇보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문제를 크게 일으키고 그냥 이 곳을 떠나면 어떡하지?

    남는 사람들이 곤란해 지는 것은 알 바가 아니라는 식으로 굴면 가까이 지낸 사람들만 피를 보게 된다.

    아니, 진짜 문제는 저자가 아니지.

    저자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사람들은 리네아 여백작을 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때 리네아 여백작이 입을 열었다.

    "스렌센 경."

    "예. 백작님."

    스렌센은 여백작이 자신과 윌리엄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자 흠칫 놀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스렌센은 윌리엄이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통에 혼란한 상태였다.

    뭔가 알고서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지르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했고, 여백작이 앞에 있어서 대놓고 질문을 할 수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너 정말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적으로 돌릴거냐?

    라는 질문을 대놓고 하면 뭔가 모양이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마치 여백작을 따돌리고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들린다.

    리네아 여백작은 이마에 땀이 맺힌 스렌센을 일별한 후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윌리엄 경은 내가 사적으로 몇 번 만나면서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알게 되었다. 비록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지만 칼마르를 위한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영지를 위해 일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감찰관에 임명하게 된 것이다. 그는 시의회의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이미 그의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아! 윌리엄은 여백작의 손이구나.

    그냥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은 여백작의 의지다.

    가신들과 관리들은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표정을 숨긴 채 이제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했다고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오산이었다.

    "그리고 윌리엄 경은 내가 친애하는 자이기도 하다."

    무심하게 여백작의 말을 듣고 있던 가신들의 표정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친애하다.

    남녀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다.

    가까운 사이임을 나타내거나 또는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쓰는 격식있는 단어다.

    그러나 저렇게 얼굴을 붉히고 따스한 감정을 눈에 담아서 이야기한다면 그게 그런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라도 눈치챌 것이다.

    더구나 여백작은 어릴 때부터 통치자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저 차가운 사람이?

    가신들은 물론이고 영지의 핵심 관계자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 놈은 어떤 놈이야!

    백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저 뱀 같은 놈이 우리 백작님께 무슨 짓을 한거야!

    *

    시시각각 변해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경악에 찬 표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확 달라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움과 당황함이 지나자 시선은 명백하게 둘로 나뉘었다.

    의심하는 시선과 탐색하는 시선.

    둘 다 별로 애정을 담은 시선은 아니었다.

    대신 두려움이 그리고 갈망이 그 시선에 서려 있었다.

    어쩌면 이 시선은 권력자의 애첩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은데.

    그러면 불을 질러 줘야지.

    "저 역시 백작님을 친애합니다. 그래서 백작님이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일단은 내일 영지군에 먼저 방문하겠습니다. 그럼 영지군과 관련된 분들은 내일 뵙겠습니다."

    영지군에는 마스터 요한이 있다.

    칼마르 시와 그 주변 지역에서 가장 강한 자.

    영지 기사들의 지도자.

    백작 가문의 무술 스승.

    기사의 신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 자.

    나는 상태창에 있는 [체력 : MAX]라는 항목이 어떤 의미인지 그를 통해 테스트해 볼 생각이다.

    겸사겸사 영지군의 실태도 점검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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