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9화 (19/248)

19. 기사는 용병보다 강하다.

야영장으로 몰려온 30여 명에 가까운 숫자의 기병들은 단순한 기마 순찰대가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상행에 참가했던 용병들이 얼굴을 알고 있는 기마 순찰대의 대부분은 기마 용병을 잡기 위해 떨어져 나간 모양이고 야영장으로 몰려온 자들의 상당수는 기사급의 실력자였다.

구태여 따지자면 말을 탄 기사가 종자와 함께 몰려온 것이다.

용병들은 최선을 다했다.

계약은 종이에 쓰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계약을 지키겠다고 목을 거는 용병은 사실 거의 없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싸우는 것이지 도망칠 수만 있다면 도망을 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파웰 상단의 장거리 상행은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계약의 상대방이라기 보다는 같은 식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용병 중 일부는 경력의 대부분을 파웰 상단의 장거리 상행의 호위로 보낸 자들조차 있을 정도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활을 쏘고 쇠뇌를 발사하고 짐마차 위에서 창으로 찌르고 그물을 던지고 갈고리창으로 끌어내리고 검이나 둔기를 들고 직접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10여 명에 달하는 기사급의 실력자들이란 것은 용병들이 감당해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하나씩 죽어갔다.

만약 짐마차가 성벽의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다 끝났을지도 모른다.

용병들은 짐마차를 의지해서 버티고 있었다.

"윽."

쌍검 미하우가 잡아놓은 기사는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검의 움직임에 현혹된 기사의 팔을 소도가 찌르고 빠졌다.

피가 흘러내려 땅에 떨어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일대일로 저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면,

쌍검 미하우의 원한 목록에 기사 하나가 더 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들은 그렇게 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장검을 든 기사 하나가 둘 사이로 난입해 들어와서 미하우를 몰아 붙이며 동료가 한숨 돌리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 정교하게 쌓아 올리던 공격이 꼬여 버린 것이다. 미하우는 사냥의 실패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사들이 쌍검 미하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쌍검 미하우는 이제 두 개의 칼로 두 명의 기사를 상대해야 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의지가 당신에게 닿는다."

멀리서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미하우와 대치한 기사의 갑옷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미하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장검을 든 기사는 바로 앞에 낙뢰라도 떨어진 것 같은 돌발적인 사태에 당황했지만 검에 찔려 쓰러진 동료를 위해 앞으로 나섰다.

"내 의지가 당신에게 닿는다."

그때 다시 영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길이 솟지 않았다. 장검을 든 기사는 검을 휘두르며 자리를 이동했다. 그것으로 주문은 해소되었다.

"내 의지가 당신에게 닿는다. 다시! 내 의지가 당신에게 닿는다. 다시! 내 의지가 당신에게 닿는다. 아니, 가만히 좀 있으라고!"

짜증스럽게 외치는 마법사 피요트르의 고함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죽잖아!

신비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자들은 일반인과 다르다.

행동도 생각도.

어떤 때는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신비의 편린에 맞닿아 단순히 힘을 끌어다 쓰는 자조차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반응했다.

다들 화염의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의 능력과 그 공격을 막아내는 기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금방 깨달았다.

공격하려는 목표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그 결과 마법사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자들 중 가만히 서서 마법사의 공격을 자처하는 자는 없었다.

가만히 서서 죽기 싫은 자들은 움직여야 했다.

피요트르는 불을 다루는 마법사라는 말을 듣고 있다. 정확히는 불에 대한 언명의 신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과 관련되어 말의 의미를 명확히 하면 불을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도 내 의지가 당신에게 닿는다고 하는 순간 피요트르가 주목하는 적에게서 불이 확 일어난다. 작은 불이 몸 위에서 피어오르다가 갑자기 폭발하듯 전신으로 번져서 사람을 태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형식화된 주문이 아니다. 불의 신비와 피요트르가 합의한 소통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읊는다고 해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

신비를 다루는 사람의 숫자는 아주 적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공격 기술을 가진 자들의 비중은 더욱 적다.

그래서 피요트르 정도의 사람이 불의 신비를 발휘하면 일반적인 사람은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불에 휩싸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장의 전투 무기로 존재하는 기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화염의 의지가 자신을 침식하기 전에 그것을 느끼고 피하고 저항했다. 화염의 의지가 강해지는 곳을 느낄 수 있고, 본능적으로 피할 수 있다. 설사 화염의 의지가 자신의 몸에 침투하더라도 그 의지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다.

장검을 든 기사 역시 기사로 훈련 받았고 몸에 인이 박힐 정도로 반복해온 검의 움직임은 그의 의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서 마법사가 강요하는 의지를 막을 수 있었다.

무엇인가 화끈한 것이 얽어매는 느낌에 계속 자리를 피하고 주변에 칼질을 하며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공격하다 보니 멀리 있는 마법사가 짜증을 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 무엇인가를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두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대응이 늦어서 갑옷 위에 작은 불꽃이 피어 오를 때는 칼이 눈 앞으로 찔러오는 것 같은 오싹함을 느끼고 검을 휘두르며 저항하기도 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버티고 있었다. 마법사 피요트르의 시선을 자신에게 묶어둔 것만으로도 그는 제 몫을 충분히 한 셈이었다.

반면 파웰 상단의 호위 용병들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동료들은 하나둘 죽어나가고 있었다. 일개 용병이 기사를 상대로 저항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짐마차가 성벽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해도 짐마차는 진짜 성벽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해야 할 적에는 기사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믿고 있었던 쌍검 미하우와 마법사 피요트르는 상대하는 기사에게 손이 묶여서 호위 용병들을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물론 도와줄 손은 가까이에 있었다.

만약 산적이라든가 강도단에 의해 분쟁이 발생하면 파웰 상단을 도와주기로 하고 장거리 상단의 상행에 따라오던 중소상인들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산적들이 습격한 후에 곧이어 기마순찰대임이 명백한 자들이 기사까지 잔뜩 섞여서 공격해온다?

이것은 대놓고 귀족들간의 분쟁이라는 소리였다.

파웰 상단이 칼마르 백작가와 긴밀한 사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황제 선거에서 중립인 칼마르 백작가가 다른 선제후와 손을 잡은 주변의 귀족들과 별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도 비밀이 아니다.

파웰 상단을 따라왔던 중소상인과 개인은 슬슬 떠나고 있었다. 둘이 서로 싸우느라고 주변에 신경을 못쓰고 있을 때 몸을 피하는 것이 약한 자의 지혜일 것이다.

물론 나중에 파웰 상단이 보복할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 때 가서 볼 일이다.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본다면 보복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남아 있다가 벼락을 맞을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 모습을 호위 용병들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실시간으로 사기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적과 한바탕 붙은 전투는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호위 용병들에게도 제법 피해를 입혔다. 이겼다고는 하지만 쉬지도 못하고 또 다른 전투를 치르는 중이다. 그런데 상대하는 적은 너무 강하고 도와줄 우군은 사라지고 있었다.

용병들 역시 슬슬 살아나갈 궁리를 해야 할 때였다.

그런 호위 용병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정말 잘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용병이었다면 기사들이 등장하는 순간 모조리 도망을 쳤다고 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납득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윌리엄이 용병들의 전투에 끼어든 때가 바로 이렇게 모든 것이 개판이 되지 않을까 싶던 순간이었다.

*

말을 타고 쫓고 쫓기면서 싸우는 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리는 맛이 마음에 든 쇠몽둥이는 타격 거리가 너무 짧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쏠 실력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단 한 대만 때려주면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적들을 쫓아 짐마차까지 오게 되었다

"주콥! 상황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젠장. 어쩔 겁니까? 우린 둘 뿐입니다."

나는 늘어선 짐마차를 보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짐마차 위나 옆에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용병뿐 아니라 상인도 많았다.

아직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무기도 들고 있지만 대부분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일부는 완전히 사기가 꺾여서 죽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냥 붕괴할 판이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이성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대하는 자들의 수가 많아도 공격이 먹히는 상대였다면 이렇게까지 멘탈이 털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겠지만 상대하는 자들의 상당수가 기사였다. 그리고 일부는 기마순찰대였다.

기사가 이렇게 많은 적이라니!

전체적인 숫자가 적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능숙한 용병으로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구성이다.

말을 탄 기사 하나가 짐마차에 가깝게 돌진해 들어가자 파랗게 질린 상인 하나가 들고 있는 창을 내질렀다.

창은 기사를 맞췄다.

분명히 기사를 찌르는데 성공했지만 공격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제대로 갖춰 입은 기사의 갑옷은 일개 상인이 내지른 창에 뚫릴 정도로 허술한 방어구가 아니다. 창은 기사의 갑옷을 긁고 지나가버렸고 가까이 접근한 기사의 검은 상인의 어깨를 비스듬하게 잘라버렸다. 상인은 짐마차 위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공포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제는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쳐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비등한 숫자의 상대를 상대로 정신 없이 싸운다면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전쟁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고만고만한 실력의 적과 투닥거리다보면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을 테니까.

그러나 이렇게 소수의 실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듯 구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이런 식의 행동은 상대방의 저항의지 자체를 박살내 놓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본적인 실력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지는 여파에 휩쓸려 싸울 수 있는 사람까지 도망치게 된다.

그렇다. 아마도 산적들에게 확실하게 이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리라.

이겼다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면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다.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일 것이다.

도망치고 싶어서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나는 쇠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고함을 지르며 적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내 앞에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도망치는 적 기병의 생존자들이 달리고 있었다.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내 말이 미친 듯이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달렸다.

도망치던 기병들은 순식간에 나에게 따라 잡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내 쇠몽둥이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쇠몽둥이는 내가 바로 옆까지 따라잡은 기마병의 등을 후려쳤다.

가죽더미를 내리치는 것 같은 찰진 소리와 함께 기마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기마병은 땅에서 몇 바퀴를 구르면서 튀어오르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었다.

즉사였다.

보이지! 봤지!

나를 봐라!

나를 봐!

내 쇠몽둥이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로질렀다.

마음부터 이미 패배하고 있던 우리편이 희망을 가지려면 좀 더 화려하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저 기사들 역시 별 것 아니었다는 느낌을 받아야 해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따라잡은 기마병이 모는 말의 머리를 노렸다.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비산했다.

말이 앞으로 몇 바퀴를 굴렀다. 갑자기 넘어진 말도 사람처럼 구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말 위에 탔던 기마병은 말이 구르는 와중에 깔려서 목이 좀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내동댕이쳐졌다.

짐마차를 의지해서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그리고 내 화려한 퍼포먼스는 상단의 용병들뿐 아니라 양학을 하고 있던 기사들의 흥미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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