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0화 (20/248)

20. 그리고 나는 기사보다 강하다.

"뭐야? 저 미친 놈은?"

"상단의 기마용병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방금 낙마한 병사들이 기마용병을 처리하라고 보냈던 자들이었습니다."

"말 위에서는 기사도 무섭지 않다고 떠들던 놈들이 말 탄 용병 따위에게 저렇게 박살이 나나? 기마순찰대가 언제부터 저렇게 병신이 된 거야?"

파웰 상단의 용병들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단의 단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적의 활약에 짜증을 냈다.

이대로 가면 무난하게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수가 튀어나온 것이다.

게다가 그는 갑자기 끼어들어서 날뛰는 용병 뿐 아니라 지금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단 약탈?

할 수 있지.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못 할 것 없다.

기사의 명예 운운하기에는 이미 손에 묻힌 피가 만만하지 않다.

손에 쥔 황금은 더욱 만만하지 않고.

그러나 지금 이때? 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적어도 소금길을 벗어나서 산길로 들어설 때 산적들과 함께 작업해야 했다.

이렇게 소금길 한복판에서 한 판 벌리는 것은 바보짓에 가까웠다.

소금길을 주시하는 수많은 눈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산적 두목인 알란이 모든 계획이 탄로났다며 성급하게 군 것이 문제였다.

딱 봐도 그냥 보이지 않나?

이것은 떠보기잖아!

배신자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냈지만 확신할 수 없으니 유력한 용의자를 떠 본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얕은 수에 넘어가다니!

길목을 차지하고 앉아서 통행세나 거두다 보니까 감각이 녹슬었나?

알란, 그 놈이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었는데.

산적들이 먼저 출발하며 보내온 전령을 통해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그는 모을 수 있는 병력만이라도 급하게 모아서 달려왔다.

그러나 자신의 우려대로 일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자신의 기사단을 뒷받침해야 할 산적들은 파웰 상단이 준비한 덫으로 달려가서 버둥대다가 결국에는 글자 그대로 도륙 당하고 말았다.

덕분에 급하게 소집하느라고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병력의 숫자는 상단의 용병들에게 밀려도 엄청나게 밀렸다.

만약 데리고 온 병력의 상당수가 기사가 아니었다면 산적들이 몰살당한 꼴을 보자마자 돌아가버렸을 것이다.

전투에서는 숫자가 가장 큰 힘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기사가 10명이 넘었기에 한 번 시도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기사는 용병과 다르니까.

어려서부터 전투 기계로 훈련되고 질 좋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기사는 실력만 보더라도 일당십은 기본으로 하는 존재다.

기사의 갑옷은 웬만한 화살조차 튕겨내고 징집병의 어설픈 칼질은 나무막대기로 두드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과연 10여 명에 달하는 기사들은 기사단장의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펼치며 파웰 상단의 기세를 꺾어 버렸다.

용병 중에서는 이름 꽤나 있다는 쌍검 든 말라깽이와 자신의 신비와 제대로 소통하지도 못하는 마법사는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상대를 하자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아예 전력에서 이탈해 버렸다.

이렇게 조금만 더 적을 흔든다면 돈에 팔리는 용병 따위는 그냥 무너져 내릴 것이 뻔했다.

그런데 말을 타고 등장한 용병 하나가 꽤나 요란스럽게 기마병을 처리하는 바람에 용병들의 사기가 살아나 버린 것이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이곳은 소금길이다. 패트슨 남작의 영지가 아니란 말이다.

시간을 끌다가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어서 빨리 용병들의 전의를 다시 꺾어야 했다

"실력이 나쁘지 않은 놈이야. 헤산! 저 놈을 처리해!"

단장의 고함에 근처에서 여유있게 용병을 몰아붙이던 기사 하나가 손을 들어올리며 신호를 하고 전열에서 이탈 했다.

헤산은 상단을 향해 말을 몰아오고 있는 용병을 향해 창을 겨누며 나아갔다.

되도록 빨리 압도적으로 적을 눌러버리라는 단장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그였다.

방금 어이없게 죽어간 순찰대의 기병들을 봤지만 그런 일은 실력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싸울 때는 한참 열이 올라서 미친 황소처럼 날뛰던 자도 패배해서 도망치기 시작하면 토끼처럼 나약해 진다.

그것이 전쟁터의 생리다.

그래서 헤산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적을 일격에 처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놈, 들고 있는 무기부터가 정상이 아닌데?

워해머도 아니고 무슨 몽둥이를 들고 저래?

헤산은 거무튀튀한 몽둥이를 치켜들고 노려보는 적을 향해 말을 몰았다.

*

나는 숨을 고르는 말을 다독였다.

아직 여력이 넘치는 나와 달리 말은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유분의 말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내 의도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동료 용병들의 환호성은 내 의도가 먹혀 들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꽤나 날뛰던 기사들 중 하나가 말을 돌려 내게로 향한 것도 기대한 대로였다.

나를 보라고 과하게 날뛰었으니 어그로가 끌린 것은 당연한데 그 결과가 좀 아쉽기는 했다.

하나가 아니라 둘, 잘하면 셋 까지도 기대했는데 말이다.

접근해오는 자는 아주 정석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너무 정석적이라서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나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이런 것은 별로 참신하지가 않은데?

오늘 나는 지금까지 차가운 정신으로 싸워왔다.

전투의 흥분도, 두려움도 없이 기계적으로 적을 쓰러뜨렸다.

별로 지치지도 않았다.

내 능력의 최대치를 사용한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밀염상과 한패였던 선원들을 내가 밀어붙일 때 느꼈던 고양감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더 강해진 것일까?

항구에서의 전투 이후 체력에 붙은 MAX의 한계치가 더 높아진 것일까?

아쉬웠다.

한 번 더 그 고양감을 느낄 수 있다면 손에 잡힐 듯 말듯 하는 이 감각을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촉이 나를 간질였다.

이 놈을 짓이기면 제대로 된 녀석이 튀어나올지도?

말의 고삐를 잡아 챘다.

말에게 주어진 짧은 휴식이 끝났다.

적의 공격은 일직선이었다.

창끝은 내 가슴을 향했고, 그의 시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창에 실린 기세는 대단했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가슴을 향해 파고드는 적의 창끝을 슬쩍 빗겨내며 쇠몽둥이의 끝으로 적의 얼굴을 찍었다.

내가 이야기했던가?

내가 쓰는 쇠몽둥이는 철판을 둘둘 말아서 만든 평범한 쇠몽둥이가 아니다.

전투용 쇠몽둥이다.

양쪽의 끄트머리가 송곳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돌 깰 때 쓰는 정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단 말이다.

단창처럼 쓰는 무기이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짧은 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쇠뭉둥이의 끝이 안면가리개를 뚫고 투구의 안쪽까지 닿았다.

얇은 철판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안면가리개 따위로는 이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나는 오른손에 쇠몽둥이를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쇠몽둥이에 걸린 적 기사의 시체가 흔들거렸다.

나를 보는 적들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래. 그래야지.

이 정도 어그로는 끌려야지.

나는 적들을 향해 시선을 두고 쇠몽둥이를 털었다.

적 기사의 시체가 바닥에 굴렀다.

잠깐의 정적 후.

짐마차쪽에서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졌다.

비명과 웃음이 섞인 고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적 기사 3명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내 심장의 펌프가 한 단계 더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

기사단장은 순간 말을 잃었다.

헤산이 그렇게 실력이 부족한 놈이 아닌데.

저렇게 간단하게 당한다고?

그리고 저 힘은 또 뭐야?

신비에 접한 놈이라도 되나?

신비에 접한 기사라면 아주 귀한 놈인데.

"저 놈이 용병이라고?"

"저희가 받은 첩보에는 저런 자가 없었습니다."

"저런 놈이 일개 용병이라고!"

기사단장은 고함을 질렀다.

그가 보기에 저런 수준의 실력을 가진 자가 용병일 수는 없었다.

분명 칼마르의 기사 중 실력이 뛰어난 자가 변장을 하고 끼어든 것이다.

어쩌면 마스터 요한의 제자인지도 모르지.

칼마르의 여백작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다.

나이도 어린 여자 주제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그녀의 휘하에 있는 가신 중 누군가의 책략일지도.

아마 그게 맞겠지.

생각해 보면 칼마르의 여백작은 언제나 가신들의 뒤에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다.

누군가의 책략이었든지 준비된 패가 눈 앞에 보이는 기사 하나로 전부일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칼마르의 기사들이 몰려오고 있을 것이 뻔했다.

저 녀석은 상단의 용병들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무너지니까 시간을 벌기 위해 튀어나온 것일 테고.

그렇다면 결정을 내려야 했다.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 인가.

그러나 그의 고민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기사들과 기마 용병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기사는 3명이었다.

3명의 기사는 제각각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찌르기용의 장창을 가진 자가 하나.

원래 가지고 있던 창은 이미 사용해 버리고 각각 기병도와 모닝스타를 든 적이 둘. 셋.

셋 모두 지금까지 전투를 치르다가 온 자들답게 모두 아드레날린 과다로 신경이 폭주하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호흡이 가쁘고 눈동자는 커지고 창백해진 안색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일종의 오버클럭 상태였다.

그러니까 평소보다 더 나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끼고 있을 거다.

아주 약간 더 빠르고,

아주 약간 더 강하고,

아주 약간 더 호흡이 가쁜,

그런 상태 말이다.

평소와 다른.

그래서 틈이 보였다.

아주 찰나의 틈이.

창은 내 겨드랑이 사이를 지나갔다.

스치듯 지나가는 창대의 감촉을 느끼기가 무섭게 경악한 표정의 적 기사가 바로 내 코앞에 도달했다.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속도가 대략 60km/h 정도가 된다.

갑옷을 갖춰 입은 건장한 남성의 무게는 100kg이 넘는다.

100킬로짜리 덩치가 60킬로의 속도로 날아와서 부딪친 셈이다.

달리는 자동차에 치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이 들었다.

버틸 수 있다.

쇠몽둥이를 앞팔에 대고 방패 대신으로 삼았다.

아주 잠깐 후의 충격을 기대하며 몸을 웅크렸다.

적 기사와 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망치로 후려갈기는 것 같은 충격이 온 몸을 강타했다.

1km는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팔을 타고 머리까지 울렸다.

내 말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뒷발이 꺽이면서 주저앉았다.

그러나 나는 다치지 않았다.

다친 것은 아니, 죽은 것은 적 기사였다.

그는 말 위에서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버렸다.

땅 위에서 대굴대굴 굴러가다가 수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 멈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적이 죽은 것을 확인하러 갈 여유는 없었다.

내가 주저앉은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2명의 적이 양쪽에서 동시에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내 목을 노리고 기병도가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가벼운 위빙으로 기병도의 궤적을 피한 후 구부렸던 무릎을 펴면서 말 위에 있는 상대의 허리춤을 잡았다.

칼집을 고정했던 허리의 벨트는 생각보다 무척 질겼다.

적 기사가 말의 고삐를 놓치고 땅바닥에 끌어내려질 정도로.

적은 동시에 나를 공격해 왔었다.

내가 적 기사 한 명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동안 다른 쪽에 있는 적 기사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다른 쪽의 적 기사가 든 흉악하게 생긴 모닝스타가 나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끌어내린 기사의 뒤 쪽에서 그의 허리벨트와 목덜미를 단단히 쥐고 반바퀴 돌면서 내 뒤통수를 내리치려던 모닝스타를 향해 들어올렸다.

멈칫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동료를 방패 삼아 내밀었으니 공격을 멈추는 것이 정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 무기도 제어하지 못하고 휘두른다면 기사 자격이 없지.

그러나 멈췄다는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나는 방패로 삼은 적 기사의 목덜미를 잡은 채 그의 손을 잡고 기병도를 위쪽으로 찔렀다.

기병도는 허리 아래쪽, 철판 스커트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모닝스타를 든 자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내가 목덜미를 잡은 자도 마찬가지였다.

기병도로 적의 허리를 박살냄과 동시에 목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모닝스타를 든 적 기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4명이 와서 1명이 남았다.

이 곳에 서 있는 자는 나 밖에 없었다.

*

기사단장은 신음처럼 웅얼거렸다.

한 순간에.

아주 잠깐의 얽힘이었는데!

이런 기교와 힘이라니, 역시 마스터 요한의 제자였던 걸까?

함정이야. 함정이었어.

그의 머릿속에는

망했다.

끝났다.

이런 부정적인 단어만 떠올랐다.

그 때 그의 부관이 손짓을 했다.

그의 눈길이 부관의 손짓을 따라 간 순간 그는 후퇴를 결심했다.

멀리서 흙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기마대의 접근이었다.

당연히 파웰 상단을 돕기 위해 온 자들일 터였다.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후퇴를 해야 한다.

기사단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

막대한 피해를 입은 파웰 상단은 더 이상의 상행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곧장 칼마르로 돌아갔다.

상단의 관계자들은 피해도 피해지만 상행의 중단에 따른 과장된 뜬소문과 유언비어를 통한 공격을 더 걱정하며 칼마르로 가야 했다. 상행의 중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칼마르시에 도착한 파웰 상단은 아무도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웰 상단에서 벌어진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이 벌어져서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마르의 여백작이신 리네아 공녀님의 약혼자가 살해당했다.

그것도 창녀촌에서.]

그것은 지나치게 폭발력이 강한 스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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