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마 전투도 강하다.
미하우의 의문은 일리가 있었다.
영지 귀족이 지나가는 상인을 약탈하고 묻어버리는 일은 잊어버릴만 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알려진 사건이 그 정도니 안 알려진 사건까지 합치면 의외로 상당한 숫자가 되리라는 추론도 일리가 있다고들 한다.
어차피 치안이 개판인 세상이라 누구 손에 죽었는지 알게 뭐냐는 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귀족들이 저지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르는 일탈은 결국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된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이니까.
한두 번은 숨길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숨길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입은 너무 많고 재산과 생명을 잃은 원한을 풀기 위한 조사는 집요하다.
결국 모든 것은 밝혀지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처벌을 받는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상이 아닌 시절이었다.
누가 죄를 저지른 귀족을 처벌할 것인가?
황제가?
황제는 없는데?
그렇다면 상위 귀족이?
귀족들은 자신들끼리도 신분의 격차가 존재하고 계약에 의해 서로 엮여 있기는 하지만 가신이라면 모를까 상위 귀족이라고 해도 하위 귀족을 처벌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실질은 어떻든 귀족에 대한 처벌은 일단은 황제의 판단을 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황제는 없다.
그러면 귀족에 대한 처벌도 없다.
결국 자력구제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패터슨 남작이 미쳤는지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알 바 아니야. 일단은 여기서 살아나가야 해."
"나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저기 투구를 뒤집어쓴 놈들, 저 놈들 기사겠지?"
"아마도. 그리고 얼굴 보이는 놈 중에도 안면이 있는 기사가 보여."
"쉽지 않겠네. 기사 숫자가 저 정도면 정말 쉽지 않겠어."
바텍과 미하우의 불안대로 적들은 차근차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일단 파웰 상단의 짐마차들이 모여서 만든 방어벽을 향해 달려오던 기마병 중 일부가 기마 용병을 향해 말머리를 돌린 것이다.
떨어져 나간 자들은 모두 기사가 아닌 기마병이기는 했지만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가 기마 용병을 향해 달려 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짐마차로 만든 방어선으로 달려왔다.
*
새로이 나타난 적을 확인했을 때 나는 즉시 말 위로 올라갔다.
반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알란은 자신의 등뒤에 사신이 서 있다가 물러서는 느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누워버렸다.
여전히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알란의 전투는 끝났다.
누가되었든 이긴 자가 알란을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긴 자가 되기 위해 몰려오는 적 기병을 향해 돌격했다.
몰려오는 적 기병의 숫자는 우리측 기병의 2배.
그러나 적이나 우리나 숫자 자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숫자가 적을 때는 실력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러니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재촉해 더 빠르게 달리도록 했다.
숫자에 밀리는데 속력까지 밀릴 수는 없었다. 속력에 밀리면 불리해지는 것이 기병이다. 일방적으로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내 뒤에 누가 나를 따라 달리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쇠몽둥이를 창처럼 앞으로 내밀었다.
1.5미터짜리 단창이나 다름없는 무기지만, 내가 이것을 휘둘러서 어떻게 산적을 박살내었는지 눈 앞에서 목격한 용병들을 기세를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서 울부짖듯 퍼져나가는 고함 소리가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있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고함 소리보다 더 빠르게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길다란 창이 내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상대적으로 짧은 내 쇠몽둥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러나 창이 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나는 말의 옆구리에 매달렸다.
적의 눈에는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적의 창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헛되이 찔렀다.
큰 충격을 기대하며 몸을 사렸던 적은 목표를 잃은 채 휘청거렸다.
그 순간 나는 말등으로 몸을 올리며 쇠몽둥이를 길게 잡고 휘둘렀다.
달리는 속력이 더해진 쇠몽둥이의 공격은 긴 창을 든 기사를 보기 좋게 낙마시켜 버렸다.
낙마한 기사는 내 뒤를 따라 오던 주콥의 말이 밟아 주었다. 훈련된 군마답게 처리할 수 있는 적은 그때그때 처리해 버리는 주콥의 말이었다.
적을 하나 처리하자마자 지나가는 적 기병의 칼날이 가슴 어림을 향해 스쳐간다. 나는 다시 뒤로 몸을 눕히며 칼날의 공격을 피해냈다.
물론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몸을 눕히면서 쇠몽둥이를 위로 올려쳤다.
공격은 딱 걸맞게 들어갔다. 내가 올려친 쇠몽둥이는 적의 턱을 쳐버렸다. 투구를 조이는 턱끈은 보호대가 아니다.
적은 그대로 기절해서 낙마했다.
양측의 기마병들이 서로 마주보고 지나간 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에 양쪽 다 절반에 달하는 기마병들이 낙마를 하거나 부상을 입고 말에 매달린 채 전장에서 이탈했다.
그래도 남은 자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돌격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서로를 노려보며 달리기 시작한 순간 나는 말 안장의 옆에 꽂아 넣었던 쇠뇌를 꺼내들었다. 주콥 역시 그의 쇠뇌를 앞으로 겨눴다.
달리기 시작한 말을 멈출 수는 없다.
아니, 멈추면 안된다.
멈추는 순간 기병은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쇠뇌가 코앞에 들이밀어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일반 보병도 아니고 숙련된 용병이 말뚝이가 된 기마병 하나 못 끝장낼까.
그래서 적들은 쇠뇌살이 자신들에게 날아올 것임을 알면서도 돌격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더 속도를 올렸다.
몸을 움츠리고 방패를 뒤에 몸을 숨겼다.
적들의 생각은 뻔했다.
기마병 흉내를 내는 용병 따위는 한 번의 충돌로 절반을 날려버렸다. 한 번만 더 공격을 성공할 수 있다면 이제 소금이나 파는 상인들에게 의미 있는 기마 부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이런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적보다 먼저 적에게 한 대 먹이기로 했다.
거리가 짧은 쇠몽둥이가 아니라 쇠뇌로 말이다.
쇠뇌살은 사람이 아니라 말을 목표로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쏜다면 철판도 뚫을 수 있는 쇠뇌도 있다고 하지만 말안장에 매달고 다니는 이 작은 쇠뇌에게는 무리한 요구사항이다.
그래서 제대로 갑옷을 갖춰 입은 기마병보다는 말을 쏘는 것이 더 확실하게 적을 줄이는 방법인 것이다.
과연 달리면서 쏘아낸 쇠뇌살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2마리의 말이 달리다 넘어지면서 뒹글었고, 그 위의 기수는 낙마하면서 부상을 입었다. 그 중 하나는 좀 기묘하게 비틀어진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목이라도 부러진 모양이었다.
나머지 2발 중 하나는 갑옷에 박혀서 덜렁거리고 있지만 막상 피부에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을 것이 뻔했고, 다른 하나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정도면 기대 이상이었다.
패터슨 남작의 기병이 여전히 수적으로 2:1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는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내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아무리 숙련된 기병이라고 해도 불과 8기에 지나지 않았다. 수십 수백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10기도 안 되는 자들이다. 게다가 내 뒤에는 전의를 불태우는 3기의 용병들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몰릴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소수의 싸움이 되면 될수록 숫자의 힘은 점점 무의미해지게 된다. 개인의 강함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휘두른 쇠몽둥이가 엉겨 붙는 적 기수의 투구를 가격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쓰는 투구라지만 자신의 역할을 하기에는 쇠몽둥이가 가한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적 기수는 정신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건가?
우그러진 모양을 보면 정신을 잃은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다급하게 접근하던 기병은 떨어지는 동료를 보며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나의 빈틈을 기대하며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나 역시 다가오는 검을 목표로 쇠몽둥이를 후려졌다.
검이 쇠몽둥이에 부딪쳤다.
검과 쇠몽둥이의 충격량을 비교하자면 검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아니다.
검도 쇳덩이를 두드려서 만들었고 무게도 제법 나간다.
그러나 지금은 검이 가지는 무게가 문제가 아니었다.
휘두르는 힘, 그것 자체가 너무 차이가 나니 검으로 막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힘에 손목이 꺾이며 검이 날아갔다.
내가 느끼는 충격은 거의 없었다. 충격은 내 상대가 다 받았지.
나는 다시 쇠몽둥이를 크게 휘두르면 다시 한 번 적 기수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겁을 먹은 기수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고 있어서 한 방에 보내버릴만큼 만족스러운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놈이 시간을 끄나?
겁을 먹어서 싸울 생각이 없으면 도망치면 된다. 그러면 등을 한 대 갈겨줬을테니까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됐을 거다.
그런데 도망은 치지 않으면서 직접 공격하기에는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나는 두 번째 돌격의 충격도 어렵지 않게 극복해내면서 다시 2기의 적을 쓰러뜨린 후였다. 그러나 나와 함께 돌격을 했던 용병들은 주콥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마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정석처럼 돌격 후의 난전으로 돌입했지만 이제 적은 노골적으로 전투를 회피했다.
시간을 끌 생각인가?
곤란한데?
이곳을 어서 정리하고 기세가 죽어가고 있는 상단의 용병들에게 가야 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나는 말을 쳤다.
쇠몽둥이의 타격거리에 들어온 말의 머리를 후려갈긴 것이다.
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네 발을 뻗고 벌벌 떨었다.
말에 탔던 기수는 쓰러진 말에게 깔려서 다리가 부러진 채 정신을 잃어버렸다.
상단의 기병을 처리하기 위해 왔던 패터슨 남작의 기병 중 아직 남아 있던 자들 모두가 그 광경을 봤다.
그들의 말 역시 그 광경을 봤다.
그 이후로는 사기를 잃은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말이 문제가 됐다.
내가 접근할 때마다 말들이 겁을 먹고 기수의 통제에 불응하면서 자꾸만 도망치려고 한 것이다.
결국 남은 자들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해 버렸다.
말이 영리하지만 겁이 많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도주하는 적들을 따라 파웰 상단의 짐마차 방어선으로 돌아갔다. 나를 따라 달리는 자는 조장이었던 자콥 하나뿐이었다.
야영지에서는 상단의 용병들이 짐마차에 기대어 버티고 있었다. 야영지를 덮친 적들은 내가 상대한 자들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짐마차의 벽을 아직은 뚫지 못하고 있었다.
짐마차의 벽에는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용병들뿐만 아니라 쌍검 미하우와 마법사 피요트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타악기의 소리처럼 연달아 울려 퍼진다.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금속성의 충돌음이 영혼을 사로잡아 홀린다. 닿으면 베일 것 같은 소리의 날카로움이 갑옷 너머의 육체에 죽죽 스크래치를 낸다.
그 격렬함에 매료된 자가 뛰어들지만 검무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위태로운 기세를 풍기며 상대를 유혹해 왔다.
쌍검 미하우가 죽인 기사는 여럿이다. 대개는 전쟁터에서 죽였고, 나머지는 결투장에서 죽였다. 간혹 이건 좀 버겁겠다 싶은 자도 있었지만 검을 내지르는 속도를 높이고 또 높이다 보면 어느 순간 제풀에 무너져서 허무하게 죽어나갔다.
지금 상대하는 자도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동료가 너무 많았다.
쌍검 미하우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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