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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500화 (500/522)

# 외전. 3화

“……그런 일이 있었군.”

헨리의 말에 염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참 신기한 놈이군. 다른 놈들은 사과도 없었다면서?”

“그렇다.”

“사실 어비스에선 그게 정상이지. 랭커가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자들을 죽였겠어? 근데 갑자기 양심이 돌아서 사과라니, 솔직히 난 신기하다 못 해 그놈이 좀 수상쩍어. 이름이 하이렌이랬던가?”

스카샤를 만난 후 헨리는 염왕을 만났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만난 건 아니었다.

옛 어비스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동료이니 만큼 가끔 이렇게 만나 근황을 주고받는 편일뿐.

헨리에겐 상층에서 꾸린 파티가 어찌 보면 어비스에서 만난 진짜 동료들이었으니까.

헨리가 말했다.

“의도야 상관없지. 그놈이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래도 속내가 궁금하지 않나?”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돼. 난 관리자지 신은 아니니까.”

“크큭, 그것도 맞지. 이젠 프로 관리자 다 되셨어.”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그 말과 함께 헨리가 염가원에 핀 붉은 꽃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 살 생각인 건가?”

“이렇게라니?”

“시간 역행으로 멸망했던 네 세계도 수복되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이곳에 남아 있냐는 것이다.”

어비스에 오리지널은 없다.

즉, 염왕 또한 다른 세상에서 어비스로 흘러들어온 사람들 중 하나라는 말.

그렇기에 의문스러웠다.

어비스의 주인이 바뀌고 모든 것들이 수복되었음에도 염왕은 하릴없이 이곳에 남아 있었으니까.

염왕이 대답했다.

“남아 있으려고.”

“왜?”

“여기가 더 평화로우니까.”

“어비스가?”

“내가 살던 곳이 어떤 곳인지 아냐?”

“모른다. 염가원만큼 뜨거운 곳이라는 것 외엔.”

“비슷해. 내가 살던 세상도 뜨겁기 그지없지. 그리고 그곳은 끊임없이 살육이 벌어지는 곳이야.”

염왕이 차를 호록 마시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처음부터 포식자가 아니었어. 오히려 내 세상에서 어비스로 도망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지. 내가 살던 세상은 어비스만큼이나 위험천만한 곳이었거든. 그런데 그런 세상에 내가 과연 애착이란 게 있을까?”

“이제는 포식자가 되었으니 네가 네 세상의 법칙을 바꿀 수도 있잖아?”

“굳이?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을까? 힘에 의한 숭배? 그런 건 여기서도 질리게 받아 봤어.”

“그렇군. 애착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지.”

“후후, 난 뜨거운 남자지 싸움에 미친 광인이 아니야. 평화든 싸움이든 내가 내켜야만 추구하는 것이지. 난 지금이 좋아. 그냥 내 정원에서 꽃이나 가꾸며 재밌는 사건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이런 삶이.”

“빙제나 개척왕도 같은 심정일까?”

“모르지, 그놈들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 하나는 모른다는 말이 있잖아? 그보다 그 마스란 놈이야 말로 괜찮은 거냐?”

“그놈은 왜?”

“억지로 데려가서 사과를 시켰다며?”

“그랬지.”

“그러다 불만이 쌓여 나중에 폭주라도 하면 어쩌려고?”

“애초에 힘으로 감당하지 못 할 것 같아 패배를 선언한 놈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놈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앞으로 사과를 몇 번이나 더 해야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 그 녀석은 겨우 그런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지 않아. 오히려 업무의 일환으로 생각할 뿐.”

“특이한 놈이네.”

“애초에 사고방식 자체가 평범한 놈은 아니니까.”

“그 메르키스란 놈들은 찾고 있나?”

“유능한 녀석 하나를 파견 보내 두었지.”

“그 시커먼 놈? 네 부하라던?”

“그래.”

“저번에도 그렇게 보냈다가 어비스 때문에 몇천 년은 감감무소식이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이번엔 달라.”

“어련하시겠어.”

“그럼 이제 그만 슬슬 일어나야겠군.”

“벌써 가려고?”

“일해야지.”

“퇴근했다며?”

“나한테 퇴근이 어딨어?”

“그럼 가기 전에 내 부탁만 하나 들어주고 가.”

“부탁? 무슨 부탁?”

“그게 말이야…….”

이윽고 염왕의 말이 이어졌고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한한 취미가 생겼군.”

“평화로운 게 좋다고 했잖아?”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난 바쁘니 나 대신 전문가를 붙여 주마.”

“그것도 좋지.”

헨리에게 약속받은 염왕이 환하게 웃는다.

*“하하, 안녕하세요. 이번 여행의 가이드를 맡게 된 신재하라고 합니다.”

“자네가 헨리의 수제자라지?”

“반갑구만.”

“이야, 여기가 지구란 말이지?”

“흠, 공기는 별로 안 좋네.”

며칠 뒤, 지구.

재하는 헨리로부터 뜬금없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탑랭커 4인방의 지구 관광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며칠 전, 염왕이 헨리에게 한 부탁이기도 했다.

재하가 어색한 모양새로 하하 웃으며 이번 지구 여행에 참석한 네 사람…… 염왕, 빙제, 개척왕, 극독왕을 보았다.

이들은 현재 출입금지 팻말이 걸린 어느 빌딩 옥상 위에 은신 상태로 있었다.

다들 입고 있는 복장도 그렇고 생김새나 체구나 그 어느 것도 지구의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염왕이 빌딩 난간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지의 풍경을 보며 말했다.

“흠, 확실히 특이한 곳이긴 하군. 흙보다 건축물이 더 많다니. 이곳은 기술이 꽤나 발달한 모양이야?”

“대신 공기가 탁하고 고유 에너지의 질도 터무니없이 별론데?”

염왕의 말에 빙제가 고개를 내젓는다.

그 말에 극독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기가 탁한 게 오래 들이마시면 몸에 해로울 것 같군. 이건 좀 내 취향이야.”

“독쟁이 아니랄까봐, 취향 하고는. 근데 넌 왜 따라왔어?”

“왜 오긴, 할일 없으니 쫓아왔지. 애초에 이중에서 지구에 볼일 있어서 온 놈은 있고?”

“없지.”

“없긴 하지.”

그들의 대화를 듣던 재하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번 여행이 여러모로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것 또한 업무의 일환.

해내야만 한다.

재하가 말했다.

“흠흠, 어르신들 그보다 지구에서 돌아다니시려면…….”

“알아.”

“예?”

“안다고. 외형부터 바꿔야 하는 거. 그래서 미리 외견도 골라 왔지.”

“골라 오셨다뇨? 어디서요?”

“어디긴, 자료실에서지. 몰랐나? 우리한테도 관리자 권한이 있다는 걸?”

“네? 어르신들도 관리자셨어요?”

“메인 관리자는 아니고 위급한 상황 같은 특별한 상황 때만 투입되는 예비 전력이지. 솔직히 어비스 내에서 무력 순으로 줄 세우면 우리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텐데 당연히 우리가 예비 전력이 되는 게 맞지 않겠어?”

“그……렇긴 하죠? 근데 이 건은 스승님께서 말씀을 안 해 주셔서 저도 몰랐습니다.”

“그럴 수 있지. 그보다 다들 이제 외모부터 바꾸자고.”

말을 마친 염왕이 박수를 친 순간, 네 사람의 외형이 일순 바뀌었다.

그런데 바뀐 네 사람의 모습을 본 재하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엥?”

재하의 놀란 표정에 염왕이 물었다.

“왜 놀라느냐?”

“어, 아니 그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싱겁긴.”

재하가 놀란 이유.

사실 네 명 다 제각각에 특이한 외형을 고를 줄 알았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그런.

그런데 네 사람이 선택한 모습들은 다름 아닌 한국 어디서나 쉽게 볼 법한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단정한 오피스룩의.

빙제가 말했다.

“싱겁기는. 표정을 보아 하니 우리가 이상한 거 고를까봐 잔뜩 쫄은 표정이구만.”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구만.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하겠어?”

“그래, 맞아. 명색이 이차원인데 괜히 눈에 띄어서 쓰나.”

“그럼 그럼.”

그 말을 듣고 나니 재하는 뭔가 속이 편해졌다.

어쩌면 마스와는 달리 생각보다 쉽게 쉽게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재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핫,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안내를…….”

“잠깐.”

“네?”

재하의 말을 멈춰 세운 건 염왕이었다.

“굳이 코스 짜서 데리고 다닐 필요 없어. 가고 싶은 곳들은 이미 각자 추려 왔으니까.”

“추려 오셨다구요?”

“그래. 이미 이번 여행 테마도 잡아두었지. 우린 이번에 미식(美食) 여행을 할 거야.”

“미식이요? 여행의 기본 중에 하나가 현지 음식을 먹는 거라곤 하지만…… 혹시 미식이 테마로 잡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신기했다.

외국인…… 아니, 그 이상의 존재인 이차원인이면서 어찌 미식을 테마로 잡을 수 있는 건지.

그 말에 염왕이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욕구에 충실하고 싶은 거야. 근데 우린 잠도 안 자도 되고 쉽게 피로를 느끼지도 못 하는데다 성욕 같은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릴 레벨도 아니니 그럼 뭐가 남겠나?”

“하지만 이차원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든지 문화 체험이라든지 하는…….”

“아아, 그렇잖아도 보고 싶은 장소와 체험하고 싶은 것들도 몇 개 추려 왔어. 근데 추리다 보니 먹고 싶은 게 훨씬 많아서 미식이 테마가 된 것뿐.”

“…그러시군요. 그럼 먼저 어디부터 모시면 될까요?”

그 말에 개척왕이 품에서 막대기 네 개를 뽑아 한쪽 끝을 손에 쥐며 말했다.

“약속대로 제비뽑기로 정하지. 다들 불만 없지?”

“없어.”

“그럼 시작하자고.”

제비뽑기는 재하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진행됐고 환호를 내지른 건 빙제였다.

“좋았으! 내가 걸렸다!”

“에잉.”

“난 누가 되든 상관없어.”

“그래서 뭐 먹을 건데?”

“당연히 시원한 거지.”

“꼭 지 같은 거만 고르네. 그래서 시원한 거 뭐?”

“어디 보자…… 내가 정리해 둔 게 어디 있을 텐데…….”

빙제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얼마간 살피더니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게 좋을 것 같군.”

“뭐 골랐는데?”

“냉면.”

“냉면?”

“차가운 면 요리의 일종이라고 하네. 그보다 재하라고 했나? 우선 냉면이란 것부터 먹으러 가지. 식당도 내가 자료실에서 미리 추려 왔어. 북래옥? 여기로 가면 될 것 같아.”

“아, 알겠습니다.”

세상에.

이것저것 조사해온 줄은 알았지만 심지어 식당까지 알아서 선정해 왔을 줄이야.

그나저나 북래옥이 어디지?

수도권에서 꽤 살았지만 북래옥이란 곳은 처음 듣는 듯 했다.

그래서 자료실을 열어 북래옥에 대해 검색했다.

그리고 북래옥의 정보를 보았을 때 일순 재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표정을 본 염왕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바로 이동하실까요?”

행선지가 결정됐으니 이제 남은 건 이동뿐.

재하 또한 컨셉을 맞추기 위해 이들과 마찬가지인 양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곧장 공간이동을 시전했고 순식간에 북래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식당은 기다림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몇 분이세요?”

“다섯 명입니다.”

“방으로 모실게요.”

마침 룸도 비었다.

이윽고 다섯 명이 식탁에 쪼르르 앉자 극독왕이 물었다.

“내 기억에 냉면이란 음식도 종류가 꽤 다양한 걸로 아는데 여긴 어떤 냉면을 팔지?”

“평양냉면이란 걸 판다는군.”

“평양냉면?”

“지역 이름에서 따왔다는군. 여기가 냉면으론 이 나라에선 손꼽힐 만큼 맛있는 집이라고 하니 한번 먹어 보자고.”

“지구에서 먹는 첫 음식이라 그런지 큰 기대가 되는구만.”

“그러게나 말이야.”

그 말에 재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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