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화
식사를 마친 후 세 사람은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어, 좋다.”
“역시 식사 후엔 아아지.”
“맞아요. 아아를 마셔야 싹 내려가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마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재하 님, 렌 님? 아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줄임말이란 건 알겠는데 대체 뭘 내려 준다는 겁니까? 데이터에 따르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는 소화를 촉진시키는 성분 같은 건 없다고 나와 있는데요?”
그 말에 렌이 킥킥 웃고 재하가 이마를 탁 짚었다.
“그건 그냥 관용어 같은 거야, 실제로 그런 효능은 없지만 기름진 걸 먹거나 배부르게 먹고 나서 이런 커피를 마시면 심적으로 소화가 되는 기분이랄까?”
“아하, 뜨거운 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하는 것처럼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데이터에 있었습니다.”
“그래? 근데 커피가 속을 내려가게 해 준다는 말은 없었나 보지?”
“네, 없었습니다.”
“그럼 이참에 추가해 두면 되겠네.”
“알겠습니다.”
재하의 말에 즉각 자료를 추가하기 시작하는 마스.
재하는 그런 마스에게서 시선을 옮겨 창밖을 보았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뭐가 그리 바쁜지, 다들 빠르게 걷거나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에 골몰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얼마간 지켜보던 재하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래, 이게 원래 지구지.’
헨리가 어비스의 새 주인이 되고 난 후, 지구는 최종적으로 어비스가 나타나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는 역행 대상이 되었다.
역행을 원하지 않는 플레이어들 중 일부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현재의 시간선을 유지한 채로 어비스에 남겨졌다.
어비스 이후에 태어난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끽해야 십대 초반쯤 됐을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원한다면 같은 부모에게 다시 태어나게끔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주거나 그게 싫으면 다른 세상으로 보내 새로운 삶을 약속했다.
물론 모두 선택하지 않고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걸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헨리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주었다.
얼핏 보면 힘들어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어비스 시스템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났기에.
‘진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네.’
시스템과 괴물이 사라진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했다.
모두들 일상을 살아가고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누군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살기 위해 경쟁하는데 뭐가 달라졌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다 개소리지.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받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그때였다.
헨리에게서 연락이 온 건.
- 제자야.
헨리의 영성에 재하가 얼른 대답했다.
- 예, 스승님! 저 지금 지구에 있습니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사장과 직원의 형태.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관계가 어떻든 재하가 헨리를 존경하며 따른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 일찍 퇴근했구나.
- 오늘 할 일은 다 처리해서요.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 나랑 어딜 좀 갔다 왔으면 해서 말이다.
- 출장인가요?
- 그런 셈이지.
- 알겠습니다. 좌표 보내 주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 그래. 올 때 마스도 데리고 오너라.
- 네, 알겠습니다.
대화가 종료된 후, 가만히 듣고 있던 렌이 물었다.
“신 상, 야근입니까?”
“스승님께서 잠시 어딜 좀 갔다 오시자네.”
“고생 많으십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십니까?”
“좌표를 보니 외탑에 있는 아르티사라는 지역이네.”
“그렇군요. 고생하세요, 신 상.”
“마스도 함께 가는데 뭘, 마스도 준비해. 같이 가야 되니까.”
“저도 말입니까?”
“그래. 그럼 우리 먼저 가 볼게, 넌 천천히 복귀해.”
“네엡.”
이윽고 좌표가 전송되었고 재하는 전송받은 좌표로 마스와 함께 이동했다.
*시야가 바뀐 직후,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흙 내음이 먼저 느껴졌고 재하는 그 아래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헨리를 볼 수 있었다.
“스승님!”
“늦었구나.”
“연락받자마자 바로 온 겁니다. 근데 옆에 계신 분은……?”
헨리는 혼자 있지 않았다.
웬 낯선 남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는 재하와 마스를 보자마자 즉각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렌이라고 합니다.”
“하이렌?”
“전직 랭커야. 이곳에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
“아아, 그렇군요.”
어비스 역행 후 이런 일들이 간혹 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시간 역행이 이루어지고 난 후 죽은 이들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관계가 껄끄러워진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이렌은 과거, 아르티사를 침공할 때 파견되었던 랭커들 중 하나였다.
뒤늦게 관련 자료를 다운받은 재하가 물었다.
“근데 혼자만 오셨나 봐요? 침공 때 투입됐던 랭커는 하이렌 님을 포함해서 총 세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나머지 녀석들은 별로 사과하고 싶지 않답니다.”
“음, 그렇군요.”
그 말에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당시 침공 작전에 투입됐던 랭커들은 대부분이 관리자들의 명령을 받아 출격된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헨리가 말했다.
“억지로 사과시켜 봤자 진정성도 없을 텐데 굳이 사과시켜서 뭐해. 그보다 두 사람도 인사하지.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일 텐데.”
그 말에 마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어비스 주인이자 현 관리자로 재직 중인 마스라고 합니다.”
“예, 예?”
그 말에 하이렌이 깜짝 놀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들 어비스의 주인이 바뀐 건 알지만 마스를 직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놀란 하이렌의 반응에 마스는 그저 기계처럼 미소 지었다.
별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을 텐데.”
그때였다.
휘오오!
갑자기 일어나는 돌개바람.
그 중심에 왠 꼬마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관리자 여러분! 저는 용신님들을 보좌하는 보좌관이자, 여러분을 모시러 온 토미라고 합니다!”
꼬마의 이름은 토미.
이곳, 아르티사의 수호자들인 ‘용신’들을 보좌하는 보좌관이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가도록 하지.”
“넵!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일행을 데리러 온 토미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시 한번 돌개바람이 일며 이번엔 토미와 일행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보인 건 구름 위였다.
바닥은 새하얗고 매끄럽게 다져진 돌들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거대한 궁전이 지어져 있었다.
“이곳은 용신님들의 신전입니다! 안으로 모실게요!”
토미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어 나가며 일행들을 안내했다.
그러자 거대한 문짝이 저절로 열리며 헨리 일행을 맞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젊은 남녀들을 볼 수 있었다.
아르티사의 수호자들인 용신들이었다.
헨리는 그중 중심에 서 있는 인물에게 아는 체를 해 보였다.
“오랜만이군.”
“후후, 자네도 오랜만이군. 이게 얼마만이지?”
헨리에게 아는 체를 해 보이는 이.
다름 아닌, 반룡(半龍)이자 광룡(狂 龍)으로 불리던 스카샤였다.
그들 사이에 새하얗고 기다란 탁자가 생겨났고 용신 다섯이 맞은편에 앉았다.
헨리도 자연스럽게 일행과 함께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스카샤가 말했다.
“처음 보는 이도 있으니 다시 한번 소개하지. 우린 아르티사를 수호하는 다섯 용신들이네.”
“관리자 신재하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카샤의 소개에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는 재하.
이어서 다섯 용신의 시선이 하이렌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용신들은 이미 헨리에게 오늘 누가 방문할 것인지 전달받았기 때문.
그러나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이 자리는 사과를 하는 자리지 싸우는 자리가 아니라고 헨리가 미리 못 박아 두었기 때문.
그들의 시선이 모이자 하이렌이 어색한 모양새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하, 하이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사과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어색한 인사.
그에 스카샤가 모른 척 물었다.
“사과라면 어떤 사과 말이지?”
“당신들을 해쳤던 과거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하이렌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것은 칼날이 새하얀 특이한 검이었는데 손잡이가 고급스럽게 마감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과거 스카샤의 팔을 잘라 만들었던 검이었다.
“이걸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스카샤의 팔로 만든 검.
당연히 지금은 스카샤의 팔 두 짝이 온전히 붙어 있다.
시간이 역행됨에 따라 신체도 수복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아무리 신체가 수복됐다고 해도 자신의 신체 일부로 전리품을 만들어 썼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일.
그 검이 자신의 팔임을 알아본 스카샤…… 아니 모든 용신들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흠흠, 왠지 지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때 목소리를 낸 건 다름 아닌 마스였다. 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어비스 주인이자 현 관리자로 재직 중인 마스라고 합니다.”
그 말에 스카샤를 비롯한 용신들의 눈이 커졌다가 잠시 작아졌다.
헨리에게 미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모든 사건의 원흉 되는 자의 입에서 자신의 정체를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윽고 마스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이미 헨리에게 마스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용신들은 마스의 말허리를 끊지 않고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설령 그것이 변명이라 할지라도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만큼 진정성이 느껴지는 건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 모든 건 저로 인해 벌어진 일입니다. 어떠한 말로도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르티사의 수호신 여러분.”
고개 숙여 사과하기를 한참.
마침내 스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서하도록 하지.”
그 말에 재하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쉽게 용서해서였다.
그도 그럴 게 다른 피해자들은 이렇게 쉽게 사과하지 않았으니까.
스카샤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에 기초하는 법이지. 그러니 사실 세상의 진리대로라면 이런 사과는 안 해도 그만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사과를 해 주니 받아 줄 수밖에. 뒤늦게라도 사과해 줘서 고맙네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스카샤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 숙이는 두 사람.
헨리가 말했다.
“잘 풀려서 다행이군. 또 볼지 안 볼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서로 마음의 돌덩이는 지우는 편이 낫지.”
“이런 자릴 마련해 줘서 고맙군.”
“어비스의 새 주인이자 과거의 인연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 혹여 또 다른 문제가 생기거든 언제든 연락 줘.”
그 말에 스카샤가 피식 웃었다.
“정말 관리자 다 됐군.”
“그럼 먼저 가 보도록 하지.”
아르티사에서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과를 위해 모인 자리이니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것도 없었기에.
관리국으로 돌아온 직후, 하이렌이 말했다.
“이런 자릴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까지야.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잘 했어.”
하이렌의 감사 인사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마스가 뒷말을 덧붙였다.
“미안합니다. 그런 일을 하게 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하이렌은 도망치듯 관리국을 떠났다.
하이렌이 떠난 뒤, 잠자코 있던 재하가 그제서야 물었다.
“근데요, 스승님.”
“왜?”
“이런 자리였으면 사실 스승님과 마스만 갔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마스만 보냈어도 되지 않나요?”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으니 인원을 좀 늘렸다. 불만이더냐?”
“아닙니다. 그냥 여쭤봤습니다. 근데 하이렌 저 사람은 왜 갑자기 사과한 거래요?”
“세상이 바뀌었으니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지.”
“불안이라…….”
하긴.
누가 내 팔을 갖고 있고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누구든 복수하려 할 테니까.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도 꽤 피곤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