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6화
지난 몇 개월간 헨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트레이닝에 돌입했다.
사실 급할 건 없었다.
마음이 조급할 뿐이었지.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헨리는 속도보다는 방향성과 디테일에 초점을 두기로 했고 그래서 염왕의 제안을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빚어지려던 순간이었다.
헨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의 전신을 두르고 있는 새카만 불길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나의 불…….’
염가원.
처음엔 지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은 지옥이 아니었다.
염왕의 트레이닝에 시작되고 꽤 많은 고통이 뒤따랐지만 처음 이곳에서 살이 태워졌을 때보다는 그 고통이 덜했다.
거인의 근골과 뱀의 운명이 헨리를 계속해서 재탄생시켜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외향적 강화보다는 내적 강화로 진화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지옥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저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곳. 그리고 어비스의 모든 불들이 모여 있는 정원. 그래서 염가원이었던 것이다.
헨리는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시커먼 불들을 신기한 모양새로 보았다.
트레이닝이 이루어지는 동안 염왕은 끊임없이 불과 대화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과 가장 닮아 있는 불을 찾으라 했다.
참선이었고 수행이었다.
그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이 흑색 불꽃이었다.
헨리가 가부좌 튼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염왕과 빙제가 다가왔다.
염왕이 물었다.
“그래, 그게 너의 불이구나.”
“이 불에 대해서 아나?”
“알다마다. 그나저나 꽤 보기 드문 놈과 어울리게 되었구나. 그 불의 이름은 성염(聖炎)이다. 모든 것을 불태워서 구원하는 불이지. 난 당연히 네게 멸화나 억화가 붙을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거나 생긴 것에 비해 넌 훨씬 더 좋은 놈이었어.”
성염(聖炎).
태우는 것으로 구원하는 불.
그렇다면 검은색이 아닌 하얀색이 맞는 게 아닐까?
그런 색깔론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염왕이 피식 웃었다.
“생각이 뻔히 보이는구나. 그거 아느냐? 오히려 악이 더 하얗다. 진짜 악들은 자신의 죄가 보일까 두려워 항상 희고 깨끗한 면만 보여 주려 하거든. 하지만 진짜 성자는 자신의 몸에 구정물이든 진흙이든 구원만 할 수 있다면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단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불태워 염하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신성하고 존귀한 색은 흑색이다. 또 염가원에서 가장 강력한 불꽃이 바로 네 손에 있는 성염이지. 어디 한번 실험해 보겠느냐?”
그 말과 함께 염왕이 곁에 삐딱하게 서 있는 빙제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러자 빙제가 앞으로 걸어 나와 푸른 깃털로 덮인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난 빙제다. 네놈이 쓰러뜨려야 할 다음 상대지.”
“다음 상대? 그럼 당신이 랭킹 2위인가?”
“그래. 내가 2위다. 낮잠 자고 일어났더니 이게 뭔 일인지.”
“그래서, 지금부터 당신과 랭크전을 벌이면 되는 건가?”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구나?”
“말이 많군.”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불었다.
바닥엔 흑색 옥판이 깔렸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철조망 같은 건 솟지 않았다.
염왕은 멀리 떨어져서 의자에 기대 곧 벌어질 재미난 구경을 잔뜩 기대했다.
쩌적- 쩌저적-
그 순간, 빙제 발아래로부터 서리가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곧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 공기도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거 아냐? 네가 아무리 성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깨우쳐도 내 입장에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
빙제는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큼 도발에 쉽게 넘어오는 다혈질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고.
그래서 헨리의 행동에서 건방짐을 느껴 금방 흥분했다.
오히려 좋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봐주는 것이 없을 테니.
그러나 헨리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빙제는 분명히 흥분했다.
하지만 흥분했다고 해서 생각까지 미처 날뛰는 건 아니었다. 빙제의 흥분은 그냥 피가 끓는 정도다.
피가 끓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전투를 위한 아드레날린을 분비할 뿐 그의 머릿속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헨리가 화산검을 들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 <업화>가 발동됩니다. ]
[ <업화>가 <성염>으로 변경됩니다. ]
[ <성염>이 발동됩니다. ]
[ 스탯이 일부 변경됩니다. ]
[ <염기> 스탯이 <화력>으로 변경됩니다. ]
스킬 사용 한 번에 꽤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염가원에서 첫 번째 트레이닝을 마쳤을 때였다.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아니, 기분 좋은 변화였다.
헨리는 성염이 된 업화를 발동시켜 몸 구석구석에 둘러 바뀐 무구의 감각을 익혔다.
그것들을 익히는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원래도 숨 쉬듯 사용하던 것인데 이름과 디자인 좀 바뀌었다고 느낌이 다를까.
헨리에겐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에겐 단순해 보이는 행위가 염왕이나 빙제에겐 자기도 모르게 놀라움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성염이 가진 화력 때문이었다.
‘크흐흐, 어떤 불과 짝지어질까 무척 궁금했는데 하필이면 성염이라니. 역시 놈은 내가 본 자들 중 최고의 포텐셜을 지닌 놈이야.’
여태 염왕이 직접 후원한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흥미와 재미를 찾아 아래층을 뒤적이는 양반이라지만 그의 눈은 높다 못해 천산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염왕이 직접 시스템을 통해 초대장을 보낸 플레이어였다.
그 소식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헨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개중에 몇몇은 호기심으로 헨리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감탄 밖에 할 수 없는 인물. 그런 인물이 바로 헨리였다.
‘염왕 녀석이 왜 그리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만 하군.’
염가원에 수많은 불들이 있다면 빙화연에는 오직 한 종류의 서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얼어 붙여 굴복시키게 만들 서리, 극한(克寒)이었다.
빙제는 처음부터 극한을 펼쳤다.
그렇기에 몇 초도 안 돼 그 염가원에 냉기가 서린 걸 테지.
그런데 눈앞의 루키 놈은 그런 극한을 사용하는 자신을 상대로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차가움을 상쇄시킬 끓어 넘치는 열기를 표출하고 있었다.
“선공을 양보하지.”
그렇기에 궁금했다.
무술가처럼 한손을 내밀고 한손을 허리춤에 붙여 두 발을 어깨 넓이보다 더 넓게, 기마 자세를 취한 빙제는 선뜻 후배에게 선공을 양보했다.
그 양보에, 헨리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얼마든지.”
헨리는 검을 들었다.
그런 다음 행동에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했다.
한 번의 휘두름 뒤에 올 공격이라든지 기습 같은 것을 계산치 않고 오직 이번 일격 한 방에 자신을 보여 주겠다는 일념으로 칼날에 성염을 실었다.
성염도 주인의 의지를 알았는지 헨리의 화산검을 폭풍의 눈 삼아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그 과정에서 염가원의 모든 불들이 일렁이며 열광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끝없이 흔들거리며 목이 터져라 헨리를 열망했다.
그런 불들의 목소리를, 외침을, 욕망을, 염왕은 온몸으로 만끽하며 눈을 감고 전율했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검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일순, 염가원에 밤이 내렸다.
환상? 착각?
그런 게 아니었다.
화산검에 응축되어 있던 칠흑색 성염이 폭발하며 정말로 염가원에 찰나의 밤을 선사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밤이 걷히고 광명이 들었을 때, 헨리의 검 앞에는 두 팔을 교차로 막은 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빙제가 있었다.
“…….”
세 사람은 침묵했다.
빙제의 몸이 까맣게 그슬려 있었고 곳곳에는 연기가 치솟았다.
그것을 본 염왕이 말했다.
“거, 빙닭 놈 한번 자알 튀겨졌네.”
“…….”
그 말에, 빙제는 그제서야 천천히 팔을 내렸다.
다행히 얼굴은 그슬리지 않았다.
빙제의 표정은 건조했다.
그러더니 연기 피어오르는 자신의 몸을 얼마간 쳐다보더니 염왕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넌 이 녀석이 성염을 깨우치기 전에 싸워서 졌다는 거냐?”
“뭐…… 그런 셈이지?”
“이 녀석의 불, 너보다 더 아픈 것 같다.”
“뭐? 에라이, 이놈아! 아무리 질 게 쪽팔려도 그렇지 나를 깎아내려서까지 그러고 싶냐?”
“진 놈 핑계는 별로 듣고 싶지 않군.”
“뭐 이 자식아?!”
염왕이 씩씩거리든 말든 빙제는 헨리를 보았다. 그런 다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빙제라고 한다. 염왕이 괴물을 주워다 더 한 괴물로 만들 줄은 몰랐군. 이럴 줄 알았으면 놈이 후원한답시고 기웃거릴 때 나도 할 걸 그랬어.”
“헨리라고 한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아 악수를 나누었다.
단 한 합이었지만 빙제는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사실 염왕이 말이 3위지 빙제는 단 한 번도 염왕이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놈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전의 일격은, 확실히 염왕의 것보다 더 뜨겁고 아팠다.
그런데 염왕을 이긴 것은 성염을 익히기 전이라고 하니 더 이상의 힘 낭비는 불필요하게 느껴진 것이다.
빙제가 물었다.
“그럼 이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은 비밀을 말해 줘도 될 것 같은데?”
“비밀?”
“어떻게 염왕을 이긴 거지? 염왕은 실력으로 자신을 패배시켰다곤 하지만 자세한 과정은 말해 주지 않더군. 분명 사실을 감춰 날 골탕 먹이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난 더 이상 너와 싸울 생각이 없고 나 또한 패배를 인정하겠다.”
그 순간.
[ <플레이어 : 빙제>는 <플레이어 : 헨리 모리스>에게 패배한 것을 인정합니까? ]
[ 인정할 경우, 상층 내 랭킹 순위에 변동이 생깁니다. ]
아카이브 알림이 빙제에게 물어 왔고 빙제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 헨리 모리스> 님은 <플레이어 : 빙제>를 꺾고 이 시간부로 상층 랭킹 2위에 랭크되셨습니다! ]
[ 플레이어님의 사유지에 영광스러운 휘장이 걸립니다. ]
……
여러 알림들이 떴지만 헨리는 빙제와 마찬가지로 알림들을 지우고 대화에 집중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염왕을 통해 빙제가 어떤 플레이어인지는 대번에 파악했다.
그래서 복잡하게 거쳐 갈 것 없이 헨리가 직접 거울용과 최상층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랭킹 1위에 대한 도전 따위에 대한 것들을 빙제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빙제의 눈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헨리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빙제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염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에 염왕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빙제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피가 끓기 시작했고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자기도 모르게 뱉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 여정에 동참해도 되겠나?”
그에 이번에는 헨리가 손을 내밀며 화답했다.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