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487화 (487/522)

2부. 87화

새 파티가 구성됐다.

파티원은 헨리와 클레버, 그리고 염왕과 빙제로 이루어진.

모두들 좀처럼 파티를 맺지 않는 플레이어들이었으나 모두들 헨리라는 구심점 아래 싱글벙글 모여 들었다.

네 사람은 빙제의 소환수인 커다란 얼음새인 ‘빙옥’을 타고 창공을 가르고 있었다.

개척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럼 이제 개척왕 그놈 하나 남은 건가?”

“그렇지. 그놈 남았지.”

염왕과 빙제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상층 생활에 일어난 아주 이례적이 이벤트였으니까.

클레버가 물었다.

“근데 그 개척왕이라는 분은 얼마나 강할까요?”

“개척왕? 그놈 강하지. 엄청나게.”

“두 분 보다 더요?”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인 건 맞지. 아, 그건 개척왕 말고도 우리 둘 다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 우리가 괜히 오랫동안 삼석을 꿰차고 있었겠어?”

“그렇군요…… 근데 개척왕은 어떤 분이신가요? 상층 랭킹 1위시면 그래도 탑 전역에 명성이 자자할 줄 알았는데 중층에 있던 저도 거의 들어 보지 못했거든요.”

“당연히 모를 수밖에.”

“네?”

“넌 랭크판이 어떤 기능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느냐?”

염왕의 물음에 클레버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력에 대한 순위…… 경쟁?”

“아니. 그건 자기들 보기 편하라고 만든 거야.”

“자기들 보기 편하라구요? 어느 자기요?”

“관리자들.”

“관리자들요?”

“그래. 얼핏 보면 우리 심심하지 말라고 제공해 준 일종의 오락거리처럼 보이지만 그건 명분일 뿐이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어. 바로 자기들이 쓰기 편하게 알아서 무력 순위가 정렬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거야.”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클레버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빙제가 설명을 이었다.

“저 녀석이 거인들을 중층으로 끌어 올렸다고 했지?”

“예, 주인님께서 그러셨습니다.”

“거인들은 원래 상층에 와도 부족하지 않을 전력이야. 그럼에도 중층과 그 아래층에 남아 있던 건 자신들의 긍지 때문이지. 그리고 탑에서 그런 긍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서다. 그런데 어비스는 어떻게 저런 거인들을 탑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빙제의 설명에 클레버는 그제서야 이해가 확 됐다.

“비스들로는 안 되니까 랭커들을 투입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가 사용하는 이 에테르란 힘은 차원계에서도 거의 최상위에 속하는 힘이다. 힘의 등급 자체가 뛰어나면 적게 수련해도 오래 수련한 등급 낮은 힘을 쉽게 깔아뭉갤 수 있으니까. 그런 에테르를 극의까지 단련한 랭커들이라면? 그리고 그 랭커들을 다른 차원을 침공하는데 최종병기로 쓸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하겠죠.”

“그래. 랭크판은 그런 어비스 놈들을 위해 만들어진, 오직 자신들을 위한 시스템이라는 거야. 물론 이 사실을 풋내기들은 잘 몰라. 우리처럼 이 바닥에 오래 고여 있는 고인 물들이나 알지.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랭킹이 주는 명성 따위엔 관심이 없는 거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염왕과 빙제가 왜 그리 쉽게 자신의 자리를 헨러에게 내주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클레버가 물었다.

“그럼 두 분을 비롯해 개척왕이라 불리는 분들도 한때는 다른 차원을 침공하셨겠네요?”

“아니, 우린 안 했어.”

“네? 그게 가능한가요?”

“거절했거든. 그리고 우리가 거절해도 할 놈들은 많아.”

“왜 많아요?”

“보통 상층까지 올라온 놈들 중에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놈들이 있겠냐? 피에, 싸움에, 전투에 미친놈들이 반절 이상인데 그런 놈들한테 싸움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놈들이 어딨어?”

“아…….”

“그리고 어비스 입장에서도 우리 같은 존재는 좀 껄끄럽거든. 힘은 좀 약할지언정 고분고분해야 이것저것 시킬 수가 있는데 힘 좀 세다고 뻣뻣한 놈을 누가 쓰겠어? 그래서 침공 나가는 놈들은 보통 중하위권 놈들이 대부분이야.”

“물론 반절은 싸움에 미친놈들이지만 반절은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놈들이기도 하지. 생각해 봐라, 여기 어비스에 입탑한 놈들 중 과연 제 고향 놔두고 제 발로 들어온 놈이 얼마나 있을지.”

“그렇군요.”

생각지도 못한 정보들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비스는 반드시 부숴 없애야 할 존재라고 생각됐다.

클레버가 물었다.

“그럼 이제 뵈러 가는 개척왕이란 분도 두 분과 생각이 비슷하세요?”

“비슷하긴 하지. 근데 좀…….”

말을 잇던 염왕이 뒷말을 흐리자 빙제가 이었다.

“걔는 좀 미친놈이야. 아니 많이.”

“미쳐요?”

“이상한데 꽂혀 있는 놈이거든. 그래도 어쩌면 그래서 더 쉽게 꼬드길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떤 거에 꽂혀 계시는데요?”

“가 보면 알아. 근데 이 자식이 어디 있으려나…….”

“캔시 말로는 북부 미개척지에 있다고 했으니 그리로 가 보면 되겠지.”

“저 녀석인 것 같군.”

“음?”

빙옥의 머리 위에 홀로 서 있던 헨리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눈에는 라의 눈과 여왕의 눈이 동시에 발동 중이었다.

헨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염왕과 빙제가 고개를 틀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네, 저거.”

“저기 있었네.”

“히야, 징한 놈. 이번엔 뭐랑 싸우고 있다냐.”

멀리 있어 클레버는 안 보였지만 세 사람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저 멀리.

점처럼 찍혀 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통 덩치를 가진 걸 알 수 있는 존재가.

그는 3m에 달하는 거대한 키와 근육선이 도드라지는 굵직한 덩치, 그리고 머리와 인중, 턱 전체가 남색 털로 이어진 바이킹족 같은 사내였다.

이외 더 자세한 특징은 상의 없이 하의만 입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휘두를 수 있을지나 의심되는 거대한 두 손 망치를 휘두르며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것.

괴물은 더 했다.

웜의 일종으로 보이는 녀석은 길이만 수십 미터에 달해 보였는데 두께 또한 수 미터에 이르러 보였다.

입에선 불도 뿜었다.

그러나 개척왕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매섭게 놈을 몰아세웠다.

“저거 지로스 아냐?”

“토룡 지로스? 맞네, 지로스. 저놈도 참 대단하다. 기어이 지로스한테 덤비는구만.”

“지로스? 지로스가 뭔데요?”

“상층의 십악이라 불리는 놈들 중 하난데 웬만해선 피해 다니는 놈인데 기어이 저러고 있네.”

“아마 지로스의 땅에 꽂힌 거겠지.”

“그래 그거 아니면 미쳤다고 덤볐겠어?”

괴물의 이름은 지로스.

지로스와 개척왕의 싸움은 치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로스의 신체들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지더니 종국엔 머리통이 찌그러지며 그 거대한 몸뚱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쿵!

개척왕이 승리했다.

그는 신성한 노동의 땀을 닦듯 사뭇 개운한 얼굴로 이마를 훔친 다음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건 다름 아닌 거대한 쇠말뚝이었다.

말뚝을 꺼낸 개척왕은 이윽고 지로스의 머리 위에 쇠말뚝을 박아 넣더니 이내 곧 그 육중한 망치를 휘둘러 사정없이 망치질을 시작했다.

캉! 카강! 캉! 카강! 캉!

일정한 리듬에 맞춰 망치질을 하던 개척왕은 지로스의 머리가 땅에 완전히 파묻히고 쇠말뚝이 반절쯤 땅 밑에 심겨졌을 때 그제서야 망치질을 그만 두었다.

빙제도 그쯤 빙옥을 아래로 내렸다.

“음?”

염광과 빙제의 등장에 개척왕이 아는 체를 해 보인다.

“이게 누구야? 염왕이랑 빙제 아냐?”

개척왕은 눈에 검은자가 없는 백안이었지만 그럼에도 전혀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 살가운 인사에, 염왕과 빙제도 반가움을 표했다.

“여전하구만. 그 개척 욕구는 기어이 지로스의 땅까지 집어삼켜 버렸어.”

“워낙 탐이 나서야 말이지. 그나저나 옆에 붙여 온 건 뭔가?”

개척왕은 헨리와 클레버를 옆에 붙여 온 것이라고 표현했다.

무례한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 자신이 탑 랭커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일 터.

그 말에 염왕이 손을 내저었다.

“딸려 온 것들이라니? 말조심하게, 우리가 모셔온 자들이야.”

“모셔 왔다고? 너희들이?”

“그래. 못 들어 봤나? 요즘 뜨거운데, 헨리 모리스라고.”

“처음 듣는 이름인데?”

“랭크판도 안 보고 살아?”

“너희들은 그런 것도 보나?”

“하긴 우리도 안 보긴 하지.”

“너희들도 안 보면서 무슨.”

“크하하, 하긴 그렇지.”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인가? 그것도 두 사람이 한꺼번에 오고 말이야.”

“다름이 아니라 자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제안?”

그 말에 헨리가 나섰다.

“당신이 개척왕인가?”

“그렇다만…… 넌 누구냐?”

“난 헨리 모리스다. 랭킹은 2위고.”

“2위?”

그 말에 개척왕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염왕과 빙제를 보았다.

그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개척왕은 더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서,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나한테 할 제안이라는 게 뭐지?”

“혹시 최상층에 관심 있나?”

“최상층?”

그 말에 개척왕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흐흐, 설마 둘 다 이 애송이가 말한 최상층 때문에 이렇게 붙어 온 거야?”

개척왕의 물음에 염왕과 빙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개척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미쳤구만. 최상층이 어디에 있는 건 줄 알고? 그런 게 있었으면 나부터 진작에 가지 않았겠어? 그래. 만약 관심 있다면?”

“나 또한 관심 있다. 정확히는 어비스를 만든 놈들이 보고 싶어 가려는 거지만.”

“그래서? 가는 방법은 알고?”

“정확한 방법은 모르지만 가능성 있는 곳은 알고 있다.”

“가능성?”

“그래.”

헨리의 대답에 개척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헨리에게 말했다.

“이봐, 꼬마야. 내가 왜 개척왕이라 불리는지 아느냐?”

“모른다.”

“보아 하니 상층에 온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저 둘이 직접 모셔왔다는 표현을 쓰니 내 친히 알려 주도록 하지. 내가 개척왕인 이유는 상층의 미개척지들만을 골라서 개척하기 때문이다. 말인즉, 상층에서 나보다 상층에 대해 잘 알고 많이 돌아다녀본 플레이어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상층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토지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마 이제 곧 절반 이상이 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미개척지의 원주인과 점령전의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게 바로 이곳 상층이란 말이다. 그런 나도 모르는 걸 네깟 놈이 어찌 안단 말이냐?”

“나도 모른다. 그래서 최상층의 위치를 알고 있을 법한 자를 찾아가려는 것뿐.”

“알고 있을 법한 자? 그게 누군데?”

“관리국 국장.”

“뭐?”

“영역 넓히기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관리국은 네 영역에 포함 안 되어 있겠지. 내 말이 틀린가?”

“아니 그건 주인이 있으니 당연히 안 건드린 곳이긴 한데…….”

개척왕이 황당한 표정으로 염왕과 빙제를 보았다.

두 사람은 어떠냐 이놈아? 같은 표정으로 광대를 들어 올려 보였다.

“미친놈들, 그러니까 최상층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관리국을 털자는 거 아냐?”

“맞아.”

“바로 그거지.”

“미친놈들……!”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개척왕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소는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그거 완전 좋은 생각이구만. 감히 나조차도 생각 못한 방법이었어.”

0